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냐 '
  • 케냐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0.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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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뻗은 ‘A104'국도는 10월의 햇살 아래 아주 검게 보였다. 코발트색 하늘에서 예고도 없이 쏟아지는 소낙비는 포장도로를 상쾌하게 씻어준다. 코코아와 커피나무가 들어찬 이 동아프리카의 열대 농장은 우산 모양의 아카시나무 탓인지 에덴 동산을 연상시켰다. 케냐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수백만년 된 인류의 화석은 방문객의 발길을 그들의 ’인류의 고향‘인 볼고리아 호수와 바링고 호수로 돌리는 마력이 있다.

나이로비를 떠난지 1시간쯤 되었을 때, 자동차는 아프리카 동부를 관통하는 大地球帶(오랜 지각 운동의 결과로 지층이 내려 앉아 형성된 계곡)의 한 끝을 달렸다. ’리프트 밸리‘라 불리는 이 지구대는 아프리카 동남부 모잠비크에서 시작해 탄자니아 케냐 이디오피아 홍해를 거쳐 멀리 요르단까지 뻗은 광활한 계곡이다. 이 지구대는 달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몇 개 안되는 지구상의 자연물이다. 총 5천6백㎞ 길이로 이어진 이 지구대는 꾸준한 지각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수백만년 전에 묻힌 귀중한 화석을 발굴하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지구대의 지각활동은 지금도 활발해 수백만년 뒤 동부 아프리카가 아프리카대륙에서 떨어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만든다. ’인류학의 보물창고‘이자 ’지질학적 대사건의 현장‘이다. 이 지구대를 따라 볼고리아 · 바링고 · 투루카나 호수와 세계 제일의 빅토리아 호수, 수심이 두 번째로 깊은 탕가니카 호수 등이 점점이 박혀 있다.

 

‘인류의 요람’을 찾아서

도로가 적도를 뚫고 북쪽으로 뻗으면서 메마른 사바나가 펼쳐졌다. 인적은 끊기고 따가운 햇살과 모래바람이 정적을 더해주었다. 곧은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오른쪽으로 급히 구부러진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작은 구릉을 몇 개 넘어서자, 마르카트 언덕 아래 멀리 볼고리아 호수가 보였다. 널찍한 호수 위에는 수만마리의 홍학이 떼를 이루어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호수 주위 곳곳에는 리프트 밸리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온천수가 쉴새없이 뿜어올랐다.  ‘쉬지 않는 무덤’으로 표현되는 이곳 볼고리아 호수에서는 인류의 기원을 밝혀내는 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뼈조각이 다수 발견되었다.

케냐 박물관의 소장으로 있는 리차드 리키 박사가 이끄는 발굴팀은 지난 20년간 이 일대를 비롯해 멀리 투루카나 호수에 이르는 척박하고 거친 대지를 무대로 인류의 자취를 쫓아왔다. 그들은 그동안 동부 아프리카 일대에서 1만5천개에 달하는 화석은 3백개 이상이나 됐다. 이들은 특히 고인류 화석의 노다지라 할 수 있는 동부 투루카나 호수를 중심으로 2백㎢의 지역을 매년 샅샅이 돌며 화석줍기에 몰두한다.

오늘날 케냐 북부의 강과 호수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사막이 넓어지고 가뭄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갈수록 황량해지는 대신 수백만년 된 지층이 모습을 나타낸다.

이곳에서 사는 아프리카인들의 하루하루는 생존을 건 싸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플라이오세(鮮新世 · 1천만~2백만년 전의 시기로, 이때 지구 대부분 지역의 온도는 매우 낮았다) 무렵인 5백만년 전 볼고리아 호수 주위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았던 곳이다. 인간이 몸에 옷을 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임계온도 섭씨 27도를 유지했고, 인류의 조상(이하 호미니드: 사람과 그의 조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들이 먹고 마실 물과 과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하는 동물도 많이 살고 있었다.

 

뿌리를 밝혀주는 역사적인 발굴

나이로비 소재 케냐 국립박물관은 아프리카 최대의 박물관이다. 동부 아프리카의 민속공예품을 비롯해 각종 열대동물의 박제, 케냐 역사를 소개하는 희귀본 사진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특히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방이 하나 있다. 과거 인류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쿠비포라’관이 바로 그곳이다. 30평 남짓한 이곳에는 투루카나 호수 동쪽에 위치한 쿠비포라에서 발굴된 각종 호미니드의 화석이 영겁의 세월을 감춘 채 유리장 안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나이는 평균 3백만~4백만년.

벽 한쪽은 나이가 가장 어린 화석이 장식하고 있다. 그가 살았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1백60만년 전. 이 ‘어린’ 유골은 12살짜리 소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쿠비포라에서 발견된 이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는 지금까지 발견된 어떠한 호미니드보다 보존 상태가 좋다. 만약 지금 이 소년이 옷을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혼잡한 거리를 걷는다면, 지나는 행인들은 별로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발로 의젓하게 걷는 그가 우리에게 유달리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해부학적 특징은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두 발로 걸음으로써 두 손이 자유로워지고 두뇌가 발달해, 인류는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대자연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인간은 확실히 다른 동물보다 큰 두뇌를 가지고 있다. 새끼를 번식하기 위해 ‘암컷’이 ‘암내‘를 피우지도 않는다. 따라서 지난 1세기 가까이 이어져온 인류의 뿌리에 대한 연구는 인류의 조상 가운데 ’누가‘ 나무에서 내려와 땅 위를 걷기 시작했느냐 하는 것과, 발굴된 두개골의 크기에 대한 연구로 압축된다. 이같은 의미에서 1970년대에 이루어진 두가지 발견은 인류 조상의 비밀을 벗기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했다.

그 하나는 1978년 루이스 리키(리차드 리키의 아버지) 박사 부부가 탄자니아의 라애톨리 평원에서 발견한, 3백50만년이 넘는 인류의 발자국이다. 이것은 1930년부터 인류의 뿌리를 찾고자 동아프리카를 헤맨 오랜 노력의 여러 결실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것이다.

수백만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 일대에 화산재가 눈같이 덮였다. 화산 폭발 직후 하늘을 메웠던 검은 비구름이 걷히자 2명의 호미니드가 걸어갔다. 이들은 비에 젖은 화산재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태양빛은 움푹 패인 발자국의 수분을 증발시켜 굳게 했다. 그위에 다시 화산재가 떨어졌다.

이로써 선사시대의 짧은 한 순간의 흔적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 보폭으로 보아서 그들의 키는 약 120~140㎝. 선명하게 남겨진 엄지발가락과 뒤꿈치 흔적으로 미루어 그들은 손을 땅에 대지 않고 ’걸어갔다‘. 이같은 사실은 발자국 발견 이후 여러 연구 결과로 확인되었다.

또 하나의 놀라운 발견은 이보다 4년 전에 이루어졌다. 15명의 젊은 전문가로 구성된 탐험대가 1974년 이디오피아의 하다라는 황무지로 향했다. 조한슨 박사가 이끄는 탐사팀은 타는 듯한 태양이 내리쬐는 언덕들을 두달 동안 아무 소득 없이 누볐다. 여러 지층이 드러나 있는 이같은 지형에는 들쥐의 턱뼈에서 시작해 악어 알 흔적까지 갖가지 화석들이 널려 있게 마련이다.

그러던 11월 어느날 오후,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석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다. 이들은 즐겨 듣던 비틀즈 노래의 제목을 따서, 3백만년이나 된 화석에게 루시(Lucy)라는 별명을 붙인다.

고인류학자들은 화석 발굴과 복원이라는 작업을 가르켜 “해답도 모른 채, 이빠진 조각들로 3차원의 그림맞추기를 하는 행위”라고 곧잘 비유한다. 이 여성 호미니드의 화석 루시는 원형이 46%에 가까운 것이어서 그야말로 횡재나 다름없었다. 루시는 곧 열띤 연구대상이 되었고, 그의 대토골과 치아의 마모상태등을 분석한 결과, 키는 107~127㎝로, 오늘날 피그미족 여인 크기이고, 몸무게는 25㎏으로 추정되었다. 두뇌의 크기는 현대인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다. 루시는 원숭이와 같은 뇌와 뼈대를 가졌으며, 치아는 인간과 원숭이를 모두 닮은 혼합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두 발로 걸었던 호미니드였다.

 

끝없는 논쟁 속 이어지는 ‘연결고리’

이들은 루시 발견을 토대로 종래의 학설에 일대 수정을 요구하는 새 학설을 자신있게 발표하고 이 種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猿人) 아파렌시스’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또 그보다 50만년 이상 앞서 살았던 라에톨리의 ‘발자국 주인’도 같은 種으로 분류해 버렸다. 뜨거운 논쟁의 시작이었다. 이 논쟁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생물학적 의미의 科 · 屬 · 種의 상관관계를 간단히 살펴보자. 인간은 영장류 안에서 사람科(호미니데)에 속한다. 이는 다시 오스트랄로피테쿠스屬과 호모屬으로 나뉘고 이 안에서 다시 여러 種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같은 기준에 의해 조한슨과 일단의 학자들은 두 발로 걸었던 아파렌시스로부터 오래 전 지구상에서 사라진 4가지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種(아프리카누스, 이디오피쿠스, 로바스투스, 보이세이)과 현재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호모種(하빌리스, 에렉투스, 네안데르탈렌시스, 사피엔스)등이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쉽게 말해 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의 4가지 종은 현대 인간과 직접 관계가 없는 먼 친척뻘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장 발굴’의 공헌이 큰 리키 박사 계열의 학자들은 우리의 먼 조상은 호모속의 한 종으로 그들의 화석이 아직가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 두가지 이론의 양대산맥 사이에는 여러 갈래의 절충형 이론이 있다. 물론 아프리카 기원설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체질 인류학을 전공한 충북대 朴善周 교수는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구분되는 두드러진 특징은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호미니드의 화석 가운데 가장 처음 두 발로 걸었던 종이 인류의 기원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기준에서 아파렌시스가 우리 인간이 갈라져 나온 분기점이고, 적어도 해부학적인 의미에서 그들이 바로 우리의 가장 먼 조상이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새로운 화석 발견이나 실험결과는 종래의 학설을 순식간에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호모종은 왜 그들의 조상인 아파렌시스로부터 갈라져 나왔을까. 이는 왜 애초에 인류의 먼 조상이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나무를 버리고 땅위로 내려왔는가라는 수수께끼와 무관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환경 변화를 먼저 꼽는다. 땅 위를 걷는 맨 처음의 호미니드가 출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구는 또 한번 급격한 기온 하락의 시대를 맞는다. 갑작스런 기온 변화는 수많은 종의 멸종과 새로운 종의 출현을 촉발시켰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이처럼 복잡한 진화의 단계와 인류의 뿌리찾기 논쟁은 얽혀 있다. 인류의 진화단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관한 과거의 연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인류의 뿌리에 대한 연구는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윈 시대의 과학자들은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유인원(침팬지 · 고릴라)이 해부학적인 측면에서 사람과 가장 닮았다는 점을 중시했다. 당시에는 미지의 땅이었던 아프리카에 대한 신비감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인원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를 아프리카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한편 일단의 과학자들은 아시아에서 인류의 조상을 찾고자 했다. 특히 이 시대 과학자들은 유인원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개체를 가정하고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헤매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발견된 몇 개 안되는 호미니드의 화석은 모두 아시아 대륙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북경원인’이나 ‘자바원인’들도 그 무렵 발굴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더 오래된 화석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이와 함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류의 족보찾기에 인류학은 물론, 고고학 지리학 생물학 생태학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이 동원되어 종합적이고도 총체적인 연구를 벌이게 되었다. 이는 약 20년 부터 정립된 새로운 연구방법이다.

 

단서 잡혀가는 인류기원 수수께끼

인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는 문화인류학적인 측면과 해부학적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두 발로 걸었던 인류의 조상은 지금가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약 4백만~5백만년 전에 나타났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도구 사용’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약 2백만년에서 2백50만년 전에 인류의 역사는 시작된다.

인류의 조상이 도구를 사용한 흔적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도구를 이용한 이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을까. 잠은 어디서 잤으며 무엇을 먹었을까. 약 2백50만년 전에 살았던 루시의 후손 호모 하빌리스(손쓴사람)는 그 이전의 조상과는 달리 도구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에서 현대 인류와 의미있게 연결된다.

호모 에렉투스 바로 이전의 조상인 그들은 주거지인 나무에서 완전히 내려오지는 못했다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 주위에 맹수가 우글거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무를 타기 좋게 긴 팔과 구부러진 손을 지니고 있었다. 유인원과 마찬가지로 나무에 열리는 과실을 먹었고, 간단한 도구를 이용해 뿌리 등을 파먹었다.

그 이후 약 1백만년이 흐른 뒤 호모 에렉투스가 지구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지구를 무대로 삼았던 모든 인류의 조상이 나름대로의 배역을 맡았듯이 호모 에렉투스 역시 그 장구한 연극의 한 장을 장식한다. 그 가운데 일부 용감한 종족은 더 발달된 두뇌와 도구의 사용에 힘입어 오랜 삶의 터전인 아프리카를 떠나, 아시아 등 다른 대륙으로 향했다.

수백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긴 추리극에 이제 적지 않은 단서가 잡혀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출발부터가 완전범죄였는지도 모른다. 계속 새로운 가설과 연구결과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1986년 미국의 생물학자들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온 학설을 발표했다. 이른바 ‘아프리카 이브설’이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14만~28만년 전에 살았던 한 여성의 혈통이 모든 현대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DNA는 유전자의 화학적 실체로서, 동식물 세포의 핵 안에 있는 고분자 화합물이다. 인간의 세포 안에 있는 대부분의 DNA는 세포핵 안에 있지만 세포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에도 DNA가 있다. 정자의 미토콘드리아는 수정이 되면서 생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된다. 따라서 수십만년 전에 살았던 이 여인의 DNA가 계속 후대에 전해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돌연변이에 의하여 유전된 DNA는 태초의 그 여인의 것과 많이 다른 것으로 변했을 것으로 본다.

이 연구팀은 지구상 여러 대륙 출신의 여인 1백47명을 조사해본 결과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의 사람들에게서 추출된 미토콘드리아의 DNA가 가장 많은 변이를 보였다. 이것은 아프리카인의 DNA에 가장 많이 돌연변이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여기에서 아프리카인이 가장 오래된 현대 인류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아프리카 이브’설은 현대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에렉투스로부터 각지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여러 종족과 교류를 하며 진화해왔다는 종래의 학설에 일대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를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허튼소리”라며 이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을 따르더라도 아프리카는 ‘인류의 고향’이다.

우리는 이제 태평로를 지나 서울시청 앞 분수를 지나 현관으로 향한다. 그러나 힘들게 끼워맞춘 ‘인류의 기원’의 모자이크는 아직까지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최근 학계에서는 선신세 이전의 마이오세(中新世 · 2천5백만~1천만년 전의 시기로, 선신세 바로 앞의 시기) 쪽으로 초점을 돌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우리들의 먼 뿌리를 더듬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종래의 학설들이 언제 고쳐져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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