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양심 잠롱
  • 편집국 ()
  • 승인 1990.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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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정직과 봉사”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태국의 잠롱 방콕시장이 《시사저널》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공동초청으로 지난 8일 내한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자서전(《짬렁, 내 삶의 이야기》도서출판 窓, 1990)을 번역한 한국외국어대 김영애 교수가 자서전의 일부를 발췌하고, 아울러 역자로서 느낀 바를 엮었다.

 

 사관생도 시절, 그러니까 ‘씨이락’이 쫄라롱껀 대학 약학과 학생이던 시절부터 우리는 서로 마음을 열고 사귀었다. 그리고 1964년에 결혼했다. 결혼식은 장교회관에서 조용하고 단촐하게 치렀다. 고위공무원들에게 알려 공연히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 양가 부모님만 모신 혼례였지만 마음만은 참으로 넉넉하였다. 조금씩 조성을 모아 도움을 준 선후배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던 것도 그때였다.

 씨리락의 본명은 ‘농락’이었다. 지금의 이름은 결혼할 때 절친한 벗이 선물로 베개를 만들어준 데서 연유한다. 그 친구는 나와 신부의 이름 첫글자를 함께 수놓고 싶어했다. 그런데 도무지 예쁜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농락의 ‘ㄴ’자를 ‘ㅆ’으로 바꿔 수를 놓았다면서 예쁜 베개를 선사해주었다. 그후부터 이름도 아예 씨리락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결혼 직후 우리는 얼마 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다. 하와이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귀국하자마자 우리는 랏프라우 벌판에 오두막집을 지었다. 재산이라고는 남폿불과 우물물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한참 한참 뒤에야 은행 융자와 여기정기서 융통한 돈을 합쳐 비교적 단단한 2층집을 지을 수 있었다. 내가 대위 때였다.

 

약혼반지 팔아 중고차 구입한 부인 ‘씨리락’

 새 집은 사무실에서 꽤 떨어져 있었으므로 차가 있어야 했다. 씨리락이 약혼반지를 팔아 참모부대 자문으로 있다 귀가하려던 한 서양사람의 낡은 중고차를 사주었다. 덕분에 나는 젊은 나이에 집과 땅과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 중고차를 세금까지 합쳐 1만6천바트에 산걸로 기억한다. 89년 4월에 그 차는 경매에 붙여져 17만바트에 팔렸다. 나는 전액을 적십자사에 헌금했다. 차의 진짜 주인이랄 수 있는 씨이락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움지이는 약혼반지를 기증한 셈이다.

 이 세상에서 진실로 자기의 소유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애지중지 닦고 다듬는 우리의 몸도 빌려온 것이므로 때가 되면 반납해야 한다. 이별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헤어지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시간이 좀 늦고 빠를 수 있다는 것뿐이다.

 큰 집을 소유하고 돌보는 것은 보통이다. 치장과 관리에 많은 돈과 시간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불교의 교리를 지키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부타와 비껴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타와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 그를 모방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똑같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부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수행하는 것이다.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많이 일하며, 남는 것이 있으면 사회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큰 집을 팔아 전세방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날부터 나는 집을 꾸며야 하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남는 시간은 그만큼 더 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내 몸 깊숙한 곳까지 배어 있던 이기심도 차츰 줄어들었다.

 쉬지 않고 수행함으로써 어느 만큼 자신을 이길 수 있게 된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 후로 수상 비서나 방콕시장 같은, 돈과 관련된 직책을 계속 맡게 되었으나 유혹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작은 집은 앞문과 뒷문이 모두 닫혀 있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이권에 대한 제안이 들어올 틈이 없다. 자신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또 말한 대로 수행할 수 있는 데 대해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국회의원선거보다 더 방대한 선거무대에 뛰어들게 된 나는 최선을 다하여 선거에 임하였다. 지역구로 나뉘는 선거가 아니라 방콕 전체가 하나의 선거구이므로 매우 큰 선거다. 나는 이 선거에서 6천바트(1바트는 약 28원)를 썼다.

 방콕은 거대하다. 아무리 포스터를 붙여도 길속에 모두 묻혀 사라져 바리는 느낌이있다. “형님 이렇게 하세요. 우리는 이동포스터를 만드는 겁니다. 형님의 얼굴이 곧 포스터 아닙니까. 모든 곳에 가세요. 형님이 무개차 위에 올라서서 이길 저길 달리세요” 사관학교 후배가 전화로 일러주었다.

 다행히 나게는 망싸위랏 식당(잠롱 시장의 부인이 경영하는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당)에 반찬과 음식을 나르는 낡은 픽업트럭이 한 대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차를 이용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타고다녔다. 어느때에는 내 자신도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으로 있었다면 편히 잘 지낼 텐데 말이다.

  시민들은 나를 뜨겁게 성원해주었다. 이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민들은 유세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구해왔다. 종이든 천이든 합판이든.

 나는 진심으로 나를 돕는 모든 분에게 감사했고, 그 모두를 오늘날까지 기억하고 있다. 정치평론가들은 “예전에는 일처럼 일체가 된 선거지원이 없었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일체합심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나는 없는 대로 선거에 임하였다. 시민이 도와주면 도와주는 대로 하였다. 다른 입후보자가 나처럼 했다면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절약된 돈을 없는 사람을 위하여 쓴다면 당선 후 선거에 쓰인 돈을 회수하려고 국민을 기만하거나 ‘사기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방콕 시민은 나에게 48만표를 주었다. 민주주의가 태국내에서 실시된 이래 최대의 득표수라고 했다. 국회의원선거는 물론 다른 선거에서도 없었던 이례적인 득표수인 것이다.

태국 사회는 인정이 있고,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서로 돕는, 그리고 다른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 살아 숨쉬는 사회이다. 바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명예와 물욕에 얽매였던 젊은 시절

 어려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놀고 공부만 하였다. 먹을 것이 있기를, 늘 마음맞는 친구와 훌륭하고 너그러운 선생님이 계시기를,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매를 덜 맞기를 바랐다.

 좀 자라서는 유명한 중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근사한 칼을 차고 다니는 사관생도가 되고 싶었다. 졸업하고 즉시 일하여 돈을 벌 수 있기를 원했다. 아름답고, 지식이 있고, 나와 같이 생각하고 호흡하는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외국에서 학위를 따고, 다른 친구들처럼 라오스와 베트남에 가서 싸우고, 젊은 장교시절부터 땅과 집, 자동차를 갖고 싶었다. 그리고 높이 진급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1985년, 그 이전까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인 방콕시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제 그 임기 4년이 끝나가고 있다. 주위의 여러 사람들은 내가 시장직에 재선되어 여러 가지 일을 새로 추진해주었으면 한다. 나도 역시 다시 당선되어 여태까지 하던 일을 계속하고,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임무라고 생각한다(잠롱은 90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되었다).

 2차로 시장직에 도전하여 유세할 때까지 정말 여러 해가 흘러갓다. 나는 거의 매일 자문해본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가.” 대답은 한결같다.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여러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믿지 않는다. 또 믿게 할 방법도 없다. 특히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는 크게 되고 싶다. 여태까지의 나보다 더 크게 되고 싶다. 무엇을 하든 당시보다 더 크게 되고자 노력하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만일 내가 당선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 사실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지만 나는 7뼘의 폭과 12뼘의 길이인 내 오두막으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즐겁게, 그리고 계속하여 욕심을 잠재우는 참선을 벗삼아 살 것이다.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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