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전후 한반도 주변정세
  • 정리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4.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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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세력 불균형이 기회

서진영 : 지난 1년간 핵문제로 말미암아 일탈되고 왜곡됐던 남북관계가 남북 정상회담 덕분에 다시 정상 궤도로 진입했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은 국면 전환의 의미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난 1년간 남북한과 미국의 세 정상이 핵문제를 가지고 씨름해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특히 미국의 처지에서는 핵협상 과정에 끼여들었던 중국과 러시아를 일거에 떨쳐버리고 대화의 도식을 남북한과 미국이라는 형태로 단순화했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결국 미국은 남북한 간의 대화를 중재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정치 영향력을 높이는 효과를 거두게 된 것이지요.

조순승 : 현재 국면에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당분간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은 확실합니다. 며칠 전 게오르기 쿠나제 주한 러시아대사를 만났더니 남북한이 정상회담을 하는 상황에서는 러시아가 주창한 8자 회담은 끼여들 틈이 없다고 실토하더군요. 그러나 정상회담이 실패할 경우 다시 개입하려 들 것입니다.

남북 기본합의서만 잘 지켜도 충분
이장희 : 정상회담을 계기로 몇 가지 짚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 사회의 대북 인식 문제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전쟁을 겪은 탓도 있겠지만, 북한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언론이 이를 부채질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앞으로 북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언론 매체들도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 · 서독 정상회담에서 이런 일이 었었습니다. 동독 총리가 서독을 방문하기에 앞서 서독의 국내법 중 동독인을 범죄시하고 차별 대우하는 법률을 먼저 고치도록 요구해 서독에서 관련 법률을 폐기한 적이 있습니다. 남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서로를 적대시하는 법률부터 폐기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조 : 핵문제를 이번 정상회담의 주의제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핵문제는 미국과 북한 간의 3단계 회담에서 다루도록 해야 합니다. 정상회담에서 핵문제를 집중 거론하면 회담 자체가 깨질 우려가 있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70년 초 동 · 서독 정상회담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과 북한이 절대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부전선언 같은 것에 합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조약을 맺을 필요도 없습니다. 91년에 남북한이 합의한 기본합의서만 잘 지켜도 되는 것입니다. 기본합의서를 실행에 옮기겠다는 양 정상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 저도 동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기본합의서에 대해 북한은 이미 최고인민회의의 비준을 거친 상태인데 우리는 국회비준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현재 법적인 성격이 모호한 상태인데, 하루빨리 국회가 비준해 법적 구속력을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핵문제에 대해서는, 완전 해결은 어렵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즉 일거에 해결하겠다기보다는 더 위험해지지 않도록 관리해 나가겠다는 방향으로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 : 이번 정상회담은 구체적인 이슈를 합의하는 것보다 처음으로 두 사람이 제3자를 통하지 않고 대면해 서로의 생각을 솔직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리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동안의 오해가 풀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될 것입니다.

조 : 저도 동감입니다. 69년 닉슨 대통령과 모택동 주석이 처음으로 미 · 중 정상회담을 했을 때도 서로 뚜렷이 합의본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둘이 만나서 한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즉 미국의 입장은 이렇다, 그리고 중국의 입장은 이렇다를 서로 확인한 것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역사적인 상해 공동선언이 나와 미 · 중은 밀월 관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서 : 당시 주은래 총리는 와병중이었습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지요. 그가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죽기 전에 키신저 장관과 미 · 중 관계의 기본 줄기를 잡아놓았으면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은래와 키신저가 한밤중까지 토론을 벌여가며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다소 낭만적인 생각일지 모르나,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김일성 주석 처지에서도 자신의 나이, 후계 문제, 세상 돌아가는 형편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두 정상이 만나 인간적 고뇌뿐 아니라 속 깊은 얘기까지 서로 나눌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일성 주석의 성품으로 보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진전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  70년 3월19일과 5월22일에 있었던 동 · 서독 간의 1, 2차 정상회담에서도 동 · 서독이 얻은 것은 상대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언제든지 두 정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해 70년 6월15일부터 동 · 서독 기본조약을 위한 실무협상에 들어간 것도 성과 중의 하나겠지요.

서 : 조의원께 묻고 싶습니다. 지난 1년 간의 핵 사태를 겪으면서 느낀 것은 핵문제뿐 아니라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매우 유동적이라는 것입니다. 핵문제의 경우, 미국이 아시아에서 어느 정도로 정치 · 군사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타당한지 합의한 것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온건으로, 때로는 강경으로 요동쳐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 :  핵문제와 관련해 말씀드리자면, 현재와 같은 국면이 나타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짚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냉전 이후 미국 외교 정책의 최대 목표는 바로 핵확산방지조약(NPT) 체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년 4월이면 재협상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6개월 전인 올해 10월까지는 모든 국가가 이 조약에 가입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11월에 미국에 중간선거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선거는 클린턴의 재선 여부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선거입니다. 현재 하원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의석 차이가 43석 정도인데, 통상 중간선거에서 여당이 야당에게 40여석 정도를 내줬다는 점을 감안하며, 핵문제로 혼미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선거를 치를 경우 결과는 뻔합니다. 그렇다고 과거 정권이 그레나다나 이라크에 대해 했던 것처럼 북한과 국지전을 벌여 단기에 승리를 거둘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따라서 미국은 단기적으로 국제 사회의 압력 수위를 높여 북한이 먼저 손들고 나오기를 원했던 것인데, 중국과 러시아가 개입하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리게 됐던 것이지요.

이 : 핵문제가 해결되면 아시아에서 북한의 위상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고, 미국으로서도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커진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핵확산방지조약 체제 유지라는 목적도 있지만, 북한과의 물밑 대화를 통해 과거에 일본이 했던 것처럼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펼쳐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입지를 세우려고 할 것으로 보입니다.

서 : 탈냉전 시대에도 미국의 아시아 전략 주축은 여전히 미 · 일안보동맹 체제였습니다. 즉 미 · 일 관계를 주축으로 아시아를 주도해 나간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최근 2~3년 사이에 미 · 일 관계에 돌출적인 사건들이 계속 발생해왔습니다. 무역 마찰은 늘 있어 왔던 것이지만, 사회당 정권까지 등장한 상태에서 과거처럼 미 · 일 관계를 주축으로 주도권을 추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 셈이지요. 따라서 미국도 아시아 정책을 현실에 맞게끔 조정하는 것이 불가피해진 상황입니다. 중국에 대해 인권 문제를 거론하기보다는 최혜국 대우를 무조건 연장해 준다든가, 북한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강경책보다는 북한을 새로운 질서에 끌어들이는 식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미국이 중재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국면을 전환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것입니다.

내부의 이념 갈등 극복이 중요한 과제
이 : 지금부터 한반도 정세는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봐야 합니다. 북한의 급격한 변화도 예상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통일 외교라는 차원에서 우리가 주변 4강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전 동독 총리인 메지에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어떤 기자가 동독이 서독과의 통일 협정에 너무 서둘러 도장을 찍은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메지에르 얘기가, 자기들도 단계적으로 하려고 했으나,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의 충고를 듣고 서두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셰바르드나제의 얘기인즉, 소련이 15개 공화국으로 분열되고 나면, 그전에는 도장을 하나만 받으면 될 것을 이제는 15개를 받아야 할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우리 문제와 관련해서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지금 전문가들 사이에는 등소평 사후에 중국이 7~8개의 성으로 분열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등소평이 살아 있을 때, 즉 도장을 하나만 받아도 될 때 통일 문제를 마무리짓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 : 저 역시 지금부터 3~4년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국제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스템이 자리를 잡는데 보통 15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기존의 국제 체제가 무너진 이후 현재는 매우 유동적인 상황입니다. 동북아에서도 중국 · 러시아 · 일본 등이 모두 내부 진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대외 문제에 크게 힘을 쏟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3~4년 지나면, 15년 주기를 보여온 유동적인 과정이 끝나고 극동에서 강대국 간에 세력 균형이 다시 굳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면 강대국은 현상유지 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이 국제 사회에 있어온 불문율입니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은 우리 민족이 앞으로 통일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와 관련해 어쩌면 우리 세대에서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서 :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미 · 일 관계가 흔들릴수록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 미 관계가 예전에 비해 더욱 밀착된다는 것은, 남북관계에서 볼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가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측면은, 앞으로 남북한 문제에서 우리가 더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북한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군 통수권 이양 문제 등을 더 유리한 처지에서 미국과 협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미국이 더욱 깊숙이 개입하려 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남북 관계에서 우리의 자율성이 그만큼 줄어들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난 45~48년에는 주변 국가들이 매우 유동적인 상황이었는데도, 우리 내부가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인해 혼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분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내부의 이념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 과제는 결국 한반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태까지 교류 협력이 되면 남북 관계는 잘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치 · 군사적인 신뢰 구축이 안되면 남북한 정상이 만난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남북한 양측만으로 이 문제가 잘 안풀려 국제회의로 간다면, 그러기 전에 한국은 미국을 보증인으로 하고, 북한은 중국을 보증인으로 해서 신사협정 방식으로 문제를 푸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북한을 포함해서 주변 국가 간의 느슨한 포럼이 만들어져 남북의 지도자가 자연스럽게 자주 만날 수 있다면 서로가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서 : 핵문제가 풀리면 곧 미국과 북한 간에 수교 문제가 대두할 것입니다. 미국과 북한이 수교하게 되면 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뒤를 잇게 될 것입니다. 이른바 남북한과 주변 4강 간의 교차승인이 완결되는 상황이 될 텐데, 국내 일부에서는 이에 대해 우려내지는 반발 심리같은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교차승인은 지난 70년대 중반 이래 한 · 미 · 일 3국 정부의 공개적인 정책이었습니다. 즉 70년대 중반 키신저 국무장관이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남북 대화, 교차 승인 등을 한반도 정책으로 제시한 이래 3국 정부가 이를 공식 지지해왔는데, 그동안 부분적으로만 실현돼온 것이지요. 이번에 완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 : 2년 전 평양에 갔을 때, 북한의 고위 관리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당신들은 왜 우리를 제치고 미국하고만 대화하려고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대답이, 우리도 한국이 잘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한국이 잘살게 된 이유는 외국 자본과 외국 기술을 끌어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도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게 일본 자본이다. 일본 자본을 끌어들이려면 먼저 미국과 수교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본 것이지요. 미국이 북한과 수교하면 일본과도 곧 수교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교차 승인이 우리에게 불리한 것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정신만 바짝 차린다면 민족에게 다행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낙관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비관적으로 생각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 : 북한이 일본과의 수교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쟁 배상금도 있지만, 일본 내에 있는 북한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더욱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는 재일교포나 조총련의 재산인데, 그 중에는 실질적으로 북한의 재산도 많이 있습니다. 일본은 과거 남북한과 등거리 외교를 하다가 최근에는 명백히 한국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일본이 재산 처분권을 계속 가로막고 있으면 북한으로서도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리 · 南文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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