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이냐 文惡이냐
  • 김 당 기자 ()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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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리얼리즘’




바야흐로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지난달 29일 김진태 검사(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가 시인이자 작가이자 교수인 마광수씨(연세대 · 국문학)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사 대표인 장석주씨(도서출판 청하)를 구속한 사건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종류의 리얼리즘 논쟁을 던져주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포르노 리얼리즘’ 논쟁이다.

이전 사건은 겉으로는 표현의 자유와 성에 대한 가치관을 둘러싼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우리 사회가 이른바 포르노 리얼리즘을 용인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른 장르의 예술 · 매체 · 작품과의 형평성, 외설과 예술의 기준, 사법의 한계외 문화수준의 척도 등을 묻는 다양한 쟁점이 수반되고 있다.

포르노 리얼리즘은 아직 개념이 낯선 용어이다. 문단에서는 이를 문학의 한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데도 인색하다. “포르노는 포르노일 분 ‘신성한 리얼리즘’에 갖다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르노 리얼리즘은 지난 30년간 있었던 리얼리즘 논쟁의 전형(참여 · 민족 · 민중 문학론)과는 차원이 다른 90년대식 리얼리즘의 한 흐름으로 이미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 포르노 리얼리즘은 이미 현실이다. 이 괴물은 갈수록 노출을 극대화하는 영화와 비디오, 연극 등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별종은 90년대를 풍미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한 현실의 산물이면서도 특히 성(행위)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그 ‘적’인 리얼리즘 기법에 기대고 있다는 데 문단의 적의가 싹튼다. 그래서 《즐거운 사라》와 관련해 “성의 주제는 지금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도 잘못 다뤄지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들은 거의 포르노에 연관되고 있다… (성)”을 변태적으로 천박하게 나열한 것이 소설이요, 리얼리즘 기법이라니.(문학평론가 구증서)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두 축은 재현의 원칙과 전망의 존재일진대 《즐거운 사라》 또는 포르노 리얼리즘에는 재현의 원칙만 있지 전망의 존재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보는 사회가 전망이 부재한 사회라면 ‘전망 부재’ 자체가 곧 전망이자 리얼리즘에 충실한 것이라는 역설도 성립할 법하다. 마광수씨 자신은 ‘작가의 말’에서 ‘리얼리즘 기법을 기본으로 한 일종의 성격소설’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렇게 밝힌다.

“소설의 근본은 역시 리얼리즘에 있는 바(실제적 현실을 그리든, 내면적 현실 또는 상상적 현실을 낭만적으로 그리든 모든 것은 다 리얼리즘이다), 그것의 소재가 혹시 퇴폐적이고 반동적인 부르주아적 상상의 소산이라 할지라도 매도되어서는 안된다.”

문단 “예술은 검찰이 손댈 문제 아니다”

검찰 “음란죄는 표현의 자유와 별개다”

이번 사건에 대한 문단의 공식적인 반응은 ‘문학작품 표현자유 침해와 출판탄압에 대한 문학 · 출판인 공동성명서’(10월31일)의 형태로 나타났다. 문인 2백여명이 서명한 이 성명은 “문학의 문제는 문단 내부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또 최종적으로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 시간을 거치며 검증되어야 한다. 모든 예술 장르에서 표현의 자유가 타율적인 규제나 공권력에 의해 그 예술성을 박탈당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원론적인 주장보다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하여 불거진 것이 한없이 수치스럽다. 그러나 인신구속은 명백히 잘못이다”라는 한 문학평론가의 자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또 “소설인지 아닌지는 논란이 있겠으나 무리한 법 집행이 오히려 마교수를 로렌스 같은 위대한 작가나 표현의 자유를 위한 순교자로 만들 수도 잇다”(문학평론가 홍정선)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서명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대책위원회는 있는데 공동대표를 선임하지 못하는 등 문인들의 성명이 다른 때보다 별로 힘이 없게 느껴지는 것도 위와 같은 이중적 가치기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작품(문학)성을 떠나 검찰이 손댈 문제가 아니다”로 요약되는 문인들의 반응은 “작품(문학)성을 떠나면 그것은 사회적 통념으로 볼 때 이미 사법의 영역인 것”이라는 검찰의 ‘유권해석’으로 이어진다.

검찰의 기준은 확고하다. 김진태 검사는 “형법상의 음란죄는 표현의 자유와는 별개 문제”라고 밝힌다. 따라서 검찰은 그것이 문학작품이건 아니건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제조 · 판매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4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밖에 없다(형법 제243조 및 244조)는 입장이다. 물론 검찰의 사법처리에 대한 강한 자신감은 그것이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문학작품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음란의 개념에 대해 검찰은 “그 내용이 사람의 성욕을 자극 또는 흥분시키는 것으로서 보통인의 성적 수치심을 해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것”이라는 대법원 판례(87년 12월)를 내세우고 있다. 또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이므로 예술작품이라고 하여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법원 판결(70년)을 강조한다. 검찰은 “음란성 여부는 그 작품 중 어느 일부분만을 따로 떼어 논할 수 없고 그 전체와 관련하여 판단해야(서울형사지법 73년) 하는데 이 책은 거의 전부가 음란 · 퇴폐 성행위나 변태적인 성적 희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주요 음란행위 서술부분을 따로 골라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자신감마저 보이고 있다. 검찰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적시한’ 대목(주인공 사라가 술안주용 땅콩을 자신의 질 속에 집어넣고 뾰족한 손톱 끝으로 한알한알 빼내 먹으면서 뼛속까지 밀려오는 쾌감을 느끼는 행위 묘사 등 17군데)을 예로 들면 이렇다.

“자기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계속 그이의 페니스를 빨아줘야 할 때도 있어. 내가 식사를 할 때 음식마다 정액을 뿌려놓을 때도 있구. 가끔 가죽혁대로 내 엉덩이를 때리는 적도 많다… 하루종일 내 그 부분에다가 계속 모조페니스를 끼워놓고 있게 한 적도 있어. 또 내가 꽁꽁 묶인 채로 그의 페니스와 항문을 핥아줘야 할 때도 있고”(125쪽).

“그는 정말 개처럼 잘도 핥았다… 그러다가 페팅의 종반부에 이르면 처음과는 달리 거의 신경질적으로 내 질구를 거칠게 쑤셔댔다… ‘네 멘스를 받아서 거기에 밥을 말아먹고 싶다’거나 ‘손톱을 한 10센티미터즘 되게 더 뾰족하게 길러. 그리고 거기에 빳빳하게 풀을 먹여. 그걸로 가끔씩 내 온몸을 할퀴고 찔러줘. 피가 흘러나오면 아주 천천히 햝아먹어’ 같은 것도 잇었고”(292~294쪽).

사회 분위기는 양쪽 모두 거부하는 듯

검찰은 수업권 침해나 표현의 자유 침해시비 등을 고려해 사법처리에 신중을 기했으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위원장 이원홍)의 제재건의를 받은 소설의 성행위 부분을 더 노골적으로 고쳐 재출간하고, 신문 · 방송을 통해 자신의 성해방 논리를 전파하고, 신문광고를 통해 이른바 ‘사라이즘’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등 이미 문화계의 자율적인 규제 범위를 넘어섰다고 판단해 긴급 구속했다고 밝히고 있다. 검찰은 수사 배경을 청소년 관련 16개 단체의 탄원과 간행물윤리위의 진정, 간행물윤리위의 ‘제제건의’ 이후 언론 및 전문가들의 평가 등에서 “여론이 검찰의 개입을 촉구한 것”을 들고 있다. 검찰이 고무받아 예로 들고 있는 여론은 이렇다.

“문제의 소설은 문학 속의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마치 포르노 영화를 문자화시켜 놓은 변태적 소설을 연상시킨다. 문학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난잡한 음란물을 가려내고 척결하는 일이 성문제를 바로잡는 한 길이다.”(ㅈ일보 9월30일자 사설)

“이것은 문자화된 넓은 공간의 음란영화, 비디오와 다를 바 없음”(서강대 교수 · 문학평론가 이태동)

“21세기를 향한 새 ‘풍속도’의 첨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는 안으로 비쳐져 있어야 할 것인 바, 이런 저서까지 ‘언론의 자유’ 범주에 넣는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가 있어 보임”(소설가 이호철).

그러나 검찰의 만반의 준비와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마교수가 지닌 ‘표현의 자유’라는 무기 또한 만만치 않다. 마교수의 변호인인 박용일 변호사는 70년대에 소설 <반노>가 무죄 판결을 받은 사실을 들면서 “검찰이 내세우는 대법원 판례라는 것은 다원화된 우리 사회의 성풍속을 가늠하기에는 이미 낡은 기준”이라고 반박한다.

마광수 교수의 구속을 둘러싼 이른바 각계의 반응은 사라가 보인 성행위 양태만큼이나 다양하다. 우선 쌍수를 들고 환영한 곳은 성균관 · 유림회총본부 같은 유림단체로 “규범 · 풍속을 저해하는 혁명적 사회전복 의식”이라며 정부 조처를 환영했다.

형평성의 원칙을 들어 검찰의 법집행은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월간지 편집장은 “검찰이 내세우는 청소년에 미치는 해악을 고려하더라도 먼저 단속해야 할 것은 대신문사에서 하루 백만부식 찍어대고 누구나 쉽게 길거리에서 사볼 수 있는 스포츠 신문이지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사볼 수 있는 책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설사 욕을 얻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어쨋든 일체의 성문제를 사상과 토론의 자유시작에 상장하고 싶어서 주로 성문제에 치중해온” 마광수 교수가 “전체적인 분위기와 문장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손질을 가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진짜 결정본 《즐거운 사라》”는 이제 사법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함께 구속된 장석주씨는 이를 두고 “오랫동안 억압되어 왔던 성적 욕망에 대한 여러 문화적 억압과 굴레를 벗으려는 90년대의 싸움”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문단에서는 이번 사건이 ‘90년대식 투쟁’의 양상을 띠는 데는 거부감을 보인다. 소설가 김영현씨는 이번 파문을 단순한 외설시비 차원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나타난 우리 사회의 무가치 · 몰역사성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한다는 기대를 표명했다.

한 젊은 시인은 마교수를 구속한 검찰을 “프로야구 경기장에 난데없이 들어와 반칙한 선수를 끌고간 경찰”에 비유하다. 심판(평론가)과 수많은 관중(독자)이 지켜보는 게임을 자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해 게임을 정지시킨 것은 검찰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선수의 퇴장으로 프로야구를 즐기는 관중이 줄지 않듯 마교수의 구속으로 ‘즐거운 사라’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성문제를 “쓰레기 통에 뚜껑만 덮어놓고 있는 양상”으로 파악한 마교수가 그 뚜겅을 여는 것도, 검찰이 아예 쓰레기통을 치워버리려는 것도 우리 사회는 모두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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