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경제통합’7단계 구상
  • 김상익 경제부 차장대우 ()
  • 승인 1992.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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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건에 따라 다단계 동시 추진 가능 … 단계별 해결 과제 수두룩

제 5차 남북고위급회담(12월13일)에서‘남북 사이의 화해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서명된 이후 남북간 경제협력시대가 곧 닥칠 것 같은 들뜬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나 교역 당사자들은 의외로 담담하다. 지난 8월1일 북방사업부를 신설해 대북관계를 전담하는 특수 지역 팀(5명)까지 구성한 삼성물산 측은 앞으로의 대북진출에 대해“아무 계획도, 할 말도 없다”면서 입을 굳게 닫았다. 북한에 사무소를 이미 개설해놓았다는‘설’에 대해서도 펄쩍 뛰었다. 다른 기업들의 반응도 이와 비슷하다.

이에 대해 업계의 한 관계자는“추진 중인 사업을 미리 터뜨렸다가 북한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경쟁업체에 새치기를 당할 우려도 있어 몸을 사리는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한다. 그는 또 북한 당국이 현재 남북 교역 자체를 공식적으로는 부인한 채‘묵인’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해당 업체로서는 입조심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무역협회가 운영하는 남북교역추진민간협의회는 철저히 비공개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는 남북간 경제교류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부는 92년 5월까지‘남북경제교류협력공동위원회’구성 및 운영 방안을 수립하고 경제교류 협력에 관한 제도적 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지난 12월20일에는 남북간 물자교류 확대 및 합작투자 추진방안을 마련하기 위한‘남북교역확대실무협의회’가 구성했다. 그러나 현재 남북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교류는 미약한 수준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남서울호텔 맞은편에 있는 두성빌딩 3층. 지난 2월 북한으로부터 반입해온 공예품 1만여 점이 10개월이 넘도록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일부는 이미 지난 7월 중에 신세계백화점에서 전시판매됐지만‘대작’들은 아직 빛을 못보고 있다. 65만달러를 들여 이 물품들을 반입한 두성통산측은 굳이 공예품이라고 말하지만 예술품으로 분류돼야 할 성질의 물품이다. 수예품 도자기 조선화 유화 돌공예품(조각) 목공예품 병풍 만년화(돌가루나 전복 껍질 등을 붙여 제작한 그림) 등 작품들 중에는 인민예술가나 공훈예술가의 작품이 상당수 있다.

두성통산측은 전문가들에게 이 작품들을 보여주고 이 가운데 1백50점을 가려 뽑았다. 그러나 아직 전시를 못하고 있다. 하반기의 전시판매 계획은 분위기가 좋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두성통산측은‘합의서 서명’에 고무된 듯 새해에 예술의 전당에서 이들 수준급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예술품들은 사상성이 문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앞으로 당분간 북한의 예술품은 더 이상 반입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두성통산측이 반입한 이 공예품들은 명태 등 수산물이나 철강재 같은 품목과 달리 취급돼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남북한간 물자 반출입엔 여전히 높은 벽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공예품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현재 남북간 교역에는 다소 제약이 있다. 정부는 일반 공산품에 대해서는 반출입이 손쉽도록 해놓았으나 농수산물 · 광산물 등은 수출입제한 품목으로 묶어 반입 물량을 제한하고 있다. 이는 국내 산업의 피해를 우려한 것이다. 이에 대해 무역협회측은 북한의 주요 수출품목이면서 남한의 반입규제 품목인 1차 산품에 대해서 품목별 특성 및 전년도의 수입 규모 등을 고려, 규제를 완화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국내산업의 피해에 대해서는 남북협력기금으로 보상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간 교역을 추진하는 업체들은 북한에 대한 정보부족과 제3국 중개상의 횡포 때문에 더 큰 애로를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남북한간 직교역을 하는 업체는 천지무역과 두성통산 등 극소수이며 대부분 홍콩 일본의 중개상을 통해 반출입을 한다. 북한의 무역상사와 직접 끈을 대고 있는 이 중개상들 중에는 자기의 위치를 악용 해 터무니없이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는 악덕업자도 있다는 것이다. 반출입액의 5% 이내를 수수료로 지급하는 경우가 보통이나 16~20% 이상 지급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북한 물품 반입에 관세가 붙지 않는 것을 빌미로 수수료를 높여 받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 같은 폐해는 중개상에 대한 정보부족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어떻게든 중개상과 연을 맺은 업체는 다른 업체가 그와 접촉할까봐 쉬쉬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이 남북교역을 시도하려는 업체는 중개상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또 장사가 잘되는 품목을 확보한 일부 중개상은 여러 업체에 경쟁을 부추겨 수수료를 높인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반입되는 물품의 질이 떨어져도 국내업체는 앉아서 당할 도리밖에 없다. 3국간무역이라 북한에 클레임을 걸 수 없는 만큼 중개상이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들이 모른척하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남북간 교역은 제약도 많고 불이익도 많다. 이 같은 애로 중에는 남북간 직교역이 활성화되면 해소될 것이 많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남북한이 경제교류→경제협력→경제통합 단계를 거쳐 단일경제권을 형성하기까지 걸어야 할 길은 매우 멀다. 주변 여건의 변화에 따라 여러 단계가 동시에 추진될 수는 있겠지만 아직 직교역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만큼 교류협력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갈 필요가 있다.

최근 중앙대 지역경제연구소 李鍾燻 교수팀은‘남북한 경제협력의 과제와 전망’ 보고서를 통해‘경제통합을 위한 7단계 구상’을 내놓았다. 이교수팀은 교육부 대한상공회의소 산학협동재단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90년과 91년 한국과 중국에서 두 차례 학술세미나를 가진 바 있다. 중국에서는 길림대 연변대 천진대 요녕대 등의 교수진이 참여했다. 이 보고서는 세미나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2차 세미나에 초청받은 김일성대학 교수진은 불참했다.

이 구상은 크게 경제교류 · 협력 · 통합 · 단일경제권 형성의 4단계로 나누어진다. 이것을 더 세분화한 것이 7단계 구상이다.

이 보고서는 제1단계에서 남북한이 호혜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단순한 물자교류와 함께 수평분업적 무역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자재는 원자재끼리, 공산품은 공산품끼리 물물교환을 하는 수평분업적 교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2단계에서는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수직분업적 무역이 제시되었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한 측은 석탄 철강 시멘트를 제공하고 기술력과 자본이 앞선 남한 측은 전자 자동차 등  공산품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경제교류 단계에서는 경제논리에 따른 이해관계가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뭔가 봐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면 북한은 자존심이 상해 남북관계가 껄끄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3국간 무역단계에서 경제교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무역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 그밖에도 환율 · 관세 · 창구 문제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달러화를 매개로해 북한과 한국의 환율을 따져보면 현재 북한 돈 1원은 우리 돈 3백50원쯤 된다(88년 현재 1달러는 북한 돈 2.14원). 그러나 사회주의권에서는 내국인과 외국인에게 환율을 차등적으로 적용하는 이중환율을 실시하고 있어 북한 돈의 가치가 과대평가돼 있다. 따라서 현실에 맞도록 공정하게 환율을 조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양쪽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므로 많은 대화와 양보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때 환율은 실질적인 돈 가치에 걸맞도록 수시로 조정돼야 한다.

다음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관세무역일반협정 (GATT)에 북한이 가입할 경우 관세가 문제될 수 있으므로 남북한간의 교역은 유럽공동체(EC)처럼 역내무역으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끝으로 북한의 무역상사들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반면 우리는 민간기업이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으므로 이 과정에서 과당경쟁이 우려된다. 정부도 이를 막을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제방식과 관련, 북한의 외화부족난을 고려한 청산계정의 설치가 요구된다. 청산계정이란 남북한 은행간 청산협정을 체결한 뒤 서로 교역한 금액의 차액만을 일정기간(6개월~1년)이 지난 후 셈하는 것이다. 가령 북한이 우리에게 1년간 1백원 어치 물건을 팔고 우리는 북한에 1백20원어치 물건을 팔았다면 우리 측은 나중에 20원만 받는 것이다. 정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용공여제도(swing)의 도입까지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의 20원마저 돈으로 받지 않고‘빚’으로 남겨두자는 것이다.

북한의 교역규모는 연간 40억 달러로, 이는 우리의 3%밖에 안된다. 게다가 북한으로부터 가져올 만한 물품도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경제교류 단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인 시점에서 서로의 필요에 따라 경제협력 단계로 넘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남북한의 산업구조가 상호보완적이라는 사실이 이 같은 예측을 뒷받침한다.

경제협력의 초기 단계인 3단계에서는 자본거래와 합작투자 및 기술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남한의 지본과 기술은 북한의 자원 및 노동력과‘행복한 결합’을 이룰 수 있다. 이에 앞서 투자의 안전성과 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투자보장협정 등을 체결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협력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지기 힘들다. 북한의 사회 간접자본 투자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전기 도로 수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허허벌판’에 합작공장을 세워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 항만시설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 기업이 사회간접자본에까지 투자할 여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가장 바람직한 경제협력 방안으로 대두되는 것은 비무장지대에 산업공단을 설치하는 것이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적은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 군사적 신뢰가 확고해져야 가능하다. 이와 관련, 최근 북한은 황해도 해주지역에 2백만명 규모의 합작공단을 조성해 섬유 · 전자업종의 공장들을 설립하자고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과의 합작에 유망한 사업으로 지하자원 관광자원 해저대륙붕개발 및 공동어로 공동해외진출 등을 꼽을 수 있다. 통일원측은“공동어로 구역 설정과 지하자원 공동개발은 과거 남북경제회담에서도 합의된 바 있고 북한의 부담도 줄일 수 있어 실현 기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제4단계에서 남북한 당국은 공동으로 정책을 구상할 수 있다. 경제계획과 정책을 세우고추진하는 것은 두 당국의 고유한 권한이나 공통 관심사에 관해서는 같이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세우는 것이 중복 투자를 막고 정책의 효율성을 꾀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두 체제가 안고 있는 한계를 서서히 조정할 수도 있다. 부와 소득의 재분배를 위해 산업조직도 바뀔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두 체제 사이의 이질감도 어느 정도 해소한다는 구상이다.

제4단계를 거치면 경제협력의 단계를 지나 경제통합의 단계로 옮아갈 수 있다. 제5단계에서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야 할 것은 고정 환율제 확립이다. 1~4단계에서 환율을 계속 조정해오는 동안 남북한간의 산업도 균형을 잡게 되고 돈의 가치 역시 어느 정도 현실에 맞게 안정되면 환율의 고정화와 남북한 공동의 통화금융정책 수행도 기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일경제권, 곧 경제통일에 이르기 바로 전단계인 제6단계에서는 통화통합이 가능하다. 남북한이 함께 쓰는 단일통화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의 화폐로 통일할 경우 북한 돈을 가진 사람에게 일정 비율로 환산해 남한 돈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것은 화폐 개혁의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남북한이 하나의 중앙은행을 세울 수 있다.

이상과 같은‘남북 경제통합 7단계 구상’은 완결된 형태가 아니다. 무수한 구상이 나올 수 있으며‘7단계 구상’은 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한 경제교류협력에 관한 논의는 더욱 활성화돼야 하며 그 결과를 토대로 현실에 맞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한간 학술교류가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견해이다.

일반적으로 지역간 경제통합의 가능성은 경제 구조적 면에서는 같은 구조일 경우보다 서로 다른 경우, 특히 두 지역의 경제구조가 상호보완적일 때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득격차 면에서는 두 지역의 소득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날 경우엔 경제통합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남북한간 경제통합 가능성은 상반된 두 가지 전망이 가능하다. 먼저 남북한의 산업구조는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에 경제통합의 여건이 좋다고 볼 수 있다(58~59쪽 참조).

그러나 남북한간 경제력의 격차가 커 통합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견해도 나올 수 있다. 북한이 남북한간 경제교류 및 협력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경제력 격차 때문이므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남북 경제협력은 체제우월감을 과시한다거나 선진자본기술을 개도국에 이전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북한이 경제통합에 이르기까지 밟아야 할 계단은 하나둘이 아니다. 동시 추진은 가능할지라도 몇 계단씩 건너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해결해야 할 과제와 새로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어차피 상대가 있는 만큼 계획을 세우더라도 신중하고 유연한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애써 쌓아온 신뢰가 하루아침에 깨질 수 있다. 남북 관계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돼서도 곤란할 것이다.

“급할수록 천천히.”이 평범한 격언이야말로 경제공동체의 지름길을 찾는 데 가장 효험이 있는 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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