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존심’챙긴 집안 잔치
  • 베를린.김인겸(자유기고가) ()
  • 승인 1994.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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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영화제, ‘할리우드 견제' 욕심 앞서 이미지 퇴색…유럽 영화가 상 휩쓸어

 릴레함메르 겨울 올림픽이 열기를 내뿜는 동안 영화인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베를린 영화제가 2월10~27일 차가운 베를린 땅에 열풍을 몰아왔다. 수많은 거장과 스타들 그리고 52개국에서 몰려든 3천2백여 취재기자가 보도 경쟁을 벌인 제44회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장선우 감독의<화엄경>이 경쟁 부문에 진출하여 국내 영화인들을 설레게 했고, 30명이나 되는한국기자단이 등록하자 조직위원회 보도 담당자들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30개 작품이 소개된 경쟁부문(그 중22개 작품이 경쟁 대상이 되었다), 젊은 영화인들의 등용문인 포름부문, 세계 영화 시장에 초점을 맞춰 극영화를 소개하는 것이 목적인 파노라마부문(임권택감독의 <서편제>가 선보인 부문이다), 아동 영화 부문,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소피아 로렌의 베를린 영화로 짜여진 회상 영화 부문으로 나뉘어진 이 영화제는, 3분짜리 단편 영화에서부터 7시간30분에 달하는 장편 영화(헝가리<사탄의 텡고>)에 이르기까지 약 3백50편을 12일 동안 소개했다.

 베를린 영화제는 예술 영화의 경쟁장인 동시에 세계 영화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이다. 그래서인지 상픔을 많이 선보이고 싶어하는 운영위원회의 욕심 때문에 양적으로만 팽창해 버려 참가한 영화의 대부분이 기대치 이하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미국 영화 출품 제도적으로 제한
 지난해 10월 가트 협상에서 미국과의 영화 협상이 실패한 후 유럽 영화 정책 담당자들은 사양길에 접어든 유럽 영화 예술과 영화 시장의 활로를 찾기 위해 몸부림 치고있다. 그 한 예로 베를린 영화제 운영위원회는 영화제 준비 초기에 미국 영화의 출품에 제동을 가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즉 경쟁 부문 참가 작품의 60% 이상을 유럽 영화에 배정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그 결과 경쟁부문 소개작품 30편 중 21편이 유럽인이 제작한 작품이었다. 직선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영화제 행정가들의 미국에 대한 보복심리가 베를린 영화제를 유럽 영화제로 전락시킨 셈이다. 이는 또 베를린 영화제가 가졌던 종래의 신선한 매력, 즉 미지의 영화 세계를 여행 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 버렸다.

 철의 장막이 존재하던 시기까지 베를린 영화제는 동유럽 영화를 서방에 소개하는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구미의 상업주의 영화에 비해 높은 작품성을 지닌 동유럽 작품이 베를린 영화제의 중심이 되어온 것은 그 때문이다.

 독일 경제가 상승 기류를 타던 지난 51년 냉전의 유물인 분단 도시 베를린에서 독일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출발한 베를린 영화제는 서방 영화 예술인의 활동을 고무?자극하는 경쟁터이자 소련과 동유럽 영화인들의 서방 진출을 가능케 했던 창구이기도 했다. 70년대 폴란드 영화인의 지속적인 참여를 가능케 함으로써 서방의 자유 물결을 스크린을 통해 전달하게 한 베를린 영화제는, 폴란드 영화산업뿐만 아니라 폴란드 동맹주의자들의 기반인 시민의식 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바 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소련?중국 영화인들에게 파격적으로 상을 줌으로써 공산주의 체제하의 검열 정책에 묶여 위기 의식을 느끼고있던 영화인들을 국제무대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해왔다.

 베를린영화제는 수상기준을 순수영상 미학에 두고 있는 베니스?칸영화제와 달리 사실적이고 현실비판적이면서 실험적 영상미를 추구하는 작품을 선호한다. 올해 금곰상(최고상)을 수상한<아버지의 이름> 는 베를린 영화제의 이러한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감독인 짐 셰리던이 만든 이 정치범 영화는 74년 아일랜드 겔포드에서 발생한 선술집 족발사건에 대한 영국 경찰과 법조계의 불공정성을 드러낸 '겔포드법정추문'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다. 희생자 7명을 낸 폭발 사건 직후 영국 경찰은 아일랜드인 4명을 테러범으로 지목하여 체포?수사했고, 이들 모두는 법정에서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이들의 무죄가 밝혀진다. 경찰과 법정은 협박과 고문 끝에 강제 자백을 받아냈으며 무죄 증거조차 없애 버렸던 것이다. 아일랜드인에 대한 영국인의 편견과 증오 때문이었다 셰리던 감독은 이 법정 추문을 영상화하면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분쟁문제에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권력을 가진 합법 조직이 무력한 개인에게 가할수 있는 폭력을 몸서리가 칠 정도의 생생한 사실성을 가지고 그려 나갔다. 영화가 어느 만큼 폭로 예술이며 참여 예술일 수 있는지 보여준 것이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 테리 조지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로 올라 있다. 그는75년 무기 불법 소지라는 죄명으로 실형을 언도 받은 아일랜드인 6명의 체험을 읽으며 작품에생생한 사실성을 부여했다. 겔포드 법정 추문이 89년 영국과 아일랜드 사회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동안 영국 경찰은 당시의 고문 경찰들을 법정에 세웠으나 93년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으며, 이 사건과 관련하여 75년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폴 힐을, 벨파스트에서 영국군인을 살해했다는 죄명으로 지난 2월23일 다시 법정에 세웠다. 셰리던 감독은 금곰상을 수상한 이틀후 이 재판에 대항하여 더블린에서 데모 군중과 함께 영국대사관 앞에나섰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가 이룬 수확은 그의 정치적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할 것이고,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모을 것임에 틀림없다

<화엄경>과 <리틀 붓다>의 대결 눈길
 독일 언론과 심사위원 전원의 극찬을 받으며 특별 은곰상을 수상한 쿠바의<딸기와 초콜릿>에서도 베를린 영화제와 독일 영화인들의 정치 편향성을 살펴볼 수 있다. 카스트로 정권치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쿠바 예술인들의 자유와 관용에 대한 사랑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 이작품은, 서방 영화에 일대 반성을 촉구하고있다. 즉 막대한 제작비만이 명화의 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로 성공하기를 꿈꾸는 사회과학도이자 혁명가 데비드, 문화를 단지 쾌락과 출세의 도구로 생각하는 동성연애자 이에고, 일상의 분주함으로고독을 이기며 살아가는 여인 낸시. 이들의 삼각관계를 읽어 가는 <딸기와 초콜릿>)은 출연진의 꾸밈없는 연기로 1백10분 동안 관객을  사로잡았다.

 쿠바 영화계의 노장 토머스 쿠틸레츠 알레어와 후안 카를로스 타비오 감독은 지구 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쿠바의 거리 위에서 보여주었다. 만약 이 영화가 북한과 함께 현대사의 의붓자식인 쿠바인들의 작품이 아니었다해도 결과가 마찬가지였을까. 94년은 쿠바 예술인을 위한 갈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해인가 보다.   이탈리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3천5백만달러를 투입해 만든 <리틀붓다>는 베를린영화제 개막을 장식하는 간판 영화로 상영된 후 줄곧 영화평론가들 사이에 화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인의 눈으로 해석한 불교는 무엇인가. 결국 윤회사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발견, 화려한 원색 화면으로 장식한 석가의 일생이 인도식 서커스 화면으로 전락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청회색의 가라앉은 화면과 함께 불경의 진리를 현대화한 장선우 감독의<화엄경>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관객을 사로잡았다.<리틀붓다>가 제시한 서구의 불교적 의문에 대한 아시아의 해답이 바로<화엄경>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현지 평은 반드시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타게스 슈피겔》의 스테판 야콥스는<화엄경>의 줄거리를 묘사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지루한 영화임이 분명하다'. 되풀이되는 장면과 대사들, 드라마적 굴곡이 지나치게 무시된 각본으로 인해관람하기에 인내가 필요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베르톨루치 감독의 작품과 함께 경쟁 부문에 선발되었고 끊임없이 <리틀 붓다>와 비교가 된 것은 이 영화의 행운이었다.   11개 주요한 시상 부문 중 3개 부문만이 쿠바?미국(최우수 남우상)?한국에 돌아갔고 나머지는 모두 유럽 영화 차지였다. 베를린 영화제는 과연 유럽 영화제로 머물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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