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英淑 평민당 부총재
  • 김춘옥 실용뉴스부장 ()
  • 승인 1990.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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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당론엔 저항해야”

 여성지위 세계44위(1위는 스웨덴), 여성정치 참여율 2.1%(세계 평균 12.3%)인 우리나라에서 朴英淑의원의 존재는 남다르다.

 평양에서 여학교를 다니다 피난와서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닌 “소시민”박의원은 졸업하던 55년부터 87년 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YMCA에서 여성문제만을 다루어 왔다. 여성문제를 정책적으로 다루겠다는 총재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기대를 걸고”평민당에 부총재로 입당해서 3년이 된 오늘, 박의원은 ‘여성 부총재’가 아닌 ‘부총재’일 뿐이다.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으나 “가사는 전혀 돌보지 못한 채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는”야당 부총재를 파란 많은 임시국회 회기중에 만나보았다.

 

● 의원직 사퇴서를 낸 네명 가운데 박부총재가 소속돼 있는 평민연의 이해찬의원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같은 사퇴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이해찬의원은 내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젊은 정치인으로 깊이 신뢰하고 있던 분입니다. 재야시절과 13대국회에서 함께 일하면서 명석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3당야합 이후 민주화가 역행한다고 느낀 이의원이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다. 특히 장기집권을 노린 여당이 이번 임시국회 때 방송관계법과 국군조직법을 상임위에서 불법적으로 통과시키는 것을 보고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번사퇴결심이 이해찬의원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는 의견을 달리하지만 이의원의 깊은 고통은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 85년말 KBS 시청료거부운동 여성단체연합회회장을 지내셨던 경험에 비추어 이번 MBC와 KBS의 제작거부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희생이 따르겠으나 용감한 결단이라고 봅니다. 국민의 알권리와 국민의 방송을 지키겠다는 의지에 격려와 지지를 보냅니다.

●  원인이야 어떻든 최근 국회내에서 일어난 문공위의 명패사건을 놓고 평민당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당, 돌출분자가 많은 당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민당이 평지 풍파를 일으키는 이유는 야당이기 때문입니다. 여당이 법안을 낼 때 부자와 권력을 가진 사람 편에 서 있으므로 노동자 ? 농민을 대변하는 평민당으로서는 거여의 횡포에 대항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폭력이라는 개념을 어떤 시각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강자가 물리력을 썼을 때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자가 당했을 때, 조건반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발적으로 발로한 것도 폭력이 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자에게는 폭력이란 단어가 쓰일 수 있어도 약자에게는 쓰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꼭 피를 흘리게 한 것만이 폭력이 아니라 언어폭력이 더 무서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특히 여성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을 때는 저항할 능력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도 이철용의원 같았으면 민자당측의 언어폭력에 대응할 수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언어 폭력에 습관이 안됐던 김영진의원은 민자당측의 언어폭력을 순간적으로 참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  부총재로서 평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유가 각각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평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선 호남사람들인데 이같은 현상은 물론 바람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른 지역출신으로서 우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평민당은 노동자?농민?도시서민?약자들을 대변해주고 있는 당인데 이들 대부분이 호남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과거 27년 동안 지역차별 정책의 결과이지요. 평민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김대중총재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라면 무조건 혐오하는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은데 박정희시대가 김대중총재에게 심어준 이미지는 ‘용공적’이었거든요.

●  의회에 들어오신 후 울산노조문제, 부산일보 파업사태, 對조선일보 투쟁위원장 등 당내 강경전략의 선두 역할을 하셨습니다. 악역을 담당하셨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울산과 부산의 경우는 중재가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순수하고 곧이곧대로 판단할수 있는 사람, 잘못된 이미지 없는 순수한 사람이 필요해서 제가 선발됐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와의 경우, 언론을 잘 몰랐으나 많은 의원이 관련돼 있었고 문제의 외유도 가지 않았던 사람이고 해서 내가 선발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내가 적격자라고 생각지는 않았어요.

●  보사위소속의원으로서 팔당 수질조사 활동을 하는 등 환경문제에 많은 관심을 표하고 계십니다. 우리나라 환경문제의 핵심이 무엇이고 또 어떠한 해결책이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환경업무가 일원화되어야 합니다. 환경처는 공해단속만 하고 있는데 환경부로 승격해서 15개 부처에 흩어져 있는 환경업무가 일원화돼야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술로는 수질오염 정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경기도가 8개업체에 허가한 팔당에서의 어마어마한 양의 골채취를 막아야 합니다. 설악산 개발도 필요하다면 환경영향 평가를 해서 생태계에 위협을 주거나 환경 훼손을 하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합니다. 2030년대에는 원자력 발전소 57기가 생길 예정입니다. 그런데 지구 대기권 오존파괴의 가장 큰 원인이 화석연료라는 겁니다. 원전으로의 대치가 불가피한다는 거죠. 이같은 근본적인 논란이 있긴하나 건설자체를 잘해야 하고, 이미 건설된 것은 안전성을 보장해야 하고, 또 우리국토가 57기를 수용할 수 있느냐도 문제입니다.

●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하시는 부총재께서 조직체 중에서도 규율이 엄하다고 할 수 있는 당. 그 중에서도 야당에서 활동하시면서 갈등을 느끼신 적은 없으십니까?

 제가 당에 들어갈 때 제 남편이 “자유주의자인 네가 정당이라는 조직사회 속에서 당론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자신없었어요. 그러나 이미 결정된 당론에 따르기만 해야 했다면 저는 하루도 못살았을 거예요. 헌데 제가 톱 레벨의 논의구조 속에 있고, 그 과정에서 제 의사가 많이 반영되기 때문에 아직은 거부반응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론에 절대복종이라는 표현은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입니다. 논의과정에서 제 의사가 충분히 반영됐고 또 논의과정자체가 충분했을 때는 따르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 저는 아직도 개인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익환목사와 서경원의원 사건에 대해서 당이 내린 처사에 대해서는 저항을 했지요(당시 박의원은 문목사와 서의원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대해 당이 충분하게 맞서지 못한 데 대해 평민연 이름으로 반박성명서를 냈다).

● 계보를 형성해야 하는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계보 없는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지금과 같은 정치풍토가 계속되는 한 저는 정치를 할 수 없을 만큼의 한계를 느낍니다. 계파를 유지할 생각도 없고 계파를 유지할 막대한 돈도 없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한계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단지 정치경력이 짧아서 느끼는 한계는 있습니다. 평민당이 저를 필요로 해서 들어왔고 평민당이 위축돼 있을 때 제가 이끄는 평민연(회원은 약 90여명)이 유입되어 수혈이 된 공으로 해서인지, 또 제가 한때 권한대행을 맡았을 때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던 공 때문인지 아직까지는 당에서 위상을 잘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매번 사건이 날때마다 정치적 경륜이 부족하다고 느끼고는 있습니다. 또 세비가 얼마나 적은지 아십니까? 제가 받는 세비가 세금제하고 평균 2백50만원인데 당에 60만원, 평민연에 50만원 내고 나머지도 각종 단체에 지원해야 하므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계를 느낍니다. 남편 주머니도 한계가 있죠. 나는 백만장자도 아닙니다.

●  인권문제 ? 윤리문제에 관심이 많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의 박의원께서 정계에 들어와서 느낀 한국 정치현실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우리 아빠가 “너를 보니 국회의원들 놀고 먹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생활도 없고 일많이 하는 줄 미처 몰랐어”라고 하더군요.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합니다. 그러나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국민이 배제되는 정치를 할 때는 정말 환멸을 느낍니다.

● 최근 여성정치연구소가 몇 개 생겼고 정치고실 등이 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치지망 여성들에게 어떤 충고를 하시겠습니까?

 현장에 있는 내가 충고를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정치풍토가 잘못돼 있기 때문에 정치인에 대한 존경심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정계에 들어올 때는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또 자기 생활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생각을 갖고 일해야 개혁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 정치가 민주화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므로 가정부재의 정치구조가 형성돼 있습니다. 게다가 가사도 완전히 여성에게 맡겨져 있으니 이것은 양립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가족과 식사하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  평민당에서는 지방의회의원의 25%를 비례대표제로 하고 그 가운데 반을 여성으로 하자는 지방의회 여성진출 방안을 지방자치제 법안과 함께 국회에 제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성의 정치참여의식이 높아졌는데도 우리나라 정치풍토나 유권자의 인식 때문에 자유경쟁선거로는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자금조달, 선거전략, 경험축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다른 나라처럼 한시적으로나마 여성들에게 특례를 주지 않으면 여성의 정치참여는 요원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비례대표제는 평민당뿐 아니라 여성개발원, 정무제2장관실,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현자씨, YWCA를 비롯한 보수적인 여성단체, 여성단체연합회와 같은 진보적인 여성단체도 가장 합리적인 제도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 법안에 민자당이 반대하고 있는 이유는 비례대표제 그 자체를 실시하면 야당붐이 일어나서 지방의회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자제를 안하겠다는 복선이 깔린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성이 정치에 참가해야 할 필요성 가운데 중요한 점만 지적해주십시오.

 인간은 평등하다는 측면에서 남성이 하니까 여성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자질이 남성의 자질과 다르고 또 정치는 힘의 경쟁이 아니고 인간의 삶의 조건을 만들어나가고 잘못된 조건을 개선해나가는 것인데 여성에게는 보다 세밀하게 사물을 관찰하고 생명존중 정책을 펴 나갈 수 있는 자질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이 천부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부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사회풍토와 통념, 교육제도와 현실이 남녀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은 똑같아야합니다. 남성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여성과 똑같아야합니다. 남성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여성과 똑같이 가져야 하죠.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있을 수 있으나 차별은 안됩니다.

●  한국여성과 여성운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의식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여성의식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리라고 봅니다. 70년대말까지 여성운동은 시혜적이고 박애적인 차원에 머물렸습니다. 정계에 들어가고 싶어했던 특수층의 자선운동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여성운동은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화 한 것이므로 헤게모니 싸움이 있다고 비난하는 여론도 있으나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여성운동은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될 것이므로 저같은 사람은 금세 소용없게 될 겁니다. 빨리 도태돼야 해요. 지금 50대 이상은 다 물러가야 해요. 민중에 기반을 두고 싸워서 올라온 40대 기수들에게 많은 기대를 합니다.

●  여성운동 기수를 말씀하셨는데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국내외를 통틀어 말입니다.

 외국의 예는 들지 말고요. 현재, 그래도, 이효재선생이나 이우정선생을 들 수 있겠지요. 가장 40대 기수의 의식과 가깝기 때문이지요.

●  어려서부터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이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이북사람들은 원래 상놈이라고 하지만 남?녀구분은 별로 안해요. 또 그곳에 기독교가 들어와 나는 주일학교도 다니고 해서지요. 개념적으로만 알았지 아직도 절박하게 차별받은 경우가 없어서 여성문제에 열의가 부족하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이대, YMCA 등에서도 그동안 제가 여성들하고만 일을 해서일꺼예요. 정계에 들어온 이제야 서서히 여성문제를 느끼고 있는 처지예요. 한가지 기억에 남는 사실은 있어요. 대동강변 동둑에 앉아서 친구와 함께 오야케노하하(공적인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지요. 아마 그때부터 사회사업에 뜻을 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최근에 들어와서는 남편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피난민이었지만 불편한 것없이 자랐던 가정환경이나 당시 YWCA나 이화여대의 분위기가 소시민적이었으므로 여성운동을 한다하면서도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애기 낳은 경험과 권인숙양, 이한열군, 박종철군 등의 일을 겪으면서 남의 문제가 내 문제로 아파왔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준 것이 남편이었습니다.

●  박부총재께서는 대처 여사나 이태영여사처럼 남편과의 나이 차이가 10살입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넘겨야 할까요?

 (?)현 사회구조에서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지려면 남성의 이해와 협조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달라는 이기적인 가장보다는 보다 큰 것을 위해서는 사적인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가장이 있어야 여성의 활동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는 아무래도 부부 사이의 연령차이가 많이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1990년 7월, 현재 한국에서의 박영숙 부총재를 한마디로 평해주십시오.

 지금의 나는 내가 원했거나 성취하고자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나에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내 책임은 아주 크고 옳은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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