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도 ‘인종 내전’ 불길
  • 런던ㆍ한준엽 통신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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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대 유색인 대결서 소수인종간 충돌로 번져…영국판 LA 폭동 날 수도



인종간의 분규로 내전의 불길이 타오르는 유럽대륙, 그 와중에서 베트남 난민을 포함한 아시아계 인종과 루마니아 집시 등 이민족 거주자들을 겨냥해 자행되고 있는 반외국인 폭력사태는 바다건너 섬나라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2백70만 소수 유색인 거주자들에게도 이제 ‘바다건너 불구경’거리가 아니다.

8개월 전 부모와 함께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24세의 청년 룰라 아르메시는 지난 8월 초 자기 여동생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처녀들을 동네 길가에서 희롱·야유하는 5명의 영국 젊은이들을 저지하려다가 이들이 휘두르는 흉기에 머리를 맞아 현장에서 숨졌다. 이들 백인 불량배는 경찰에 체포됐지만, 이들이 아르메시 군을 구타하면서 퍼부은 욕설은 파키스탄 인과 인도인 등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주민들을 모욕적으로 지칭한 것이어서, 그 이후 아시아계 소수인종 사회의 충격과 우려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에 앞서 지난 3월에는 버스를 기다리던 아시아계 여인의 옷에 동네 백인 청소년들이 방화해서 심한 화상을 입혔다. 지난 7월 초에는 런던 북부지역에서 독일 극우파 청년처럼 머리카락을 밀어붙인 3명의 백인 스킨헤드족이 인도인 학생을 이유없이 집단구타하고 이를 말리던 두명의 인도계 아시아인의 상점을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킨헤드 족이나 백인 불량배의 유색인종 집단구타 사건, 폭력행위, 성적 희롱행위는 피해자들이 경찰은 백인 편이라고 믿어 신고를 꺼리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가 안나온다. 몇가지 사례는 피해자의 신고에 따라 언론이 특히 관심을 갖고 보도함으로써 일반에 공개됐지만, 인종차별 관련사건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고 묻혀버리기 일쑤다. 영국경시청이 피해자의 신고에 의해 공식집계한 인종차별 관련 폭력행위와 불법행위 발생 건수는 지난해의 경우 런던 지역이 3천3백73건으로, 전년도에 비해 16%나 증가했다.

지난 4월, 영국의 민간 인권 단체가 당국의 공식적인 집계와는 별도로 실시한 전국적인 조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잉글랜드와 웨일스 내에서 경찰에 신고된 건수는 지난 88년부터 90년까지 3년동안 총 6천5백여건으로, 연평균 34%씩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인권 단체는 특히,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건수는 신고 건수의 9배로 해마다 3만여건 이상의 각종 인종차별 관련사건이 영국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업률 증가로 긴장 더 고조될 듯

민간 인권단체나 소수인종 권익보호단체 관계자들은 이처럼 드러나지 않는 숫자가 바로 영국사회 깊숙이 잠재하고 있는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현재 계속되고 있는 국내 경기침체로 인한 실업률 증가 때문에 앞으로 백인 대 유색인종 간의 갈등과 긴장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같은 긴장과 갈등은 소수 유색인종이 백인 저소득층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런던의 중심가나 변두리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영국 인구 5천6백만명 가운데 유색인종을 포함한 소수인종은 인구의 5%에 달하는 2백70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저소득층 빈민계층이 집중되어 있는 런던의 토텐함이나 브릭스톤 지구 등 유색인종 집단거주 지역은 흑인을 포함한 인도, 파키스탄, 중동인의 숫자가 지역인구의 2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2백70만 소수 유색인종을 원래의 국적별로 보면 전체의 31%를 차지하는 인도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18%의 파키스탄인이다. 또 서인도제도의 흑인과 아프리카의 흑인이 각각 17.4%, 4.5%이고 중국인, 방글라데시인, 아랍인 등이 그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의 경우 91년 현재 영주 교민의 수는 8백40명이나 주재원과 유학생 및 그 가족을 포함시킬 경우 한국인 체류·거주자 수는 4천5백여명에 이른다. 이들 한국인 거주자는 대부분 런던 서남쪽 교외에 위치한 윔블던, 뉴말덴, 킹스턴 지역에 살고 있다. 테니스의 고향 윔블던에서 시작되는 런던 서남부 교외 일대는 인근의 서리·서섹스·켄트주와 함께 일찍부터 런던 중심가를 벗어나 살고 있는 중산층의 거주지역으로서 흑인이나 인도·파키스탄인 등 빈민계층이 거의 발을 붙이지 못한 곳이다.

젊은이들 사이에도 인종차별주의 확산

소수 유색인종에 가해지고 있는 직접적인 차별행위는 먼저 ‘유색인종 혐오주의자’로 자처하는 극우파 집단 소속 젊은 불량배들의 폭력행사나 가게 및 주택파괴 행위로 나타난다. 이들의 배후에는 백인의 우월성을 맹신하는 호전적인 신나치계의 스킨헤드 집단, 그리고 극우단체인 영국 국민당, 국민전선, 영국 부흥운동 등이 자리잡고 있다. 아직도 계급사회의 잔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영국사회에서 극우파 단체들은 순수 백인으로서의 영국인 권익을 앞세우며, 교육 직업 세제 주택임대 사회보장 등 사회 각분야에서 유색인종의 권익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이들의 주장과 운동은 아직 영국사회에 전반적으로 침투하지 못하고 있지만, 대영제국의 옛 영광을 잊지 못한 채 영국인의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국수주의자들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내고 있다. 옥스포드대 교수출신의 전직 하원의원 이노크 파웰은 특히 대표적인 국수주의자로 꼽힌다. 그는, 유색인종의 영국 이민에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경우, 유색인종과 백인 간의 싸움으로 “마치 로마의 피가 티베르강에 넘쳐 흘렀듯이 피의 강물이 영국을 뒤덮을 것이다”고 극언한 바 있다. 파웰의 견해는 물론 영국내 소수 극우파 지식인들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지만, 인종주의를 앞세우고 있는 극우집단에 대한 지지율도 지난 79년 7%에서 3년후엔 14%로 증가했다. 이처럼 신세대의 외국인 차별성향도 점차 보편화하는 추세이다.

집권당인 보수당조차 그 강도만 다를 뿐 지난 13년 집권기간 동안 외국인 이민 정책에 이 극우 국수주의자들의 주장을 반영해온 것이 사실이다. 79년 총선거 당시 야당이던 보수당의 대처 당수는 BBC 텔레비전을 통한 선거유세에서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는 선거공약을 발표해 유색인종에 대한 백색 영국인의 우려와 반발을 부추김으로써 선거전 막바지에서 뒤져 있던 지지도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보수당의 장기집권은 계속되고 있다.

“영국인들은 현재 이나라가 외부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이질적인 문화에 오염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영국적인 특질은 민주주의 성립과 법치주의, 그리고 각 분야에 큰 공헌을 해왔다. 만일 이러한 특질이 다른 이질적인 것에 의하여 수렁에 잠길 우려가 있다면 영국인들은 이에 반발할 것이며, 외부로부터의 이민행렬에 적대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대처의 이같은 발언은 그후 보수당 정권이 취한 유색인종 이민제한 조치로 나타나 영국 식민지와 영연방에서 영국으로 오는 이민 숫자는 지난 70년대까지 한해 평균 4만명선에서 80년 이후 평균 2만명선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또 집권당의 소수민족 이민제한 조치속에 인종차별에 기인한 각종 분규와 충돌이 토텐함에서 장차 영국에서도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인종폭동 같은 대규모 유혈 소요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유색인종 출신의 그란트 의원은 하원에서의 발언을 통해 자신의 지역구 내 흑인 및 유색인종 젊은이 가운데 무려 60%가 실직상태임을 지적하면서 좌절과 불만 속에 빠져 있는 이 젊은이들이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16세기 중반 영국인들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흑인을 사냥하여 대영제국 식민지경영에 노예로 이용했다. 그 아프리카 흑인들이 4세기에 걸쳐 영국으로 이주, 정착했다. 특히 1950년대에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서인도 제도에서 끌어들인 흑인과 인도·파키스탄인이 이제는 백색 영국인에게 오히려 영국인의 문화적 우월성과 특성을 오염시키는 이단자로 낙인찍히고 있다. 그 때문에 2백70만 유색인들의 불만과 분노는 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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