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소설가’의 거친 자유 표현
  • 성우제 기자 ()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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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光洙는 누구인가/‘성적 억압 해방’ 일관된 주장에 문학적 평가 엇갈려


 

10월30일 연세대에서 열린 ‘馬光洙 교수의 석방을 촉구하는 연세대 국문학과 비상회의’에서 학생들은 “마교수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법처리는 반대한다”는 의견을 많이 내놓았다. 학생들이 ‘동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마교수의 최근 저작뿐만 아니라 그의 강의가 그만큼 독특했기 때문이다.

마광수 교수는 그간 교수 · 시인으로서도 학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8세 때인 지난 79년 홍익대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대학가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그의 강의는 성에 대한 거침없는 표현과 자유분방함으로 학생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엇다. 84년 朴斗鎭 교수의 후임으로 연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인기는 날로 높아갔는데, 87~88년 무렵에는 수강 학생이 3천여명에 달했다.

80년 金東吉 교수의 ‘기록’을 깬 마교수의 ‘인기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크게 두갈래로 나뉜다. 교양과목으로 강의를 들었다는 연세대 법학과 2학년 金楨熙군은 “인간본성에 대한 접근법 중의 하나로 성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강의를 했다. 그러나 흥미위주가 아니라 열린 사유를 하게 하는 진지한 강의였다”고 말했다. 반면 심리학과 3학년 柳亨美양은 “여학생 입장에서 낯뜨거운 내용과 표현이 너무 많았고, 성차별을 한다는 생각가지 들었다”고 비판했다. 학내에서의 이런 찬반논쟁은 마교수의 글이 일반인에게 알려진 89년부터 대학 바깥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학생들은 마교수의 학문적 업적이 ‘야한 여자론’에 지나치게 가려져 있다고 말했다. 마교수의 학위논문은 윤동주의 시를 상징으로 분석한 한국 최초의 박사논문이며, 지금껏 마교수는 사회비평집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비판해왔다는 주장이다. 연세대 국문학과 강사인 고운기씨는 “그의 저작물을 비율로 보면 논문 · 학술저서가 40%, 사회비평 칼럼 30%, 이른바 ‘야한 얘기’가 30%”라면서 “뒤의 30%도 앞의 70%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생들은 마교수가 교수로서 강의에 매우 충실했다고 말했다. 학부 · 대학원에서 1주일에 18시간을 강의했는데 휴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77년 <배꼽에> 등의 시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마교수는  지금까지 세권의 시집을 펴냈으나 《가자, 장미여관으로》 외엔 독자들로부터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학부시절 마교수와 문학 활동을 함께 한 문인들은 그의 초기 시들이 “깊이가 잇는 사색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시인 姜昌民씨(서경대 교수 · 국문학)는 “종래의 정통주의로 보자면 고교 · 학부 때 쓴 시들이 훨씬 낫다”면서 “초창기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기존 가치에 대한 소극적인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고 평했다. 그는 “마교수가 줄곧 추구해온 시세계는 인간의 자유와 시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 문제가 된 장편소설도 방향의 잘잘못은 둘째로 하고 시세계가 추구해온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며 적극적인 도전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교수의 동료와 후배 · 제자들도 마교수가 학문과 시를 통해 일관되게 추구해온 ‘상징’ ‘정신분석’ ‘성적 억압에 대한 관심’이 소설로 제대로 형상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마교수의 소설이 문학작품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문인들도 많다. 소설가 趙延來씨는 “검찰에서 인신구속한 것은 반대하지만, 그의 글은 문학과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반사회적 · 반이성적인 것이다”라면서 “1백명의 문인에게 그의 작품이 문학이냐고 물어보면 90명이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가 문인을 자처하고 표현의 자유를 강변하는 것이 안타갑다”라고 말했다.

반면 소설가 莊正一씨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그는 “《즐거운 사라》가 수준높은 작품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바는 위선적인 사회에 대한 가식없는 직시이며 새로운 성윤리에의 요청이다. 이 점은 금욕으로 강제된 한국문학사에서 희귀하고 소중한 예에 속한다”고 평했다.

마광수 교수의 소설들은 문학평론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해왔다. 어떤 평론가도 ‘마광수 소설’을 ‘소설’로 평하지 않은 것이다. 어느 평론가의 지적처럼 마교수는 우리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性에 대한 어법’을 세워보려고 했으나 최소한 소설에서는 실패한 작가로 기록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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