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핵폭탄 제조기술 확보
  • 피터헤이즈(노 틸루스퍼시픽 연구소 대표) ()
  • 승인 1992.08.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터 헤이즈 박사 특별기고문 상 … 美 ‘포기 압력’ 속 기반 다져


 

 70년 당시 朴正熙 대통령은 한국의 무기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를 담당할 2개의 특별 실무팀을 구성했다. 당시 한국의 무기개발위원회는 핵무기개발 선택권을 검토한 결과를 박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한국이 핵무장의 길로 가야 한다고 건의했다. 박대통령은 71년 말 또는 72년 초 이같은 권고를 실천에 옮기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대통령이 이같은 결정을 내린 직접적 원인은 닉슨 대통령이 괌독트린을 실천하기 위해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켜 베트남에서 고전하는 미군을 지원토록 하겠다고 발표한 것과 관계가 있다. 닉슨의 결정은 당시 한국에 미2사단과 6백~7백개의 핵무기가 배치돼 있는 상황에서 내려졌다.

 68년부터 재처리능력 보유에 주력 74년 인도의 핵폭발실험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계획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미 한국은 72년 이래 프랑스 정부와 핵재처리 시설을 들여오기 위한 협상을 벌였고 이같은 사실을 미국도 알고 있었다.

 75년 6월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핵협력에 관한 내용이 공개되자 한국 정부는 핵관련 기술이 자원안보뿐 아니라 일본의 도카이 무라 재처리시설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국은 68년 이래 재처리 능력을 보유하고자 노력해왔지만 자원 안보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런던 핵공급국그룹 회의에서 여러 의문점이 제기된 후 프랑스 정부는 한국과 협상을 다시 벌여 앞으로 프랑스에서 공급되는 핵관련 장비를 20년 동안 복제할 수 없도록 했다. 이어 75년 9월22일 마침내 국제원자력기구(IAEA) · 프랑스 · 한국 등 3자간에 핵안전협정이 체결됐다. 이때쯤 미국 정부는 한국이 핵재처리계획에 뛰어든 동기가 플루토늄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데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75년 3월 미국은 한국 정부에 재처리계획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미국 회사로부터 들여올 예정인 한국의 원자로 2호 구입에 필요한 수출입은행의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 또한 미국은 프랑스 · 캐나다 · 벨기에 정부에 한국과의 재처리 협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의 키신저 장관은 박대통령에게 “만일 한국이 핵무기 개발계획을 강행 할 경우 대한 안보공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통고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이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카터 행정부 시절에도 한 · 미 양국은 핵문제를 가지고 티격태격했다. 한국의 관계와 학계는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계획과 핵무기 철거계획을 번복시키기 위해 “만일 미국이 예정대로 철수를 강행할 경우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쏟아냈다. 이런 가운데 대단히 영향력 있는 메시지가 78년 한 한국 장성으로부터 핵확산금지 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미 국무부 고위관리에게 전달됐다. 즉 미국이 핵무기 철수계획을 번복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조인을 늦출 것이라는 이 장성의 말은 국무부 관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주한미군의 핵무기가 지난 수십년 동안 북한에 대한 전쟁억지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한국 정부는 인식하고 있었다. 78년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의 철군계획을 번복한 후 한국은 탄도미사일 연구와 핵재처리 능력 확보를 동시에 추구했다. 이를테면 79년 한국은 W-38 핵탄두를 장착한 채 7천km 떨어진 목표물을 1마일 이내의 오차로 강타할 수 있는 ‘아틀라스 센토르‘ 대륙간 탄도탄의 구매하려 했다.

 한국은 탄도미사일 연구와 개발을 80년 자금부족으로 중단할 때까지 계속 추진했다. 84년 마침내 한국은 혼합산화연료를 생산하기 위해 캐나다 정부로부터 재처리기술을 도입하려 했다. 도입의 근거는 82년 시작된 캐나다 원자력공사측과 플루토늄 재순환에 대한 공동연구였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돼 이듬해 12월 양국은 핵관련 협정을 맺고 2단계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미국 정부는 캐나다에 한국에 대한 협조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이 합법적으로 원자력기술을 취득하려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한국은 이때부터 미국의 간섭을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한국의 원자력계획은 핵연료순환 체계의 설계 · 건설 · 가동작업에 필요한 모든 재화와 용역을 최대한 국산화한다는 데 기초하고 있다. 시행 초기에 한국은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85년 원자로 9호와 10호는 국산화율을 83%로 잡았지만 실제로는 28%에 머물렀다. 88년 들어 한국의 핵연료생산 자급률은 66%, 핵물질 생산율은 57%, 설계공학 자급률은 71%에 이르렀다. 또 자급도에서 원자로의 시스템분석은 70%, 건설설계는 75%, 가동방법은 1백%를 이뤄냈다. 한국전력 관계자들은 한국형 표준원자로 1호기와 2호기가 95년이나 96년 가동하면 설계는 79%, 부품은 72%의 자급도를 이룩할 것으로 본다.

 91년 현재 한국은 총 7.3기가와트의 원자력발전을 통해 해마다 핵분열 물질인 플루토늄239를 1.3t 추출할 수 있다. 2000년 발전총량이 10기가와트가 되면 해마다 3.5%씩 발전용량이 늘어나 매해 1.98t의 플루토늄239를 추출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은 이미 사용후 핵연료를 10t 정도 보유하고 있다. 2000년까지 플루토늄239를 재처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비축량은 24t으로 늘어난다. 핵무기 하나를 만드는 데 보통 15~23kg의 플루토늄239가 필요하다. 한국은 중성자반사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90년을 기준으로 해마다 60개에서 92개의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비율로 플루토늄을 축적하고 있다. 2000년까지 한국은 86개에서 1백32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갖게 될 것이다.

 한국은 자체적으로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90년까지만 해도 한국은 우라늄 농축업무를 미국과 프랑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지난 89년부터는 중국과 소련을 염두에 두고 공급다변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확인되지 않은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원자력 관계팀이 옛 소련 정부의 초청을 받아 그곳 핵산업의 상업적 용도를 평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 원자력팀은 한때 북한의 원자력 연구원들이 훈련받은 것으로 알려진, 모스크바 서쪽 1백km 지점에 있는 투부나핵연구소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팀의 일정 가운데는 우라늄농축과 재처리 과정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는 공장견학도 포함돼 있었다. 보고서에는 레이저를 사용해 우라늄 동위원소를 추출하는 방법에 대해 한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연구하는 방안도 제시돼 있다. 한국전력측과 소련의 테크스마브사 사이의 계약에 따라 앞으로 10년 동안 1천t의 농축우라늄을 공급하기로 한 가운데 첫회분 40t이 90년 11월 에어로플로트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농축 계획에 필수적인 레이저 분광기술을 장기적으로 개발하는 데 상당한 자원을 투자했다고 한다.

 85년 12월 한국핵연료주식회사는 대전에 연간 2백t의 경수로용 핵연료를 제조할 시설을 건설·운영할 수 있는 기술지원 계약을 콰프터크 유니언사와 맺었다. 86년 건설이 시작됐고 89년 9월부터 가동됐다. 첫 연료봉다발이 90년 2월 고리 경수로 2호기에 투입 됐다. 미확인 보도에 따르면 한국원자력연구소는 86년 중수로용 핵연료를 개발했으며, 87년 이후엔 월성 중수로 발전에 필요한 핵연료를 공급해왔다고 한다.

 지난 90년 한국은 프랑스의 신기술총연합회(SGTN)에 95년까지 3천t의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할 시설의 설계용역을 주었다. 95년까지 기존 원자로는 사용후핵연료 약 2천7백t을 축적하게 된다. 92년 1월 현대중공업은 미국의 태평양핵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국 내에서 태평양핵회사의 사용후핵연료 비축기술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91년 3월 한국과 옛 소련은 서울에서 회담을 갖고 양국이 공동으로 핵연구사업을 하는 문제와 체르노빌국제센터에 한국이 참여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며칠 후 한국의 한 무역회사와 옛 소련의 한 민간연구소는 옛 소련의 핵폐기물 저장기술을 한국 내로 들여올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핵연료》의 저자인 엔 맥클로린이 지난 90년 지적했듯이 한국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고자 하는 꿈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89년 10월 한국은 미국 · 캐나다와 3국 협정을 맺어 한국에서 공동처리업무를 실시하자는 요구를 비공식적으로 하기 시작했다(공동처리는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의 일환으로 플루토늄과 비핵분열 우라늄을 혼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제품은 혼합산화연료로 핵원자로에 투입된다).

 아주대가 한국의 장기 원자력계획에 관해 제출한 보고서는 기존의 경수로 및 중수로 원자로 외에 고속증식로를 건설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90년 8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마련한 장문의 핵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10년까지 1백50메가와트급 고속증식로를 독자적으로 건설해 2007년과 2016년 중에 상업화할 수 있는 플루토늄 재처리순환작업을 개발한다.

 

 중국 재처리공장 건설…한국 자극

 91년 11월27일 한국은 영국 정부와 계약을 맺고 영국의 핵연료사가 한국 핵산업의 연료순환업무를 맡아주도록 했다. 비록 국내에서 재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공약했지만 한국은 일본의 선례를 따라 재처리 업무를 해외에서 할 수도 있다.

 고속증식로가 꽤 비싼 것을 감안하면 혼합연료를 사용한 플루토늄 재순환에 대한 공동처리야말로 한국의 중단기적인(5년에서 10년을 말함) 핵확산문제와 관련돼 있다. 그 배경에는 고속증식로 연구의 일환으로 혼합산화연료를 6개의 경수로 원자로에 사용한 일본의 예를 본뜨고, 일본과 경쟁하려는 심리가 깔려있다. 2010년까지 일본은 플루토늄을 83t 생산해 그중 53t을 20년 동안 경수로용으로 재순환하고 나머지는 고속증식로용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난 양의 플루토늄을 축적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모호한 태도 때문에 남북한은 일본을 경계한다.

 87년 중국도 96년에 상업화할 것을 목표로 하루 1백kg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수 있는 시범공장을 지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국이 추진중인 핵연료공장의 냉각시험 시설도 한국 정부로 하여금 이 분야에 뛰어들도록 유도하고 있다. 오는 2000년까지 중국은 63.t의 상업용 플루토늄을 축적할 것으로 예상된다.

 86년 2월 한국 과학기술처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미국에서 들여온 3개의 기존 원자로를 대신해 90년까지 30메가와트급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금년 말 준공 예정인 이 ‘다목적 연구용 원자로’는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 쉽게 전용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85년 프랑스의 지원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 내에 설치된 ‘照射 후 시험시설’(PIE)도 이에 관계된 물리화학 기술 및 조작 기술을 모두 재처리 작업에 응용할 수 있어 미국의 특별 감시를 받고 있다.

 현재 보유한 핵기술 능력으로 볼 때 한국은 핵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산업적 기반과 기술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특히 발사수단은 다양하다. 위기가 생기면 우라늄235를 이용한 5백kg 이상의 기폭장치를 전진기지로 옮겨놓을 수 있다. 비상시에는 F-16 전투기에 장착해 공격할 수 있다. 우라늄235를 이용한 핵기폭장치는 주한미군이 한국군에 이양한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에 의해서도 운반 할 수 있다. 사정거리 1백40km의 이 미사일은  1kt의 W31 핵탄두를 발사 할 수 있다. 한국군은 78년 9월26일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개량해 시험발사했는데 사정거리가 종전의 1백50km에서 2백50km로 늘었다.

 개량형 나이키 허큘리스 1호는 1백~5백kg의 탄두를 발사할 수 있다. 한국은 95년까지 지상관측을 위한 소규모 로켓을 개발할 예정이다. 90년 2월에는 국산기술로 만든 지구관측위성을 93년 발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억1천6백만달러가 드는 이 사업에는 외국 기업들도 참여해 96년까지 로켓을 개발, 99년에는 무게 2백kg에서 4백kg의 위성을 쏘아올릴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만일 자체기술로 위성발사 로켓을 개발한다면, 이는 한국이 대륙간 탄도탄을 발사할 수 있는 기술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미국이 마련한 미사일 기술통제에 관한 협정을 우회해야만 한다. 이같은 평가가 옳다면 한국은 앞으로 5년 내에 핵무기를 제조해 실전배치할 수 있는 핵옵션을 갖게 된다.

 어느 한 국가가 핵기술을 보유하는 것이 반드시 핵무장으로 간다는 법은 없다. 기록을 보면 45년부터 82년 사이 “핵무장으로 갈 수 있는” 77개국 중 오직 20%만이 실행에 옮겼다. 그렇다고 핵능력이 핵확산과 무관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한국의 핵기술 능력은 다른 나라의 핵확산 성향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핵관련 정책결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