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대목 한국 영화 5편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5.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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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평론가 6명 최신작 평가/<영원한 제국> <손톱>등 화제작 푸짐

추석과 함께 대표적인 한국 영화 시즌으로 불리는 설날 대목의 개봉작들은 그해 한국 영화의 수준과 방향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눈길을 받는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영화사나 감독이 이 때를 전후하여 기획 상품을 공개하는데, 올해는 어느 때보다도 문제작과 화제작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다.

 올 설날 개봉작 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영원한 제국>이다. 1월28일 명보극장·코아아트홀 등 서울 시내 주요 영화관 네곳에서 개봉하는 <영원한 제국>은 이인화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역사극이다.

 데뷔작인 <구로 아리랑>(이문열 원작)에 이어 세 번째 연출 작품인 <영원한 제국>까지 모두 베스트 셀러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박종원 감독은, 이제 소설을 영상으로 풀어내는 노하우를 터득한 것 같다. 유교 근본주의와 주자학 중심주의 간에 벌어지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적 대립을 주요 모티브로 삼은 원작 과 달라, 영화는 정조의 개혁 의지와 수구 세력의 기득권이 벌이는 한판 승부로 몰아간다.

 그래서 관객들은 2백년 전 좌절한 한 매력적인 전제군주의 유신과 개혁을 오늘날의 현실 정치와 대비하는 재미를 만끽하게 되는데,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감독이 왜 지적 허영을 뿌리쳤는지 이해하게 된다.

고객 서비스 충실한 <남자는 괴로워>

 평론가들도 대부분 이 작품을 최우수작으로 뽑는 데 망설임이 없다(아래 평론가 평점표 참조). 즉 평론가들은 '감정의 이입을 배제한 서사적 연출'(박찬욱) '뛰어난 색감과 화면 구성력'(조희문) '이야기 전개의 경제성'(강한섭) '카메라의 템포'(변인식)를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으로 삼고 있다.

 생부와 선대왕이 남겨 준 한을 안으로 갈무리한 끝에 나타나는 정조의 독하고 집요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중후반의 장면들도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처럼 평론가들은 한결같이 영화의 전체적 완성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반면 완성도에 비해 재미가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즉 정조나 심환지에 비해 주인공인 이인몽의 캐릭터가 너무 약하고 영화적 스펙터클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작가 영화'의 지위를 얻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기호에 영합하는 로맨틱 코미디류의 제작 풍토에서 벗어나 대작에 도전하고 있는 <영원한 제국>이 올해 한국 영화의 한 성취로 기록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오는 2월11일 서울 피카디리·그랑프리 극장에서 개봉되는 영화 <남자는 괴로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이다. 일본 텔레비전의 최장수 코미디 <남자는 괴로워>와 제목이 같고, 돈 없고 배경 없이 가장의 책무를 이어가는 사내들의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코미디라는 점에서 분위기도 유사하지만 구성은 전혀 다르다.

 영화 <개그맨>을 통해 이명세 감독과 코미디 연기를 개화시킨 바 있는 안성기씨는 이 샐러리맨 코미디에서 조직의 쓴맛과 개인의 단맛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세대의 절망을 연기한다. 잘 나가는 동료와 자기보다 더 한심한 전자제품개발부 선후배 6명의 앙상블 연기 속에서 안성기 과장이 울적할 때마다 불러제끼는 노래 <아빠의 청춘>도 <남자는 괴로워>의 고객 서비스 상품이다. 스윙 재즈로 편곡되어 안성기가 부르는 <아빠의 청춘>은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에 삽입되어 발매된다.

 고객 서비스 정신을 기준으로 한다면 <마누라 죽이기>를 능가할 작품은 없다. <투캅스>로 요즈음의 관객 취미를 파악한 강우석 감독은 '영화는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 영화가 예술 작품도 될 수 있고 오락 작품도 될 수 있다면 철저하게 후자를 택한다는 것이 강우석 감독이요, 강우석프로덕션의 영화들이다. 그래서 <마누라 죽이기>는 코미디로서 효과적이라 생각되는 장치는 무엇이든 사양하지 않는다. 육박전을 방불케 하는 섹스 장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여성혐오증 등, 결코 책임지지 못할 삽화들이 죽 늘어서'이래도 웃지 않을래'라고 협박한다.

 <마누라 죽이기>가 칼날 없는 풍자극처럼 공허하다는 평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유머 감각은 때로 진부하지만 대부분 적중한다. 지난 12월17일 개봉하여 설날 시즌까지 단숨에 진입한 것은 바로 강우석 감독의 상품 논리가 객관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르다. 영화 평론가 강한섭 교수(서울 예전)는 “한 쇼트도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평론가는 비평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비평을 받은 일이 거의 없다. 영화 평론가 김종원씨는 '촌극으로 일관한 허황한 코미디'라고 규정하면서 “예를 들어 주인공 남자의 독백이 겉도는 것은 연출가의 해석이 너무 단선적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불만에도 불구하고 <마누라 죽이기>의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최종원이라는 조역 배우이다.

 <마누라 죽이기>재미 살린'전문 킬러'

 단맛이 빠진 껌처럼 시들해진 부부, 마누라를 직장 상사로 모시기까지 해야하는 한 남자가 남자로서의 실권을 찾고 애인과 결합하기 위해 마누라를 죽이기로 결심하는데 그가 고용한 전문 킬러가 바로 최종원이 맡은 배역이다. 영화 평론가 이세룡씨는 “<마누라 죽이기>의 재미는 최종원을 보는 재미”라고 말할 정도로 킬러 연기는 <마누라 죽이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최종원씨는 이번 시즌 작품 중 3편이나 출연해 각기 다른 개성으로 관객을 만족시키고 있다.

 1월28일 서울극장에서 개봉하는 신인 감독 김성홍의 스릴러 <손톱>은 부르주아 가정에 닥친 악몽을 다루고 있다. 이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화녀>이후 한국 영화계에 별로 없었던 스릴러 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인생을 시작한 여고 동창생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서로의 인생에 개입하면서 사건이 벌어지는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이다. 갖지 못한 자가 가진 자에게 갖는 증오와 피해 의식이 여성 특유의 질투 심리와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섬뜻한 공포심을 유발한다.

 이 영화 역시 한국 영화 사상 전무후무할 정도의 정사 장면과, <미저리>를 연상케 하는 여성 사이코의 괴력 등 관객 서비스 정신에 충실하다.

 박찬욱씨는 “한국 영화에서잘 다루지 않는 형식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손톱>얼 주목하고 있다. <위험한 정사>를 표절했다는 혐의도 있으나, 후반부에 임신 이야기를 추가해서 깊이를 얻었다”고 평가한다.

 이밖에도 '컬트적 분위기의 세련된 표현력'(변인식) '진희경이 구사하는 참신한 이미지'(유지나)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나, 관객의 상상력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 시나리오가 구성 포인트를 잡지 못한 점 등은 이 영화를 평작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스타일의 뒤섞임이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이라는 지적도 있다. 즉 관객이 재미있어 하는 요소를 뒤죽박죽 섞어, 로맨틱 코미디도 아니고 포르노도 아니고 본격 스릴러도 아닌 영화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고전 영화 느낌 주는 <사랑하기 좋은 날>

 권칠인 감독의 데뷔작 <사랑하기 좋은 날>은 한 젊은 공인회계사와 스튜어디스와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제작 도중 촬영 감독이 교체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완성된 영화지만, 스쳐 지나간 청춘과 소심한 사랑의 추억이 담담히 그려져 있어 고전 영화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순하다'(강한섭) '여피족에 대한 편견 없는 접근'(박찬욱) 등 억지 재미나 가치 평가의 부담이 없는 점을 들어 호감을 보내고 있으나, 이런 점 때문에 '신인 감독다운 패기가 없다'거나 심지어 인내력 시험용 영화라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특히 <사랑하기 좋은 날>의 두 주인공 최민수와 지수원의 맥빠진 연기는 이 영화가 설날 시즌을 버티지 못하고 도중하차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게 한다.

 사실 이번 설날 영화 가운데 안성기가 사극에 처음 도전하여 성공한 경우를 제외하고 주역들의 연기가 별로 눈에 띄지 않은 점은 우리 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 즉 배우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특히 <영원한 제국>에서 이인몽 역을 맡은 조재현의 경우 배역의 무게에 비해 표현이 약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마누라 죽이기>의 최진실·박중훈은 관객이 다른 영화에서 진작 보았던 연기, '곡조는 같은데 가사만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사랑하기 좋은 날>의 최민수는 연출의 관리권 밖에서 '연기'라기보다는 '포즈'로 일관하고 있다.

 “여전히 젊은 관객에게 영합하는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영화 평론가 변인식씨의 지적처럼 영화의 패턴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비디오 업계에 입도선매되어 제작되는 한 한국 영화가 체질을 바꾸기란 매우 어렵다. 이번 설날 영화 중 <영원한 제국>이 이런 기획 풍토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으나, 한국 영화가 배창호-최인호-안성기 트리오 시스템에 의해 일시 호황을 누리다 곧 무너졌던 경험에 비추어 이문열(또는 이인화)-박종원 시스템도 과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영화는 지나해 1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4편이나 되는 등, 직배 영화의 홍수 속에서도 나름대로 고정석을 확보했다. 세계 각국이 영화 탄생 백년을 자축하는 95년 한국 영화가 어느 만큼 관객의 기호와 작가 정신을 이끌고 나갈지는 이 다섯 작품의 성패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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