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진두지휘한 ‘강성’
  • 김재일 정치부 차장 ()
  • 승인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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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 총장 “이제는 YS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지난 4월6일 오전 6시30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은 아침 운동을 위해 성산동 집을 나서 뒷산으로 향했다. 최총장은 이미 나와서 운동하고 있는 40여명과 일일이 악수하고 아침인사를 나우었다. 최근 염색한 그의 머리를 보고 “총장님 젊어졌네요”라고 인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 머리 좋다”라고 아예 반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다. 최총장은 그들과 어울려 맨손체조와 역기 들기를 한 후 조깅에 들어갔다. 1백m 코스를 다섯 번 왕복해 총 1㎞정도를 뛰었다. 그후 두 사람씩 한조가 돼 배드민턴 시합을 했다. 최총장뿐만 아니라 다른 세사람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실력이다. 대개 이런 순서로 운동을 하는 데 한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최총장이 아침 운동을 시작한 것은 20년전.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를 빼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헬스클럽 회원권도 없지만 실내에서 운동하는 것보다 바깥에서 하는 것이 훨씬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오니 기자들을 포함해 손님 5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당사에 도착한 것이 8시45분. 권해옥 사무제1부총장, 강재섭 대변인, 백남치 기획조정실장, 조부영 사무제2부총장이 차례로 총장실에 들러 하루 일정을 간단하게 보고했다. 최총장은 출입기자들과 10여분 간담회를 가진 후 김종필 대표 방으로 갔다. 그와 함께 월례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하루에도 몇번씩 대통령과 독대

 김대표의 인사말이 끝난 후 최총장의 인사말 차례. 그는 “취임한 지 꼭 한달인데 6년 정도 된 듯한 기분이다. 우리만 모인 점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새 역사 창조를 위한 진통으로 생각하자”며 당 감축에 대한 가슴 아픈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이어 “당은 종교 단체도 친목 단체도 아니다. 정권을 창출한 정당으로서 어떻게 하든 위계 질서를 확립하겠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당무회의가 9시30분부터 한시간 가까이 열렸다. 김대표 주재로 열린 당무회의에서 최총장은 “많은 고통이 따랐지만 재산 공개가 잘 마무리됐다”라고 말하고 앞으로는 정치풍토 개혁을 위해 법과 제도를 개혁해 나가겠다고 보고했다. 10시30분에는 보궐선거 대책 회의. 이 회의에 참석한 사무처 요원 20여명에게 필승하라고 당부한 뒤 나오자마자 김대표 방으로 다시 갔다. 11시부터 열리는 고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이 자리에는 김명윤 김정례 권오태 이종근 이만섭씨 등 당 고문 7명과 김대표, 최총장 그리고 김영구 원내총무가 참석했다. 12시에는 인근 음식점에서 고문들과 함께 식사했다.

 점심 식사후 당사로 돌아온 최총장은 경리국장 총무국장 기획조정실장 사무제1부총장 기획국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그후 민주자유청년봉사단 강원도 단장, 이북 5도 분과위원회 위원장, 여류 소설가를 포함해 10여명의 손님을 만났다. 4시에는 김대표실에서 외무 당정 회의가 열렸다. 김대표와 당 3역외에 김덕룡 정무장관, 한승주 외무부장관, 정재철 노재봉 이세기 박정수 안무혁 의원이 참석했다. 당정회의가 끝난 시각은 4시 50분. 최총장은 총장실에 잠시 들렀다가 10분후 급히 밖으로 나갔다. 총장실 직원에 따르면 김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로 떠났다고 했다.

 최총장의 하루는 이렇듯 바쁘게 돌아간다. 당사 안에서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숫제 뛰어다닌다. 아침 저녁으로 그의 집을 찾는 방문객은 하루 평균 40명 정도. 그는 지금 정치권에서 가장 바쁜 사람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이 있으면 하루에도 몇번씩 김영삼 대통령을 독대하며 당무뿐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언한다. 최고 권력자와 만나는 시간과 횟수가 한 정치인의 힘을 규정짓는 잣대라면 그는 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실세임에 틀림없다. 그는 김대통령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당 감축과 재산 공개라는 난제를 마무리짓기도 했다.

 최총장은 지난 33년간 김대통령과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모시다 보니 김대통령의 눈빛만 봐도 그의 뜻을 읽을 정도가 됐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대선이 끝난 후 김대통령이 말은 안했지만 당을 자신에게 맡길 거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함께 정치 역정을 걷는 동안 그는 여러 면에서 김대통령을 닮아왔다. 아침 운동을 계속하는 것, 5분 전에 약속 장소에 먼저가 기다리는 것,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하면 철저하게 지키는 것, 아래 사람의 좋은 아이디어를 서슴지 않고 채택하는 것 들이 그것이다.

 지금은 성격이 많이 변했으나 원래 다혈질이었던 최총장에게는 그에 따른 일화가 많다.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맞붙었던 71년 대통령선거 때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아성이었던 울산 지역에서는 투개표 부정이 노골적으로 자행됐다. 야당 감시원이 박후보를 찍은 것으로 위장한 표 한 무더기를 적발하자 지구당위원장이었던 최씨는 울산시장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아무런 해명이 없었다. 최씨는 시장실로 쳐들어가 시장의 가슴이 ‘부정 투표의 원흉’이라고 쓴 표찰을 붙이고 그의 목에 새끼줄을 감아 몇시간 동안 시내를 끌고 다녔다. 이 사건은 선거 부정을 전국적인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약사의 죄인 되느니 형무소 가겠다”

 9대 국회에서 상공위 간사를 맡고 있을 때 ‘뒤가 구린’한 시멘트 회사에서 대리점을 몇 개 내도록 해 주겠다는 유혹이 들어왔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런데 야당의 한 선배 의원이 그 회사를 비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때 그는 “뇌물을 먹었다”며 그 의원의 좌석으로 뛰어가 뺨을 때렸다. 이런 일화는 그의 다혈질 성격과 함께 타협하지 않는 일면을 잘 보여준다.

 최총장은 유신 정권과 5공 정권에서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드는’ 고문을 당했을 뿐 아니라 장관을 맡으라는 유혹을 수차례 받기도 했다. 그는 오직 김영삼씨를 향한 일념으로 그 고초와 유혹을 극복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유신 정권은 ‘마지막 발악’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고 야당을 정운갑 체제로 굳히려고 기도했다. 당시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부부장, 이후락 전 중앙정부부장이 차례로 나서 최씨에게 당기위원장직을 내놓으라고 종용했다. 그때 그는 “당신들은 야당의 종자를 말리려 하고 있다. 나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겠다. 차라리 서대문 형무소를 택하겠다”라며 단호하게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며칠후 그는 박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내가 만약 그들의 강요 억압 회유에 타협했다면 어떻게 하늘을 보고 다닐 수 있겠는가. 그때 고생한 보람을 느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최장관은 자신의 강성 이미지와 관련해 “과거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는 ‘강성’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한다. 폭압 정치에 맞서 언제나 투쟁의 선두에 섰으므로 과격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정보 정치의 핵심 세력이 그를 ‘깡패’로 몰았다는 주장이다. 그는 71년 9월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맨 처음 열린 정기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의정 사상 최초로 환경문제를 거론한 데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공해에 대한 국민과 국회의 관심이 미미했지만 그는 지역구가 울산 공업단지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 공해 문제에 눈을 떴던 것이다.

 의리인 정치인, 물욕이 없는 정치인으로 통하는 최총장은 ‘정직하게 살자’를 정치 신조로 삼고 있다. 그의 꿈은 선배가 대우받는 정치 풍토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정치를 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든 자기를 변명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정치를 못한다”고 강조한다. 최총장은 자기를 차기와 연관시켜 보려는 시각에 대해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단호하게 부인한다. 자기는 ‘협기의 정치인’으로서 좋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도와줄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심을 가지면 큰일을 그르칠 수 있다. 문민정치를 뿌리내리고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김영삼씨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었던 그는 이제 김대통령을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새로운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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