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새댁들 ‘낯선’ 추석맞이
  • 글 김 훈 편집위원·사진 나명석 기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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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 吉林이나 遼寧에서 한국농촌으로 시집온 새댁들이 한국에서 첫 번째 추석을 맞이했다. 중국으로 이주한 선조들의 3세 혹은 4세인 이 새댁들에게 한국의 추석은 아직 낯설다. 연변에 민족적 정서와 풍속의 원형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리라는 낭만적 가설은 적어도 이 새댁들에게는 거의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이 자본주의의 사나운 팽창과정에서 잃어버리고 내버린 만큼, 그들도 사회주의체제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풍속과 정서의 많은 부분을 이미 잃어버렸음을 이들 새댁들의 신접살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신혼인 한국인 신랑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연변댁들의 좋은 점은“꾸밈이 없고, 쓸데없이 새침 떨지 않고, 붙임성이 좋으며 순박하고, 감정표현이 직선적이며 어려운 일에 몸을 사리지 않고 서슴없이 나서려는 태도”라고 한다.


중국말로 ‘수다’떠는 새댁들
색시를 구하기가 어렵던 한국의 농촌신랑에게 시집온 연변댁은 모두 15명이다. 이들은 경상남도 하동·거제·함안·의령·산청, 경상북도 문경·고령·영양·의성, 강원도 평창·횡성, 전라남도 영광 등지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도작농가가 가장 많고 산간농가나 축산농가도 있다. 그밖에 연변 새댁 2명이 새로 한국농촌으로 시집오기 위해 현지에서 수속을 마쳤으며 20여명의 새댁이 한국신랑과 결혼하기로 ‘언약’을 맺어놓고 있다. 가정복지연구회(회장 노승옥)가 주선하는 이 혼인은 모두 금년 안에 성사될 전망이다.

한국농촌으로 시집온 연변댁들 중에서 金玉芝씨(30·신랑 黃鎭華·경북 문경군 산북면 우곡리)와 金玉海씨(22·신랑 曺基範·경남 하동군 청암면 위태리)는 친자매이다. 또 鄭英玉씨(22·신랑 金月洙·강원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는 이 자매의 조카이다. 지난달 29일 경남 하동에서 결혼한 吳淑芬씨(23·신랑 李文玉·경남 하동군 횡천면 남산리)는 이 자매와 길림에서 앞뒷집에 살던 친구이다. 다른 새댁들은 한국에 시집와 서로 알게 되었는데, 서로 장거리전화를 걸어 중국말로 ‘수다’를 떤다고 한다.

하동의 젊은 농부 조기범씨(32)에게 시집온 김옥해씨는 길림성 농부의 딸이다. 길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신발공장에 다녔다. 경북 문경으로 시집온 언니 김옥지씨는 중학교를 마치고 식당에서 일하면서 미용·양복 재단·요리 등의 기술을 배웠다. 김씨 자매는 2남7년의 둘째달, 그리고 막내딸이다. 자매 결혼식 때는 큰오빠가 부모님을 대신해 두 여동생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

김씨 자매의 친정은 길림 근교에서 2백마지기의 나락농사를 지었다. 친정에서 농사를 거들 때는 허리를 펴면 지평선이 보였다. 정부에서 농지를 분배해주는데, 식구 수에 따라 땅을 떼어준다.  김씨 자매네 집안은 2남7녀임으로 할당된 농토가 넓다. 옥해씨는 시집온 마을에 대해 “온 마을의 논을 다 합쳐도 우리 친정집 논보다 작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시집온 후 국적 취득에 따른 법적 문제가 겨우 해결돼 지난 8월에는 주민등록증과 의료보험카드를 발급받았다. 중국 국적은 자동적으로 말소된다. 중국 국적이 지워지면 친정집 농토는 두사람 몫이 한꺼번에 줄어든다. 한국의 주민등록증을 받아쥐고 두 자매는 친정집 농토를 걱정하고 있다.

연변 새댁들은 한국농부의 아내로서, 그리고 전통적인 농촌가정의 며느리로서 처음 치르는 추석명절 앞에서 대체로 난감한 표정이다. 화장제도가 연변에 정착된 지 이미 20여년이 넘었기 때문에 이 새댁들은 전통적인 장례식이나 성묘를 직접 체험한 적이 없다. 부모님께 성묘나 혹은 장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자신들의 생애 속에서 체험한 내용은 별로 없다.

함안의 축산농부 金性萬씨(31·가야읍 혈곡리)에게 시집온 車梅花씨(21)는 혼인한지 한달 만에 시아버지상을 당했다. 가야읍 혈곡리는 김해 김씨의 수백년 世居之地이며 지금도 김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 마을에서 벌어진 전통장례는 온 마을의 공동행사였다. 만장을 앞세운 꽃가마는 3㎞나 운구되어 마을 앞 선산으로 향했다. 연변에서 온 새며느리 차씨는 “이런 장례식은 난생 처음 보았다. 무서워서 씨껍 먹었다”고 말했다. 상주인 신랑이 사흘 동안 빈소에서 철야하면서 문상객이 올 때마다 곡을 하는데, 며느리 차씨는 그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신랑이 자연스럽게 해내는 모습에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 연변에서도 장례 때 곡을 하지만 입관이나 하관처럼 울음이 자연히 나올 때만 곡을 하지, 손님이 올 때마다 곡을 하지는 않았다고 차씨는 밝혔다. 장례를 치른 후 추석이 다가오자 신랑 김씨는 아내를 데리고 벌초를 갔다. 새댁은 벌초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랑 김씨는 아내의 손에 낫을 쥐어 주며 벌초와 성묘의 의의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주검을 화장하는 풍속 속에서 자라난 아내는 그 의미를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고 신랑은 말했다.

전통 장례 처음 보고 “무서워 씨껍 먹었다”

한편 문경의 농부에게 시집온 김옥지씨는 결혼한 후 6개월 안에 세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김씨는 “그렇게 자주 돌아오는” 제사 때마다 온갖 제수를 새롭게 장만해야 하는 일에 크게 당황했다고 밝혔다. 길림성의 고향에서도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그 제사는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모셨다. 그리고 별세한 지 1년되는 해까지만 제사를 모시고 그 뒤로는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고 한다.

김씨는 연변댁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한국농촌을 읽어내는 눈도 다른 새댁들과 다르다. 김씨는 시집온 마을에서 며칠을 지낸 후 마을에 젊은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버려진 빈집들도 김씨의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집에는 안방 구들 틈에서 잡초가 올라와 새까만 염소들이 인간의 안방에까지 들어가 풀을 뜯고 있었다. 김씨는 그렇게 해서 한국농촌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된 셈이다.

김씨는 “시댁식구들에 대한 복잡한 호칭과 예의범절이 너무 까다로워 난감할 때가 많다”고 밝혔다. 시댁 어른들이 드나들 때마다 큰절을 해야 하는 풍속도 “아직은 힘들다”고 김씨는 말했다. 연변 고향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른들께 큰절을 올리지 않았고 눈으로 인사만 건네도 “결례‘가 아니었다고 한다. 또 연변에서는 시부모님 앞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도 ’무례한 태도‘로 야단맞지 않는데, 한국농촌에서는 시부모 앞에서 다리를 뻗거나 벌리고 앉을 수 없는 것도 김씨를 난감하게 한다. ”예절이 너무 까다롭고 번잡한 것이 아니냐“고 새댁은 기자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김씨는 화장을 지울 때 한국산 ‘화장지’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자신이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세상에 이토록 부드럽고 포근한 종이가 있을까. 그것이 김씨의 첫 놀라움이었다고 한다. 또 시집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 호마이카 밥상의 표면과 모서리가 그토록 깔끔하고 매끄러운 것을 보고도 김씨는 자신이 한국에 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런 부드러움과 깔끔함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그처럼 ‘필사적으로’ 일한다는 것도 김씨는 알게 되었다.

“시댁식구들 무던한 것 하나 보고 산다”

지금 김씨를 가장 당혹케 하는 것은 이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의 치열함이다. 김씨의 친정집은 논농사가 주업이었다. 시집온 문경군 산북면 우곡리의 신랑 황씨는 사과를 주작물로 하는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다. 연변에서는 소출을 국가가 관리하고 개인의 몫이 할당된다. “연변 사람들도 열심히 일하지만 이토록 숨막히게 하지는 않는다”고 김씨는 말했다. 추석 전에 아오리사과를 내다 팔아야 추석거리를 장만할 수 있다. 김씨는 남편 황씨를 따라서 한나절 동안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며 사과를 따다가 목병이 나 1주일 동안 침을 맞았다. 김씨는 “어쩌면 한국에서는 그토록 힘든 일을 그토록 부지런히 할 수가 있는가” 하며 혀를 내둘렀다. 또 연변에서는 오가마다 ?작물이 있어서 농부들은 과수면 과수, 나락이면 나락 한가지만을 중점적으로 경작하는데, 한국의 농가는 과수를 주종으로 하더라도 논도 있고 밭도 있고, 소 개 돼지 염소 닭을 함께 기르니 이 짐승들의 끼니를 챙겨주는 일만 해도 “엄청난 일”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것은 사람들인 것 같다. 그렇게 악착스레 일하는 남편이나 시아버지가 노동에 찌들지 않은 무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 무던한 것 하나 보고 산다”고 말했다.

함안의 새댁 차매화씨는 추석장을 보러 읍내 장에 나가는데, 아직은 혼자 장을 보러 가지 못하고 마을 아낙네들 틈에 끼여가거나 남편을 따라간다. 시장에서 이 연변댁을 혼란시키는 것은 “한국의 복잡다양한 도량형 단위”들이다. 연변에서는 모든 물건을 근으로 달아서 판다. 무 배추 쌀은 물론이고 술이나 간장 두부 된장 또는 밥까지도 근을 달아서 판다. 되나 말처럼 부피로 따지는 단위를 연변댁들은 알지 못한다. 두부 한 모는 몇근인지, 버섯 한 ‘웅큼’은 몇근인지, 김치 한 ‘보시기’, 맥주 한 ‘병’은 몇근인지  연변댁은 아직 알 수가 없다. 고추 한 ‘접’은 도대체 얼마큼이고 생선 한 ‘마리’는 왜 정확히 근수를 달아 값을 매기지 않는가. 시장에서 연변댁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단위를 모르니 돈을 셈하기가 겁나고, 더구나 이웃 아낙들이 넉살 좋은 입담으로 에누리를 할 때 연변댁은 기가 질린다. “혼자 시장에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이 새댁은 푸념한다. 차씨에게 추석은 송편이 아니라 월병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추석을 맞아 지리산에서 함안시장으로 쏟아져나오는 온갖 산나물과 제수거리 앞에서 평야 출신의 연변댁은 어리둥절하다.

차씨의 신랑 김성만씨는 진주 경상대 농대 원예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농사꾼이다. 반자동화된 분뇨처리 시설을 갖추고 돼지 5백마리를 기르는 한편으로 가용으로 작은 논밭을 경작한다. “농촌에서 일만 하다 보니 한국여성을 사귈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신랑 김씨는 말했다. 색시를 데리고 와 폐백 때 큰절하는 법부터 가르치고, 지금은 도량형을 가르치는 중이라고 한다. 김씨는 최근 소형 자가용을 구입했는데, 이것은 연변 새댁의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아내가 한국에는 으레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라고 말한다. 이 새댁도 한국인의 악착스런 노동 강도를 확인하고 대경 실색했다고 한다. 젊은 아내는 “한국에는 돈이 많이 굴러다닌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돈이 어떻게 해서 수중으로 들어오는 것인지에 관해서 명확한 인식이 아직은 없다”고 신랑 김씨는 말했다.

문화·풍속·언어차이 극복 빨라

연변댁들은 한국에는 기생집이나 룸살롱이 동네마다 있다는 소문을 듣고와서, 남편들이 술 한잔 먹고 좀 늦게 들어오면 “기생집에 다녀왔느냐”고 경계의 눈치를 보낸다고 신랑들은 밝혔다. 또 삶이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크게 차이가 나서 이것을 교정하지 않으면 2세 교육에 혼란이 있을 것이라고 김씨는 걱정한다. 연변의 새댁은 3·1절이나 광복절을 잘 모르고 6·25전쟁에 관해서도 인식이 다르다고 한다. 김씨는 “많은 문화·풍속·언어의 차이가 있지만 한 민족이기 때문에 매우 빨리 극복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추석을 치르고 나면 아내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아내의 순박한 성품은 둘도 없는 재산이다”라고 말했다.

하동군 청암면의 새신랑 조기범씨는 “연변새댁들이 서로 장거리전화를 걸어 중국말로 수다를 떠는 것은 한국의 시댁에서는 좀 거북한 일이다. 그러나 여자들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차츰 이것부터 고쳐나가야겠다”고 말했다. “한국이 중국하고 운동경기를 하면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중국이 이길 때 함성을 지른다. 이런 사소한 일도 쌓이면 좋지 않을 것이다.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치고 타협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새신랑은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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