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밀월과 고통분담
  • 안병찬 (편집인) ()
  • 승인 2006.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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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대통령이 취임 후 1백일 동안 주변의 ‘풍도’들을 물리치고 미득권층을 위한 개혁을 실천하는지 지켜보자.”


 요즘 세인의 관심은 한 사람한테 쏠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화국의 최고 통치권을 인수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 통치권을 받아 손에 쥐면 즉시 자기 구상을 실천해 보이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람, 신한국 창조라는 꿈을 구체적으로 풀어나가 현세의 실제 사실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다짐하면 사람 배치를 궁리하고 있는 사람이다.

 14대 대통령직에 오를 김영삼 당선자는 새로운 정치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누구보다 바쁘고 번거로운 업무에 빠져 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보여주게 될 정치력과 지도력에 대해서는 대망하는 사람들도 있고 지레 실망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느 쪽이나 그에게는 채무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는 대통령직에 나설 채비를 하면서 두가지 남다른 결정,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첫째는, 14대 대통령 취임식장을 국회의사당 앞으로 정한 일이다. 구절양장 같은 야당의원의 길을 걸어온 경력을 들어 의회주의 신봉자요, 자유주의 옹호자라고 자처하는 그가 의사당 앞을 식장을 택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런데 취임식의 형식과 규모를 두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부자연스러운 착상을 하게 된다. 신한국 창조라는 주제에 맞게 참석자들은 복장을 한복으로 통일할 뿐 아니라, 식장 앞에 청사초롱을 달고 비올 때를 대비하여 조선시대 경사 때 사용한 만민산(萬民傘)도 준비하자는 생각이다. 이와 별개로 취임식을 국민적 축제로 치른다는 취지로 국회의사당에서 청와대까지 자동차행진(카퍼레이드)을 하고 취임식 당일은 관례대로 임시공휴일로 정하자는 안도 나왔다. 한복 착용이나 청사초롱 장식은 서울올림픽 개폐막식 냄새가 나고 자동차행진은 마라톤 선수의 개선 행진곡 풍이다. 모두 허례허식이다.

 

기득권자에 더 많은 고통 분배해야 ‘상탁하부정’ 광정

 마침 김영삼 취임자 스스로 임시공휴일 지정을 반대하고, 사치스럽고 낭비적인 자동차행진도 꾸미지 말도록 결정했다. 겉으로 요란히 꾸며보려던 주변 사람들의 착상은 제동이 걸린 것이다.

 그가 두 번째로 남다른 결정을 내린 것은 ‘고통분담’이라는 말을 꺼낸 일이다. 마땅히 고통은 기득권자에게 많이 돌아가고 미득권자에게 작게 돌아가도록 배분해야 옳다. 고통의 재분배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김영삼 당선자가 주창하는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의 광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 취임식을 매우 검소하게 치룬다면 그것도 조그마한 고통분담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차기대통령이 뿌리를 두고 있는 국회의사당에는 고통분담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의원들이 없지 않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대개 야당소속 의원이다.

 민주당 초선의원 12명이 ‘깨끗한 정치모임’을 결성하고 ‘자정행동 지침’을 공개한 것은 지난해 6월3일이었다. 그들은 김영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자동차행진과 임시공휴일을 두고 갑론을박 하던 그날, 약속했던대로 7개월 간의 정치활동 비용을 공개했다. 그들이 개인별로 작성한 월별결산서와 총괄결산서에는 고통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들은 비리성 자금을 배제하고 경조사에 화환을 보내지 않고 고급승용차를 안타며 회기 중에 주례를 서지 않는다는 네가지 지침에 따라 자정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경조사에 빈손으로 갈 때 유권자들이 흘겨보는 눈매, 정치권 내부의 사시안이 준 심리적 압박이라는 얘기였다. 그들은 정치인과 유권자가 고통을 분담하기로 마음을 같이해야 깨끗한 정치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믿는 국회의원이다.

 김영삼 차기대통령의 고통분담론을 가장 먼저, 가장 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그들인 셈이다.

 

한쪽은 정치활동비 공개하는데 또 한쪽은 유람성 외유라니

 그런데 역시 많은 국회의원이 구태의연하다. 김영삼 차기대통령이 의원 외유의 규모를 축소하라고 지시했다지만, 연초에 70여명의 국회의원이 외유바람을 일으켰다. 저마다 의원외교를 내세웠다고는 하나 특별한 현안이 있어 뵈지 않는다. 남은 예산은 쓰고 보자는 유람성 국비여행이 태반이라고 들린다.

 기득권에 탐닉하는 자는 완강하다. 고통분담을 가장 기피하는 부류는 아마도 풍도(馮道)같은 인물일 것이다. 중국사람 풍도는 당나라 말기에 연나라를 섬긴 것을 시작으로 30년 동안 5왕조 8성 11군주를 섬기며 고관과 재상 노릇을 했다. 해바라기성 기득권자의 대명사라고 하겠다. 풍도류의 인간은 세상을 잊은 자일 것이다. 깨끗한 정치를 위해 고통을 분담하려는 의원은 세상을 근심하는 자일 것이다. 세상을 근심하는 자는 세상을 잊은 자와 마주 앉으면 상대의 태평스러움을 슬퍼하리라고 한 옛말이 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새 대통령한테 1백일의 밀월기간을 준다. 그 기간에 대통령의 중요한 정책이 성격의 틀을 형성한다는 생각에서이다. 우리도 김영삼 차기대통령에게 밀월기간을 줄 만하다. 취임한 후 1백일 동안에 그가 주변의 풍도들을 물리치고, 고통분담의 진정한 바탕을 마련하여 미득권층을 위한 개혁을 실천하는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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