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의 미 못거둔 마지막 학력고사
  • 박성준 기자 ()
  • 승인 2006.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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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득점 탈락 사태, 본고사 부활 불안감



후기대 진학 후 재수‘ 크게 늘 듯


 93학년도 전기대 신입생을 뽑은 학력고사(92년 12월22일)는 82년 처음 실시된 이래 지난 11년 동안 대학입시의 근간이었던 이 제도가 그 마지막을 고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린 93학년도 전기대 입시는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예상과 동떨어진 시험문제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유례없는 고득점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각 대학의 합격선이 예년에 비해 큰 폭으로 치솟는가 하면 높은 점수를 받고도 낙방의 비운을 맛보는 고득점자들이 많이 나왔다. 서울대학에서만 3백점대 이상의 고득점자 3천3백여명이 떨어졌다. 연세대 고려대 등 세칭 명문대학은 물론 한양대 경희대 중앙대등에서도 3백점 이상의 고득점자 탈락사태가 줄을 이었다.

 

“난이도 조정에 실패한 시험”

 이와 같은 사태가 계속되자 입시 관계자들 입에서 “변별력이 없었다” “난이도 조정에 실패한 시험이었다”는 등 불만과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고득점을 하고도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과 학부모의 비난은 거세다.

 서울 반포에 산다는 한 학부모는 올해 대학입시에서 떨어진 아들에 대해 “충분히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학력고사가 자격시험이 아닌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인 바에야 적절하게 난이도를 조정했어야 옳지 않았느냐”하고 항의한다. 그는 “시험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면서도 아들을 재수시키기 위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입시학원을 물색중이라고 했다.

 한편 대입 문제를 출제했던 국립교육평가원은 지난 7일 “전기대 시험문제 난이도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국립교육평가원이 집계한 올해 3백점 이상 고득점 탈락자 수는 3만여명이다. 전체 응시자의 5%에 해당하는 이 같은 숫자는 지난 87년과 비교해 무려 7~8배가 늘어난 수준으로 고득점 재수생을 양산한 지난해 입시를 훨씬 능가한다.

 그러나 국립교육평가원은 “교육이론상 90점(학력고사 3백6점) 이상 득점자는 2.3%가 되는 게 적당하다. 전기대 입시 결과는 이러한 교육이론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고득점자 대량 탈락사태가 당장 눈앞에 닥친 후기대 입시와 94학년도 대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고득점 탈락자들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가까이는 1월29일 실시될 후기대 입시 판도가 크게 달라져 대학입시에 또 한차례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시 전문가들은 내년부터 실시할 새로운 대입제도가 올해 양산된 고득점 낙방생들의 진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두고 한창 논란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대입제도가 재수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놓고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한쪽은 새 대입제도가 재수생들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기 때문에 지난해처럼 고득점 낙방생 사이에서 재수하려는 학생이 크게 늘 것이라고 내다본다. 입시 내용에 민감한 입시학원측이 그같은 시각의 대변자이다. 대성학원 김언기 교무부장은 “새 대입제도가 재수생에게 불리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김부장은 재수생은 새 제도에서 비중이 늘어나 부담이 되고 있는 내신성적에 재수생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므로 남는 시간을 다른 과목으로 돌릴 수 있어 유리하다고 한다.

 특히 고득점 재수생들에게는 내년에 다시 부활하는 대학별 본고사가 절대로 유리하다고 한다. 각 대학별로 세부적인 과목과 출제방향의 윤곽은 나오지 않았지만 새 대입제도에서 본고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이른다. 이에 비해 수학능력시험의 비중은 20%밖에 안 된다. “고득점 재수생들은 수학능력시험이라는 부담이 따르긴 하지만 이미 국어나 영어에서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어 비록 수학능력시험에서 몇 문제를 놓치더라도 본고사 과목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눈치보기 유행 조짐도

 이와 반대로 새 대입제도가 재수생에게 불리하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당국의 교육목표가 재학생 중심의 교육정상화 쪽으로 가고 시험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출제될 것이며 더욱이 입시의 토양이 될 교과과정이 개편되기 때문에 이를 경험하지 못한 재수생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일선 학교 입시 담당 교사들의 시각도 ‘재수생 불리’쪽으로 기울고 있다. 올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울대 합격자를 낸 서울 대원고 3학년 주임교사 안창해시는 “명문대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학생 가운데 많은 수가 재수를 원하고 있지만 이들을 일단 대학에 보내는 것이 학교측 방침이기 때문에 현재 후기대 응시를 종용하고 있다”고 밝힌다.

 새 대입제도가 누구에게 유리한가를 판단하는 일은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문제는 “시험공부에 임하는 당사자의 자세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종로학원 상담실 정하일 실장은 “새로운 대입제도에 대해 재수생측이 좀더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느 쪽이나 부담감을 갖기는 마찬가지이다”라고 주장한다. 정실장은 “국?영?수를 제외한 기타 과목을 등한시한다거나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는 경우, 또는 경쟁률이 예상 밖으로 높아 떨어지는 경우 등 몇몇 특별한 사정을 제외하고는 어느 쪽이나 제 실력대로 점수가 나오기 마련이다”라고 말한다.

 새 대입제도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어도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자 중하위권 학생은 물론 이번 전기대 시험에서 탈락한 고득점자는 후기대 입시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어 후기대 입시경쟁은 예년에 없이 치열할 조짐이다. 고득점자의 안전 하향지원이 후기대 입시 관도를 크게 뒤흔들 듯하다. 서울 영동고 3학년 주임교사 서영원씨는 “예년과 달리 전기대 시험에서 고득점을 올린 낙방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후기대 원서를 내겠다고 한다. 후기대 진학에 대한 관심이 올들어 부쩍 커졌다”고 말한다.

 

면학 흐리는 ‘대학생 재수’ 막을 방법 없어

 재수를 망설이고 있는 고득점 낙방자들은 일단 후기대에 진학해 안전판을 마련한 뒤 본격적으로 재수를 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변형된 눈치보기가 유행할 조짐도 보인다. 서울 시내 ㅈ고 3학년생인 ㅂ군(19)도 이와 비슷하다.

 ㅂ군은 지난 12월에 실시된 93학년도 전기대 입시에서 학력고사 점수 3백점에 가까운 고득점을 하고도 낙방했다. 고려대에 지원했다가 아까운 점수차로 떨어진  ㅂ군은 원래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소신과 수험생이다. ㅂ군은 시험결과가 발표되기가 무섭게 입시학원에 수강신청 등록을 마침으로써 재수의 길을 택했다. 그런 그가 최근 후기대 문을 두드리기 위해 한 대학의 입시창구를 찾았다.

 “다른 학교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내년엔 입시제도가 완전히 뒤바뀌어 전혀 낯선 상황에 놓인다는 부담감 때문에 아무런 대책없이 재수를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지요” ㅂ군은 일단 아무대학에나 적을 둔 뒤 바로 재수를 시작할 생각이다.

 후기대와 재수에 양다리를 걸치려는 재수생은 비단 ㅂ군뿐만 아니다. ㅂ군보다는 뒤떨어지는 점수지만 지난해 전기대 입시에서 2백90점에 가까운 좋은 성적을 올리고도 떨어진 박상철군(18)의 경우 역시 그렇다. 지난 1월5일 서울 노량진 대성학원 대입반에 응시원서를 낸 박군은 “명문대 입학을 위해 재수 할 생각”이라면서 “이왕이면 대학을 다니면서 재수를 하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른바 ‘대학생 재수’는 이미 여러해 전부터 되풀이돼 온 현상이다. 대학 당국은 대학생 재수 현상이 올해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 성균관대 고상룡 교무처장은 “대학생 재수로 인해 면학 분위기가 흐려지고 결원 보충도 안돼 학교측 피해가 예상되지만 막을 방안이 없다”고 걱정한다. 올해를 끝으로 막을 내리는 대학입시 학력고사는 고득점자 대량 탈락사태와 그로 인한 대학생 재수사태를 유작으로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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