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나해상의 의문 17년 만에 풀었다.
  • 안병찬 편집주간 ()
  • 승인 2006.05.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베트남 국교 정상화, ‘南南 경제협력’ 다짐



미·소 군사대립장에서 무역지대로 변모

  1975년 4월의 마지막날 새벽 사이공에서 밀려나와 남지나해 1천8백km를 건널 때 아득한 수평선에 피어오르던 궁금증이 있었다. 인도차이나반도와 필리핀 사이에 가로놓인 남지나해는 앞으로 소련 미사일함의 수로가 될까, 중공 포함의 앞마당이 될까. 중·소의 이해 대립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편성한다는 미국의 구상은 어떻게 펼쳐질까. 사이공 정권의 최후를 출발점으로 한 아시아의 시작은 무엇일까. 피난민 6천1백44명을 실어 콩나물시루가 된 미군 피난선 서전트 밀러호 갑판 위에 끼어 앉아 필리핀 수빅만기지로 건너갈 때 눈앞에 서리던 미지수의 안개는 앞을 헤아리기 어렵도록 두터운 것이었다.

  1989년 4월의 마지막날 호치민시로 이름이 바뀐 사이공을 다시 찾았다. 베트남 항공기를 향해 달려가는 공항 구내버스 밖으로는 눈부신 일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을 관통하듯 찌르르 전류가 흘렀다. 사이공과의 14년 만의 만남이 아닌가.

  베트남 항공사의 소련제 투폴레트 여객기 TU-135는 돈무앙 국제공항의 계류장 맨 끝에 서 있었다. 맨처음 시대변화를 느끼게 한 것은 그 항공기였다. 14년전 이맘때 사이공을 탈출하면서는 미국 태평양함대의 시코르스키 헬리콥터를 타지 않았던가.

  투폴레프와 시코르스키는 1년 간격으로 다같이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사이공이 소멸하기 3년전 같은 해(1972년)에 죽었다. 앞사람은 소련항공기 설계자로, 뒷사람은 미국항공기 설계자로 운명이 갈린 것이 다르다. 사이공과 호치민시 사이의 거리는 바로 그 시코르스키와 투폴레프의 운명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흐르기 위해 시작하고 떠나기 위해 준비한다는 메콩강을 굽어보며 호치민시를 다시 찾아가던 그날 그렇게 느꼈다.

  호치민시에서 맞은 첫 새벽은 4월28일 금요일이었다. 멀리서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4시에 눈을 떴다. 만 14년전 오늘은 월요일로 사이공 함락 이틀 전이었다. 웬주가 107번지 한국대사관에서 태극기 하강식이 열린 것은 상오 9시. 미국대사관의 긴급철수 통고를 받는 순간 대사관은 야단법석이었다. 김영관 대사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국기를 내력야지, 국기를!” 국기게양대 앞으로 달려간 것은 김영관 대사와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등 네사람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순식간에 국기는 내려오고 셔터는 재빨리 찰칵 소리를 울렸다. 한국대사관에서 17년 만에 태극기가 최후로 거두어지던 장면이었다.

  호치민시를 다시 찾은 때로부터 또 3년 반이 지났다. 1992년 12월17일, 주한베트남연락대표부 구엔 푸 빈 대사는 《시사저널》인터뷰(제164호 44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양에 외교관으로 가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고, 서울에서는 그 전쟁의 전후 복구를 위해 외교활동을 벌이는 것입니다.”

  베트남은 사이공 함락과 함께 20년 전쟁, 즉 ‘월·미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에 뒤이은 외세와의 전쟁을 끝내고 사회주의화 통일에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그 후에도 두 개의 전쟁을 더 치러야 했다. 1978년 말 캄푸치아 무력 점령에 따른 전쟁, 그리고 1979년 중국과 벌인 국경전쟁이다.

  두 전쟁을 치르고 베트남은 다시 세 번째 전쟁을 시작했다. 새로운 전쟁은 빈곤과의 싸움, 이전과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경제적 해방 투쟁’이다. 구엔 푸 빈 대사는 “한국군의 월남참전은 베트남 인민에게 견디기 어려운 피해와 상처를 주었고, 인민감정으로 볼 때 그런 과거를 잊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도 “참전기억보다 경제협력이 더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와 상처는 우리한테도 있다.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에 맞아 그 후유증에 신음하고 있는 많은 참전자가 그렇고 4천6백87명에 이르는 전사자의 넋과 통한이 그렇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부채가 있다. 참전 명분은 냉전시대의 ‘십자군원정’이었지만, 피의 대가를 달러에서 구했다는 ‘용병적 참전’에 관한 부분은 지금까지 도덕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전쟁은 가해자와 저항자를 모두 파괴하여 피해자로 만드는 특성을 가졌다.

 

“미래지향적 협력관계가 중요”

  오늘날 민족주의는 분명히 세계적 규모의 현상으로 퍼져나가 국가간의 정치관계는 물론 경제관계·정신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민족주의가 숭배하는 중심적 상징은 국기이다. 그 때문에 대사관에서 국기가 내려오거나 다시 게양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어느 나라건 민족의 성역을 만들어 순례자로 하여금 경배케 한다. 이도 국민국가나 인민국가나 마찬가지이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는 호치민의 성역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호치민은 베트남 민족주의를 고무하고 본질적으로 억압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는 두가지 전쟁, 즉 항불전쟁·항미전쟁을 지도했다 해서 천재적 행동주의자로 불린다. 하노이 바딘 광장에 있는 호치민 묘소는 ‘주석 호치민의 영원한 존재’를 다짐하는 자리이다. 냉방이 서늘한 지하실 방에 미이라 처리가 된 호치민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이불에 덮여 반듯하게 누워 있다.

  12월22일 하노이에 간 이상옥 외무장관은 한국·베트남 수교 공동성명을 내기 앞서 호치민 묘소에 참배하고 헌화했다. 과거사를 상징적으로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이상옥 장관은 중국이 한국에 구사한 논법을 빌려 “과거에 일시적으로 불행한 시기가 있었으나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이 과제다”라는 수사를 썼다. 그 한달 전, 서울에 온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우리의 민족주의 성역을 찾은 일도 똑같다. 그가 방한 첫날 동작동국립묘지를 방문하여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에게 헌화하고 분향하는 모습과 이상옥 장관의 모습은 다를 바 없었다.

  남지나해상을 건너던 피난의 날에 수평선에 서려 오르던 의문은 비로소 해답을 얻었다.

  남지나 해를 가운데 두고 미국은 수비크만기지에서 철수하고 러시아는 캄란만기지에서 물러선다. 군사대립장으로서의 남지나해는 해체되어 소련 미사일함도, 중국포함도 패권주의를 내걸기는 싱겁게 되었다.

  전쟁지대였던 인도차이나는 이제 무역지대로 바뀌었고 베트남은 93년부터 동남아국가연합(ASEAN) 외무장관 회담의 참관인이 되었고 몇 년 안에 정회원이 될 전망이다.

  디엔 비엔 푸의 영웅으로 항불·항미전쟁을 지휘했던 전설적 군략가 보 웬 잡도 도이모이의 바람이 일어나던 1989년에 웃는 얼굴로 나타나 “우리시대의 새로운 도전 앞에서 과학기술을 광범하게 응용하자”고 연설하고 아시아경기대회를 참관함으로써 스스로 ‘얼음을 깨는’역할을 맡았음을 보여주었다.

  ‘사이공 해방’의 날로부터 17년8개월, 남지나해역은 무역지대로 전면 개편되고 한국과 베트남은 ‘南南 경제협력’을 다짐하게 되었다. 오늘의 대전환이요 환경변화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