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정관리론’자리 잡는다
  • 한종호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1.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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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북한은 경제 동반자, 적극 지원”… 장기 목표는 개방유도

한반도 핵철수, 열달 만에 재개된 총리회담 등 정치안보분야에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잇는 가운데 최근 정부는 대북한 경제정책에서 전향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정부의 태도는 통일정책 수행에 있어 통일과정의 관리에 역점을 두자는 주장을 크게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16일 방콕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 · 세계은행(IMF · IBRD) 총회에서 李龍萬 재무부 장관이 “북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힌 대목이다. 국제금융기구 가입은 북한이 경제문제 해결의 돌파구로서 대일수교와 함께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는 부문이다. 또 지난 15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유엔개발계획(UNDP) 동북아지역 조정관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金仁浩 경제기획원 대외경제조정실장은 “선봉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 개발사업에 인력 기술 자본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아직 계획 자체가 구상단계에 있고 실현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겠지만 이를 계기로 남북한 간 협력증진의 폭은 훨씬 넓어진 셈이다.

국내적으로는 천지무역이 북한에 반출한 쌀 5천톤에 대한 대응물자를 받지 못함에 따라 남북교류협력기금에서 12억6천7백90만4천원을 손실보전금으로 받았다.

국제기구 활동 지원 등 모든 조처 동원
사실 쌀을 둘러싸고 그간 많은 문제가 제기됐었다. 뚜렷한 주무 부처가 없어 쌀 반출까지 터무니 없이 많은 시일이 소요된 점이라든지, 반출된 쌀이 인민군 군량미로 전용될 염려가 있으니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국방부 등 정부 일부 부처의 반론을 조정하는 문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쌀을 싣고 간 콘돌호가 나진항에 도착해서 접안도 못했고 북한배가 나와서 쌀 12만5천부대를 전부 재포장해갔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천지무역 劉相烈 회장은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펄쩍 뛰며 부인했는데 “자꾸 이런 보도가 나가는 것은 교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애써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 쌀문제의 신속한 처리과정에서 보이듯 정부는 직간접 교역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스스로 부담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기획원의 한 관계자는 제3국을 경유한 교역상의 하자에 대해서도 손실보전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같은 몇가지 사례를 종합해본다면 정부가 ‘북한의 개방유도’라는 중장기적 정책목표 아래 직간접교역, 합작투자, 국제기구 활동 지원 등 이에 필요한 모든 조처를 동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통일정책과 연결지어보면 북한을 동반자로 인식, 직간접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태도로 보인다.

이같은 정책방향이 처음 천명된 것은 88년의 7 · 7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언 제4항은 “남북 모든 동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항목은 당시 동유럽의 격변과 독일통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른바 흡수통일론에 밀려 현실성있는 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후 원래의 입장이 다시 공식화된 것은 지난 6월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관계장관회의이다. 이날 통일원은 <통독교훈과 남북통합 접근전략>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인적 · 물적 교류 분야에서 전향적으로 대북한 선제조처를 취하고, 유엔가입을 계기로 국제무대에서의 남북협력방안을 강구한다는 등의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지난 9월6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21세기위원회 보고는 이같은 경향을 이른바 ‘통일과정관리론’이란 개념으로 논리화하고 있다. 대통령자문기구인 21세기위원회는 이날 노대통령에게 ‘21세기를 위한 국정운영방향’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통일과정의 효율적 관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구체적 내용으로 △이질성 해소를 위한 교류 확대 △통일에 대비한 이념 · 제도 정비 △점진적인 경제 통합 추진 △통일한국을 지향하는 안보체제로의 전환 등을 제시했다.

이러한 입장은 노대통령이 9월25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경제를 활성화시켜 남북을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려가면서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 金日成 유일체제를 당분간 인정할 수도 있다”고 한 말에서 재확인됐다.

이같은 경향에 대해 국방대학원의 車榮九 박사는 “그간 정부의 입장에 혼란이 있었다. 21세기위원회 보고는 급격한 흡수통일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정부 내 분위기도 차분해지고 있다. 요컨대 통일에의 대비는 하지만 흡수통일쪽으로 정책방향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도 “통일과정관리론이라는 뚜렷한 형태를 취한 적은 없지만 그런 경향이 정부 내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동의를 표시했다. 그리고 “최근의 대북한 ‘경제공세’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조처들이다”라고 말했다.

“개혁 · 개방 유도가 통일의 첩경”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이같은 정부의 태도가 또하나의 ‘변형된 흡수통일론’이 아니냐하는 지적도 있다. 북한을 동반자로 인식한다는 것이 기껏해야 통일비용을 좀 줄여보자는 ‘계산기에서 튀어나온’ 발상에 그칠 것이 아니라 엄연하 견제 주체로서 정치적 실체를 형성하고 있는 당사자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솔직히 말해서 북한을 잘살게 하자는 것은 통일 이후의 혼란을 좀 줄여보자는 것이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대화의 협상으로는 한계가 있다.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유도하는 것이 통일의 첩경이다”라고 말했다.

냉정하게 보면 북한이 남한의 ‘흡수통일론’을 경계하듯 남한도 북한의 ‘적화통일론’에 고리를 걸고 잇다. 남북이 현재의 체제대립을 계속하는 한 어느 한쪽의 양보를 얻어내기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보다 실효성있는 방안이라면 ‘공존형’이라는 제3의 길일테고 정부의 입장이 이에 접근해가는 것이라면 진일보한 태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7 · 7선언 이래 본격화된 통일논의는 한 차례의 고비를 넘어 이제 보다 성숙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가닥을 잡아나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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