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민족주의 전사 키우자”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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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수협 ‘학문후속세대 육성안’ 제시



박사과정 학생에 장학금…연구 전념토록

강명구 교수(서울대ㆍ신문학)는 얼마전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학술회를 마치고한 외국학자로부터 “당신 나라가 언제 어떻게 모더니즘을 경험했는지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상당히 황당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상업화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이 땅에서 이토록 크게 유행하는데 정작 그 이전 단계, 즉 모더니즘 단계는 어떻게 거쳤느냐 하는 검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의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해외유학을 통해 이식된 학문을 가지고는 우리 사회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수입이론으론 세계와의 경쟁서 진다”

 요즘 학자들 사이에는 기술패권주의 또는 지식민족주의라는 명제가 긴박하게 떠오르고 있다. 수이이론으로 우리 사회를 해석하거나 조직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실제 경쟁에서 필요한 첨단지식은 쉽게 제공받지도 못한다는 현실인식이 대두한 것이다.

 서울대교수협의회가 지난 1년간 金南斗 교수(철학)를 중심으로 연구산 ‘학문후속세대’라는 신개념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러한 위기 의식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서울대교수협의회 주최로 열린 ‘학문후속 세대 육성을 위한 발표회’(10월9일)에서 김남두 교수는 학문후속세대를 “다음 세대의 지식민족주의 전쟁을 수행해나갈 전사”로 비유하면서, 이 인력의 육성 없이는 선진국 진입이라는 구호가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학문후속세대 육성방안의 핵심은 박사과정에 들어간 학생에게는 외국처럼 또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원처럼, 생활비를 포함한 일체의 장학금(full schoolarship)을 줘서 연구에 전념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이날 ‘秀越性의 원칙’을 제시했다. 즉 1만5천명 가량 되는 전국의 박사과정 학생에게 모두 지급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육부가 실시하는 국비유학생 자격시험과 같은 일정한 경쟁을 거쳐 선발한 인력을 대상으로 하자는 내용이다.

 김교수는 학문후속세대 육성방안은 민족 학문을 주도해나갈 인력을 길러야 한다는 명분과 연구중심 대학으로서 서울대의 위상설정이 흔들리는 데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즉 70년대 초 정부가 국립대학을 대학원중심 대학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뒤 서울대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려 했으나, 다른 대학이 반발해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문후속세대라는 개념을 띄우고 수월성의 원칙을 내놓으면 결국 우수한 학생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대의 연구인력을 제대로 가동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강명구 교수는 “우수한 학생들이 자꾸 고시나 언론사, 기업체로 빠져나가고 박사과정에 들어오는 수는 점점 줄어든다”면서 사회 과학대의 경우 박사과정 정원을 채운 과는 한곳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식민족주의를 수행할 학자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이들을 지원함과 동시에 지도교수가 철저히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처럼 형식적으로 지도하면 자기들이 교육시켜놓고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외국학위를 선호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는 말이다.

 서울대 교수들은 서울대가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대학으로 발전한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에 매우 회의적이다. 안병직 교수(경제학)는 서울대가 ‘거대한 강습소’에 불과하다고까지 얘기한다. 서울대가 그 나름대로 명맥을 유지해온 것은 학생들이 우수해서이지 좋은 연구가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는 비판이다. 위기의식은 특히 인문ㆍ사회 과학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기초적 수준이긴 하지만 정부와 기업의 과학기술 지원정책으로 이공대학이나 자연과학대학을 지원하는 일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고, 이 방면의 학문후속세대는 비교적 좋은 조건에서 육성되고 있다. 특히 모든 생활비를 지급하는 과학기술원이나 포항공대의 여건은 선망의대상이다. 과기원이나 포항공대에 비해 수세에 있는 서울대의 위기의식, 자연ㆍ이공 대학에 대한 인문사회과학대학의위기의식이 합쳐서 나온 것이 서울대의 학문후속세대 육성방안이다.

 학계에서는 일반 대학과 달리 과학기술처의 특별예산을 받는 과기원을 가리켜 ‘특공대’또는 ‘돌격부대’라고 부른다.

 김남두 교수는 “정규 사병과 장교를 중심으로 하는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라 특공대 중심의 군대는 장기전을 치를 수 없다. 교육부가 대학의 연구인력을 집중육성하거나, 아니면 일본처럼 학술진흥부를 독립시켜 대학 연구 인력 지원창구를 일원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金容駿 교수(고려대ㆍ화공학)도 과거 30년간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은 치밀한 분석과 정확인 원인규명에 바탕을 둔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목표를 설정한 뒤 몰아붙이는 몹시 왜곡된 형태였다면서,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고지점령을 위한 돌격부대와 같은 특수형태의 교육기관ㆍ연구단지라고 비판했다. 김교수는 그 돌격부대도 기초과학이라는 후방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급조한 부대에 불과했다고 비유하고, 최근의 대학현실을 본다면 정부의 학문후속세대 육성정책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박사과정 53% ‘부업’…연구실 불은 꺼지고

 우리나라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학생의 생활비까지 지원하는 제도는 매년 1백명 가량 선발하는 국비유학생제도와 내년부터 교육부가 실시할 우수논문 시상제도뿐이다. 서울대 철학과 조교로 근무하는 배식한씨(박사 2학기)는 “박사과정을 밟는 사람들 대부분이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백수건달처럼 보이는 생활을 7~8년씩이나 하는 데다 “인문박사가 무슨 쓸모가 있냐” 하는 식의 시선이 답답하다는 얘기이다.

 대학 실험실 가운데 밤늦게 까지 불이 켜져있는 곳은 많지 않다. 실험에 몰두해 있어야 할 학생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흥식 교수(서울대ㆍ복지학)가 최근 서울대 석ㆍ박사 과정 학생 2백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생활실태 조사결과에 그 대답이 들어있다.

 그 시간에 박사과정 학생 대부분은 입시생을 지도하거나 자신의연구와 무관한 아르바이트, 또는 교수의 연구프로젝트에 매어 있다. 응답자의 53%가 과외지도 따위 아르바이트를 하고 67%가 ‘마지 못해’ 교수의 연구프로젝트를 거들고 있다. 프로젝트에 뺏기는 시간은 1주일 평균 22시간이나 되는데 대가로 받는 돈은 월평균 11만원으로 나타났다. 대학 파출부라 부르는 시간강사 자리도 운이 좋아야 얻을 수 있는 데 시간당 강사료는 1만2천원이다. 시간강사의 한달 생활비는 평균 38만원, 평균연령이 29세인 박사과정 학생의 생활비는 43만원이다. 석ㆍ박사 과정에 소요되는 4~8년간 이들이 받는 장학금은 보통 4학기분이며 학기당 33만원선이다.

 비유해 말하자면 서울대 박사과정 학생들은 학비는 물론 생활비를 자급자족하는, 생활전선에 뛰어든 고학생 신세이다. 그밖의 경우는 아내와 처가의 지원에 의존하는 ‘등처가’(대학가 은어)이거나, 나이 서른이 다되도록 부모 신세를 지는 자식으로 분류된다.

 고려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유 승씨(35)는 “지금까지는 학문을 숭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통적인 정서가 길고도 힘든 박사과정을 거치는 데 힘이 됐지만 이제는 그런 풍조도 사라져간다. 미국이 실시해온 ‘각자 뛰어서 살아남아라’ 하는 식의 연구지원정책을 그대로 모방한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이제 유럽과 일본처럼 지식민족주의 육성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권숙일 학장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사실상 ‘학부모의 교육열’에 의지해왔다고 파악하면서 앞으로 세계와의 경쟁을 치르려면 정부가 학부모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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