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전망 없어 언론에 제보했다”
  • 김선엽 기자 ()
  • 승인 1990.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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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玉사건 첫 공판, 검사측 訊問 내용 핵심 벗어나…재판부는 보석 허가

6월28일 오전 9시50분경, 서울형사지방법원 424호 법정은 침묵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50여 좌석에 불과한 방청석은 물론, 출입구 주변도 사람으로 가득찼고 李海瓚(평민당), 朴燦鍾(민주당)의원, 黃山城변호사 등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10시가 되자 심리를 맡은 崔春根판사가 입정했다. 최판사는 법정 안에 빡빡히 들어선 방청객을 둘러보더니 서있는 사람들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엄숙한 재판분위기 유지를 위해 가족과 사건에 직접 관련된 사람만 남아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자 곧 방청객 몇 사람이 “이번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이므로 지켜봐야겠다” “나갈 수 없다”고 소리쳤다. 판사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재판 관계자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5분간 휴정하고 대법정(417호)으로 장소를 옮기겠다”고 공표했다. 방청객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부랴부랴 대법정으로 이동했다. 공무상 기밀 누설 혐의로 구속기소된 李文玉 전 감사원 감사관에 대한 첫 공판은 이런 소동 끝에 시작됐다.

 가족과 경실련 관계자 등 1백20여명의 방청객은 이씨가 대법정에 들어서자 박수를 치기도 했으나 공판은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됐다. 먼저 대검중수부 3과장 韓當煥검사가 검찰의 공소요지를 진술했다. 한검사는 이씨의 구속 직후부터 논란이 되고 있는 쟁점을 의식한 듯 “이피고인이 언론에 유출한 내용은 감사결과의 중간 보고로서 일종의 내부문서이며, 확정공개 되려면 법률적 검토와 감사위원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 처리과정중의 문서이므로 공무상 기밀”이라고 지적했다.

 

외압에 의한 감시 중단 실태 밝혀

 한검사는 이어 “이번 사건은 언론 보도 자체가 아닌 누설행위만을 문제삼은 것이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와는 무관하다”며 “진실을 알 권리는 마땅히 보호돼야 하나 누설된 보고서처럼 사실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다르다”고 밝혔다.

 그러나 있는 모두진술을 통해 “84년과 87년 해외주재 대사관에 대해 감사를 하려 했으나 全斗煥 전 대통령의 지시로 안기부가 감사를 주도했다. 또 86년 해외개발공사에 대한 감사 때는, 당시 새마을운동 본부장 全敬煥씨가 새마을운동 실적을 홍보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장관 2명을 초청하면서 경비 4천만원을 해외개발공사에 부담시킨 사실을 발견했으나 외부압력으로 감사하지 못했다”고 새로운 사실을 폭로했다.

 이씨는 “이처럼 감사원이 공명정대하게 업무를 집행하지 못한 데다가 올해 1월말경엔 의원내각제하에서도 감사원을 대통령직속기구로 두기 위한 연구용역 지시가 떨어지는 등 개선전망이 없어 언론에 제보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진술을 시작하면서 구속상태라 일목요연한 준비를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등 여유를 보였고, 진술 말미엔 “동료가 신분상의 불이익 때문에 사실대로 진술을 못하고있지만 원망하진 않는다. 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증인선정을 최소화하고 내 얘기를 참작해 달라고”고 재판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모두 진술이 끝난 후 검찰쪽의 직접신문이 이어졌다. 검사는 “군복무중 동아대 야간대학을 어떻게 다녔느냐” “야간대학과 성균관대 경영대학원을 2년, 1년씩 수료했다는데 수료증은 있느냐” “현재 소유하고 있는 27평짜리 아파트와 강남구의 나대지 60평이 시가로 얼마인지 아느냐”고 이씨의 학력과 재산상태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이씨가 여론과는 달리 솔직하지도, 청렴하지도 못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듯했다.

 

“감사원 규정은 내가 더 잘 안다”

 이밖에 검사는 “한겨레신문에 보도일자를 5월11일자로 정해준 것은 5월8일 있을 예정이었던 정부의 부동산대책발표에 손상을 입히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느냐” “세무서를 감사하기로 돼 있는 규칙을 어기고 직접 민간기업을 감사하거나 자료를 요구한 적은 없었느냐”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이씨는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고, 오전 공판이 끝나갈 무렵에는 “감사관이 그런 규정도 모르느냐”는 식의 윽박지르는 신문태도에 흥분, “여기가 징계위원회냐, 감사원 규정은 수십년을 근무한 내가 더 잘 안다. 이런 식의 신문에는 답할 수 없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점심식사 후, 오후 2시부터 속개된 공판에서 검찰측은 대기업의 비업무용부동산 보유현황이 43.3%로 나오게 되기까지의 과정, 즉 당시의 감사 경위에 대해 해당기업별로 확인했고, 제보동기를 개인적인 인사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씨는 업무용과 비업무용부동산을 구분함에 있어 독단적인 판정은 없었으며 폭로 동기 또한 감사원의 위상을 바로잡기 위한 충정이었다는 본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오후 4시20분쯤 끝난 이날 공판은 검사와 이씨가 감정적으로 대립, 다소 격앙된 상태로 진행됐으나 검찰과 변호인단간의 본격적인 공방은 없었다. 한편 첫 공판 이틀 후인 지난 6월30일 최춘근 판사는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이씨의 보석을 허가했다. 다음 공판은 오는 7월19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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