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쯤 전주 교외에 새 미술관 차릴 계획
  • 김훈 편집위원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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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성과 상업성은 상극인가


전주 ‘온다라 미술관’ 5년 만에 폐관 … 이념성 대중성 함께 갖춘 새 미학 절실
 민족민중미술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전주 ‘온다라 미술관’(관장 金仁喆·36)이 지난 5년간 누적된 운영적자를 견디지 못해 8월 초 문을 닫았다. 온다라 미술관의 폐관은 민중주의 미술을 상업적 대중성 위에 정착시키는 일의 중요성과 그 어려움을 입증하는 사태라도 미술계는 지적하고 있다. 북한에 걸개그림을 보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한 민중화가 홍성담씨는 그 무렵 전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출감한 그는 민중주의 미술의 새로운 대중성을 건설해야 할 사명을 역설했다. 민중주의 미술은 이념적 지향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미학을 세워야 할 기로에 놓인 셈이다.

 전주 온다라 미술관은 지난 87년 개관 이래 서울의 ‘그림마당 민’과 더불어 미술운동 진영의 양대 거점으로서의 문화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90년에 대구의 ‘예술마당 솔’이 문을 열었다. 수묵산수화로 대표되는 전통 미의 식의 聖都인 전주에서 문을 연 온다라 미술관의 문화적 위상은 그만큼 전위적이고 선구적이었으며 모험적이기도 했다. 그 무렵 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내건 지방도시들의 그림가게들이 대체로 표구상이나 그림중개업의 수준에 있었고, 제법 큰 공간을 누리는 시설들 역시 계통없는 대관전을 중심으로 살림을 겨우 꾸려온 실정에 비하면, 민중미술운동을 표방한 온다라 미술관의 개관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름다움이란 관습적인 나른함이나 몽롱함과 무관하며, 구체적인 삶 속의 척도에 의해 창조되고 재단되어야 한다는 지향성이 그 미술관의 미학적 깃발이었다. 87년 10월에 신학철 초대전으로 개관한 온다라 미술관은 그후 황재형 이철수 류재수 김정헌 임옥상 이종구 이인철 박평인 나상옥 김경주 홍성담 이명복 등의 초대전 혹은 그룹전을 열었다.

 전시회는 75회에 달했다. 거기에 참가한 화가들은 모두 당대 민중미술운동의 가장 치열한 전위이거나 높은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는 화가들이었다. ‘온다라 미술관’은 전시회 말고도 80여평의 전시공간을 이용해서 문학 음악 영화 역사 미학에 관한 강연을 26회나 열었고 시민문화학교를 수시로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에서 가장 활기있는 종합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아갔다.

 지난 88년 5월 온다라 미술관이 서울의 그림마당 민과 함께 개최한 ‘한국의 민중판화전’은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전시회는 80년대 초부터 기세를 일으키기 시작한 민중판화의 다양한 양식과 성취를 종합했으며, 민중적 이념과 민중적 미학이 어떠한 관계에 놓여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투성과 낙천성, 강인성과 명랑성 등 다양한 지향점을 향해 펼쳐지는 민중판화의 모습이 이 전시회를 통해 드러났다.

 

 

 온다라 미술관은 그처럼 큰 문화적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그 운영은 전적으로 관장 김인철씨 개인의 부담이 되어 왔다. 여러 뜻 있는 화가들의 동지애적인 출품도 상업적 성공과는 연결되지 못했다. 매월 평균 2~3백만원의 운영적자가 누적되어 총 적자액이 2억에 달했다. 불도저대여업을 하던 관장 김씨는 사비로 그 결손을 메워왔다. 미술관 자체의 수입으로는 메울 도리가 없었다. 최근에는 임대료까지 오른 데다 다른 공간을 구할 도리도 없어서 관장 김씨는 폐관을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난 5년간 이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민중성과 시장성 사이에서 사투를 벌여온 김씨는 “이것이 실패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실패였다 하더라도 이것은 값진 도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정통문화의 중심부인 지방도시에서도 민중미술운동의 토양은 비옥하다는 것이었다. 전시회나 강연회때마다 보여준 시민들의 열기가 상업적 대중성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미술작품은 여전히 개인적 친분의 차원에서 거래되었고, 작가의 미학적 성취를 ‘구매’로써 보답하려는 고객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관장 김씨는 “그림을 팔기 위해서 무조건 상업성과 타협할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민중미술의 성취를 대중 속에 어떻게 뿌리내리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94년쯤에 전주 교외에 새 미술관을 차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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