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형제 이야기’ 책 낸 황혜당 스님
  • 전남 담양ㆍ조용준 기자 ()
  • 승인 1994.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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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보다 인간이 먼저죠”

4형제가 있었다. 황승우ㆍ황병우ㆍ황재우 그리고 막내 황광우. 장형 황승우는 광주 민주항쟁 대 공수특전단의 만행을 외신 기자들에게 통역한 유명한 영어교사였는데 마흔두 살에 늦깎이 스님 혜당(慧撞)이 되었다. 황병우. 그는 벽지만을 고집해서 찾아다니는 국민학교 교사로 정년 퇴임후에 조용한 산골에서 토종닭 몇 마리나 휘젓고 다니기를 원하는, 작은 꿈을 가진 사람이다. 황재우. 그는 72년 유신헌법 반대 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서울대 문리대에서 제적당하고 강제 징집되었다. 그는 ‘재우’를 ‘지우’로 바꾸고 유명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시인이 되었다. 막내 황광우. 그 역시 서울대 경제학과 시절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시위 주동자가 되어 결국 교도소를 끌려갔다. 그는 필명 정인, 조민우, 황인평이란 이름으로 한때 운동권 필독서였던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같은 책을 내놓았다.
 이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이야기가 장형 혜당 스님에 의해 최근 ≪스님!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하십니까?≫(거름)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혜당이란 법명은 어떤 뜻입니까?
 제 법사 스님이 태고종 종정을 지내신 안덕암 큰스님이셔요. 불교의 종지는 무지를 덜어내자는 거죠. 왜 무지를 덜어내야 하느냐. 인생 도가 무지에서 근원되는 것이잖아요. 인생 도를 벗자면 지혜를 계발해야 한다, 그래서 지혜를 닦아서 큰 덕을 이루라고 큰스님께서 그렇게 지어주셨어요.

조계종이 아닌 태고종을 택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불교를 서른세 살 때 만났었죠. 그 대 청담 스님께서 쓰신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마흔두 살에 어머님과 아내가 있는 몸으로 출가를 했지요. 조계종에서는 가족을 버려야 스님이 될 수 있어 그것이 저는 못마땅하거든요. 왜 가족을 버려야 합니까? 목적이 뭡니까? 불교의 목적이 가족을 버리자는 게 아니잖아요. 중생을 사랑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일진대, 가족이 그걸 방해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세속의 인연을 끊어야 더 정진할 수 있고 성불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적인 생각 아닙니까?
 초심 때는 일체의 인연과 끊어야죠. 그러나 어느 정도 공부가 읽혀지면 그런 것이 큰 문제가 안됩니다. 물론 불교만을 위한다면 가까운 혈연까지 끊어버리고 수행에 전념해야 한다 할 수 있지만, 저는 제가 스님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기를 원해요. 제가 아무리 큰스님이 된다 할지라도 불효자식이 되고 싶진 않아요. 제가 불효자식이 되어 큰스님이 되면 뭐하냐 이겁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인연을 맺은 아내, 또 한 탯줄에서 태어난 형제들을 버리고 나서 그 무엇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제가 그 무엇이 된다고 하면 그 동기는 가까이는 내 부모, 내 형제, 또 내 이웃, 내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어떤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지, 이것을 단절하는 내 인생의 목적이란 무의미해요. 단지 이 길이 제 삶의 의지처가 되고, 제 인생고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위안이 되기 때문에 택한 겁니다. 오히려 제가 과거처럼 먼 산에서 수도하다면 부모님 생각에 더 방해가 될 겁니다. 늙어가는 부모에 대한 걱정도 하지 말라는 불교가 있다면 저는 불교 안 택합니다.

어머님께서는 현재 금타선원(金陀禪院 : 혜당 스님의 거처)에 같이 계십니까?
 예. 현재 팔십이 가까우시죠. 두 동생 재우와 광우가 감옥에 끌려간 일이 있은 뒤로는 영 몸이 불편하십니다.

책에는 광주 민주항쟁이 출가의 직접적 이유로 나와 있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서른세 살 이후로 집에는 법당도 차리고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방학 때면 절에서 수도하는 데 갈등이 왔어요. 예비군 훈련이다, 일직이다, 숙직이다 해서 항상 수도에 목말랐습니다. 그러다가 5ㆍ18 광주 민주항쟁을 만나서 젊은 아이들 시체를 보아야 했다는 것에 대한 치욕을, 근원적인 육감으로 느꼈습니다.

형제들이 각기 뚜렷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스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동생 두 분이 그 어려운 환경에서 명문대에 갈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스님께서는 동생들에게 어떤 형이기를 원했고, 어떤 식으로 동생들을 깨우쳐 주셨습니까?
 실수도 많이 했어요. 그러나 바르게 살자, 빚지고 살지 말자,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살지 말자, 이렇게 한 길로 살아 왔어요. 제가 만일 한때나마 허랑방탕하게 살았더라면 동생들에게 카리스마적으로 비치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 모진 가난, 우리 집이 전라남도 빈민 실태조사의 샘플이었습니다. 그런 가난을 이겨내려면 정신없이 살아야 되겠지요. 또 가난을 물리치려면 배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독학하랴, 고학하랴, 또 가정을 일으키랴 그렇게 살았었죠. 형이 그렇게 사는 모습이 아우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겠죠. 그리고 아우들이 자랑스럽게 잘해줬어요. 특별히 나쁜 길로 가지 않고.

동생들 말씀 좀 해주시지요.
 바로 밑의 병우는 방송통신대학을 9년이나 다녔어요. 본인이 지적으로 어느 정도 배고픔을 채우고 나자 더 이상 하지 않고. 지우는 중ㆍ고등학교 때 그렇게도 미술을 잘 했어요. 그런데 고2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고 철학을 공부하더라구요. ≪학원≫지에서 시로 금상을 받아오기도 했죠. 지금은 조각한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자식이 없고, 지우가 저하고 열네 살 차이, 광우가 스무 살 차이이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보상을 동생들에게서 받거든요. 그런데 서울대 가려면 시 쓰고, 철학하고, 그림 그리면 안되잖아요.(웃음) 그래서 영어 수학 공부하라고 매를 때린 적이 있어요. 광우는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갔는데 명문 중의 명문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잉. 중고교 시절에 한 차례 전교 수석을 놓친 적이 없어요. 보통 소박한 시골에서 서울대 보내면 판ㆍ검사 되기를 원하고 서울법대 넣으려고 하죠. 저희 집도 예외는 아니었죠. 지우는 워낙 예술 쪽에 취미가 있으니깐 잘됐지만, 광우는 법대 가기를 원했어요. 광우는 광주일고 2학년 때 실장을 했는데, 유신반대 데모를 계획했다가 하지도 못하고 발각되어서 74년에 제적당했죠. 광우가 그 때 형무소에서 한달 만에 나오자마자 제가 종로학원으로 보냈습니다. 학원에 가더니 장학금을 받고 서울대를 들어가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데모를 주동하고…. 광우가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형님이 일평생을 한 가족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면, 저는 이웃을 위해서 살렵니다라고. 그래서 죽 노동운동을 했죠. 동생을 못봐서 애가 많이 탔습니다. 아우 얼굴이 역이나 시장 골목에 현상금이 걸려서 붙어 있고, 쫓겨다니는 걸 생각하면…, 어머님은 그 통에 그렇게 망가지시고…, 지난 총선에 민중당 후보로 공천받아서 광주 동구에서 출마했었죠. 금년 봄에 20년 만에 광주일고서 광우에게 졸업장을 주었어요.

여관으로 물건 팔러 다니는 등 고생고생해서 대학까지 넣었는데 데모만 하고 쫓겨다니니 아우들이 원망스럽지 않으셨습니까?
 시대 상황이 독재를 물리치고 순수한 민주 정부를 원했기 때문에, 형으로서 안됐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 아이들이 하는 일에 원망하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옳은 일에는 나서야죠. 그렇지 않고 판ㆍ검사되고, 영화를 누리고, 집안 일으키고 하는 것은 제가 원치 않습니다. 물론 방법상 문제 있어요. 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일시에 폭력으로 제거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그건 안됩니다.

형제들이 모두 모이는 일이 1년에 몇 차례나 됩니까?
 명절이나 아버님 제사 때 서너 차례 모이지요.

모이면 고스톱을 자주 치십니까?
 아우들이 저도 해야 한다고 해서 배워서 합니다. 그런데 제것을 다 따먹어요. 저를 골탕먹이면 그렇게 재미있나 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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