정병주 장군 ‘자살’에 의문
  • 정희상 ㆍ김상현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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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주 장군은 88년 10월 중순 평소와 다름없이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가 잠적 4개월 만인 89년 3월초 경기도의 한 군부대 숙영지에서 목을 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검경 수사진은 시체 발견 당시 목을 맨 채 숨져 있고 주변에 빈 소주병 3개가 널려 있었으며 부검 결과 혀가 나와 있었다는 점을 들어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당시 정장군이 쿠데타 진압이 실패한 실의를 딛고 진상 규명에 적극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사목 사업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군에서 그와 함께 근무해본 사람들은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보아 결코 자살할 위인이 아니었다는 평들이다. 또 목을 맨 나일론 끈이 보통 자살의 경우와 달리 올가미  형이 아닌 그네 형으로 묶여 있던 점도 의문을 제기됐다.

 사망 소식을 듣고 시체 발견 현장에 달려가 유족들과 함께 수습에 나선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은 “내게 ‘오래오래 살아 역사의 증인으로 12ㆍ12쿠데타를 증언하고 명예를 회복하자’는 긴 편지를 보내온 일이 있어 자살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태완 장군은 정병주 장군이 사망하기 전에 보내온 편지를 《시사저널》에 공개했다. “오늘 장장군댁을 방문한 후 보다 튼튼하게 살아보겠다고 보신탕집을 찾아 두꺼비(소주) 두마리를 잡아먹고 편지를 씁니다” 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시종 역사의 증인임을 명심하고 건강을 지키자는 당부와,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 수집 진척 정도, 애로 사항 등을 담고 있다. 특히 진상 규명 노력과 관련해서는 “목적하는 바가 성사될 때까지는 보안에 유의하고 자료 수집에 열중합시다. 이 편지는 보시고 소각하십시오”라고 끝을 맺어 상당한 위협 의식을 느끼며 12ㆍ12진상 규명에 적극 나섰음을 암시해준다.

 “최세창ㆍ박희도 씨 등 자신이 직접 키운 후배들에게 배반당해 총상을 입고 살아왔다”는 정병주 장군은 그 점을 무척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을 호위하던 김오랑 비서실장이 쿠데타군에 의해 사살된 후 그 죄책감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묘소를 돌보았다. 김소령 미망인마저 12ㆍ12 충격으로 실명한 후 사망하자 정장군은 아들을 불러 “훗날 내가 죽은 후에도 너희들이 계속 참배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정장구 S사망 후에는 해마다 한식날 아들 승환씨가 김오랑 소령의 묘를 찾고 있다.

 승환씨는 “가정이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뜻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12·12사태와 선친이 작고한 진상이 규명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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