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5주년 특별기획 /국제화 시대 한국의 선택
  • 인도네시아.이흥환 차장대우 ()
  • 승인 1994.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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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미래로 몸던지는 젊음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주의 항구 도시 람풍에서 처음 만난 봉사단원 한재호씨 (27)는 말끔한 차림에 하얀 얼굴이었다. 옆구리에 단정히 핀 서류 가방과 긴 소매의 단추를 끼운 와이셔츠 차림만으로도 선진국 대도시에서 일하는 청년 실업가같은 인상을 짙게 풍겼다. 짧은 마지 티셔츠차림에 누런 운동화를 신고 다닐 것만 같은 봉사단원에 대한 이미지를 청년 봉사단원 한재호씨는 말끔히 거둬가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2박3일 동안 그는 국제화와 봉사, 자신의 포부, 봉사단 사업의 개선점들에 대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일목요연하게 강의하듯 들려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내 사정은 물론 웬만한 국제 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아버님이 <시사저널>을 한달치씩 모아 보내주십니다. "
 그가 소속된 곳은 람풍 시 중앙농업협동조합이다. 람풍 인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상품화할 가치가 있는 토산물이나 농수산물을 찾아내고 시장 조사를 하는 것이 주업무다. 어찌 보면 사업이나 마찬가지다. 농협 사무실의 인도네시아 동료들도 그의 활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농어촌 주민과 만날 때는 유창하게 현지어를 구사하고 사무실에서 상관을 만나 사업 계획을 보고할 때는 매끈한 영어로 상대자를 토론에 끌어들인다. 봉사 활동에는 사업가다운 수완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5천달러짜리 '멸치 포장 사업'

 그는 한 달 전부터 총예산 5천달러짜리 중요한 사업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람풍 시 앞바다에서 잡아올리는 멸치를 포장해 시장에 내는 사업이다. 한 달 전 우연히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던 중 질 좋은 멸치가 싸게 팔리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그는 서둘러 오토바이에 동료를 태우고 부두로 달려갔다. 고기잡이 배를 세내어 타고 '멸치 섬'으로 건너가 현장을 확인했다. 일등품이었다. 내친 김에 람풍 시 슈퍼마켓과 재래 시장을 뒤져 시장 조사를 마쳤다. 자카르타에서 온 포장 멸치가 약간씩 팔리고 있었으나 질이 형편없었고, 람풍 시에서 나오는 멸치를 포장해 파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트리나시 (멸치) 패킹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산지에서는 1kg당 7천 루피아(약 3천5백원)에 출하됩니다. 그러나 백g 단위로 포장 판매할 경우 1kg당 2만1천 루피아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습니다. 3배의 수익인 셈이지요."

 그는 트리나시 프로젝트의 예산을 짜보았다. 포장기계 값만 5천달러. 농협에서는 엄두도 못낼 거액이다. 봉사단 본부에 4천달러 지원을 요청하고 나머지 천달러는 농협이 대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공동투자 형식을 갖추는 것이다. 잘만 되면 중앙농협에서 직접 멸치를 모아 포장하고 중개상 없이 직판할 수 있으며, 람풍뿐만 아니라 자카르타 시장에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계산도 섰다. 작은 기업을 하나 만드는 셈이다. 사업 계획 완성까지는 앞으로 6개월. 자신의 남은 활동 기간(6개월)에 운영의 틀만 잡아놓으면 후임 봉사단원이나 현지 농협 직원들이 사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한재호씨가 구상해 추진중인 트리나시 프로젝트의 전모다.

 제2의 사업인 '징깨(담배 향료) 프로젝트'는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이 섰다. 람풍의 농촌 지역인 리스의 단위조합장과 지역 주민들은 현지 특산물인 징깨를 상품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장 조사를 해본 결과 품질이 떨어진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그는 지금 주민들 주장대로 상품화하더라도 싸게 내지 않으면 시장을 파고들 수 없다고 설득하고 있다.

 한재호씨는 선배 단원들의 충고를 바탕으로 하여 나름대로 세 가지 수칙을 정해놓았다. 첫째, 아니다 싶으면 빨리 포기하라. 봉사 활동은 과정일 뿐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되지 않을 것을 자존심만 내세워 매달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이 단계를 극복했다고 자신한다. 둘째, 현지어 실력이나 경력보다는 봉사가 본질이다. 그의 봉사 활동은 수준급일 수밖에 없다. 셋째, 귀국하면 무엇을 할지 늘 생각하라.

"봉사 활동 2년은 해외 유학 기간"

 외국어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석사 봉사단원 한재호씨는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런던 대학 박사과정에 지원할 계획이고, 학위를 받은 후에는 유엔개발계획(UNDP)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제 전공인 인류학도 결국은 사람연구와 인간 사랑이 궁극 주제입니다. 학교와 현장중 택일하라면 현장을 택하겠어요. 못사는 것을 이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못살아 보는 것이 진정한 인간 사랑이라고 봅니다. 같이 움직이고 같이 활동하는 거지요."

 그는 봉사 기간 2년이 '유학'이라고 말했다. 개발인류학을 전공한 그의 처지에서 봉사 활동은 곧 현장 실습인 셈이다. 인도네시아의 카오디(농협)와 코프라시(농민조직)에 관심이 많은 것도 개발인류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씨가 자기 전공 분야를 봉사 활동에까지 연장시킨 경우라면, 자카르타의 국제 대학에서 한국어 교육을 맡고 있는 오수경씨 (25.4기단원)는 '우연한 선택 때문에 인생 항로가 바꿔 경우'에 해당한다. 오수경씨는 외국어대학 독문학과 1학년에 다닐 때 새로 개설된 인도네시아어 과목을 우연히 선택해 수강하다가 결국 봉사단원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일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면서 현지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1년 준비해서 혼자 배낭을 메고 인도네시아를 한 달간 여행했어요. 그때 인도네시아로 자원 붕사를 가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지난해 학교를 졸업하고 두번째로 인도네시아 여행을 왔을 때는 봉사단 자원을 결심했어요."

 심장병 탓에 건강도 좋지 못한 편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어머니가 줄곧 끼고 살아 방 청소도 할 줄 몰랐던 여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이제는 시집가도 되겠다"고 자평한다. 그는 전화나 편지를 잘 하는 편이 아니다. 한국 친구들에게도 '너희들이 열 번 편지하면 나는 한번'이라고 미리 다짐을 받아

두었단다.

"갈등은 귀국 때까지 계속될 것"

 그런 오수경씨에 비하면 람풍의 한재호씨는 정반대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사교적이다. 한씨의 자취방 책상 한구석에는 국제우편 편지 봉투가 한 통이나 놓여 있다. 봉사단원의 다른 생활 양식을 두 사람은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한재호씨는 또 사무실 동료나 주위 인도네시아인 친구의 혼례나 장례식에도 빠짐없이 참석할 뿐만 아니라, 식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런 그를 보고 인도네시아인들은 "우리는 같은 아시아인"이라고 유대감을 표시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아시아의 중요성과 국제화의 참뜻을 새삼스럽게 깨닫곤 한다.

 "국제화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사람도 인간이라고, 저 나라도 우리와 같은 나라라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국제화지요. 국제화의 우선 목표는 아시아입니다. 먼저 아시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일본이나 중국만 상대하지 베트남 같은 저개발국은 미개인 보듯 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일본인들은 그렇지 않더군요. 일본 봉사대원들은 여기 사람들에게 우리보다 더 공손해요.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상품 시장으로만 생각합니다. "

 그는 봉사란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봉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쌍방의 인식 확대 작업입니다. "그는 농협에 근무하는 첫날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서로 무시하지 말자. 같이 나누고 서로 섬기자." 나눔과 섬김은 한국청년봉사단의 구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봉사라는 것이 꼭 그의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갈등이요9 처음에는 컸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하지 않을 뿐이지요. 귀국할 때까지도 그 갈등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봉사단원들은 1년에 두 번씩 자카르타의 지역사무소에 모여 평가회를 갖는다. 단원이 파견된 다른 열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열리는 행사다. 평가회 때마다 단원들끼리 토론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반가움에 앞서 자기의 활동 경험을 서로 얘기해줌으로써 정보를 교환하는 기회로 삼기도 하고, 애로 사항을 서로 털어놓는 하소연과 푸념과 격려의 터가 되기도 한다.

 한재호씨도 평가회 때 할 얘기가 많다. 한국국제협력단과 봉사단원의 상호 몰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할 참이다. “단원은 국제협력단의 관료 조직을 잘 모르고, 국제협력단은 단원의 자율적인 의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일방 규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같은 람풍 지역에서 봉사원으로 일하는 일본 국제협력대의 여자 대원 마쓰오 가요코씨(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를 가끔씩 만나 서로의 활동 내용을 비교해 볼 때마다 그는 많은 차이점을 실감한다. 일본 대원은 ‘그저 현지에 있기만 해도 봉사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봉사단의 경우는 단원이 직접 사업 계획을 구상할 수 있지만 일본은 대원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전문성을 요하는 사업은 전문가 집단에 일임하는 형식이다.

품위 유지비 한달에 65달러
 올해 스물일곱인 청년답게 그는 ‘인생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사생활도 철저하게 계획적이다. 경쟁자도 없고 간섭자도 없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게을러지기 쉬운 것이 봉사단원의 사생활이다.

 한씨는 한 달 생활비는 정확하게 3백65달러이다. 본부가 지원하는 현지 생활비와 주거 보조비를 합친 금액이다. 자취방 값 50달러와 식품비 1백50달러를 합친 2백달러가 필수적인 기본 생활비이다. 백달러는 여가를 활용하기 위한 잡비로 영화 구경을 하기도 하고, 가끔 맥주도 한잔 한다. 두메로 출장을 나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올 대는 여직원들에게 사탕을 사다줄 때도 있다. 나머지 65달러를 그는 ‘품위 유지비’로 분류한다. “중간 간부 이상을 만날 때는 차 한잔 가지고는 힘듭니다. 저를 관리자로 보는 관리도 간혹 있어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식사를 대접하기도 합니다.”

 결혼식에 참석할 때의 선물비와 출장 때 동반하는 관리들 접대비도 65달러 한도에서 지출한다. 한국의 부모에게 2주에 한번꼴로 하는 안부 전화비도 만만치 않다. 나머지 여분이 바로 저축으로 쌓이기는 하지만 푼돈 모으기가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고 한다. “본부가 책정한 3백65달러는 정확하게 저를 위한 생활비 같습니다.”

 위로 누나 하나를 둔 외아들인 한재호씨는 취재팀과 헤어지면서 소망 한 가지를 밝혔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여기에 남아 중학교 선생을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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