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에 대한 ‘폭발적 거부’
  • 김주연 (문학평론가·속대 독문과 교수) ()
  • 승인 199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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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탄생 1백주년…세계 지식인들 재조명 바람



 독살인가 자살인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서 그는 그렇게 죽었다. 1940년 나치의 만행과 2차대전의 굉음이 세계를 여전히 뒤흔들어대고 있을 때였다. 그 전해에 그는 망명지 파리의 독일인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세상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레네산맥 한 끝자락에서 죽고 말았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49세의 이 죽음은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독일 비밀경찰이 그를 그곳까지 추적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곤 했던 브레히트는 이 소식을 접하고 울면서 시를 썼다. <많은 것을 아는자, 새로운 것을 쫓던 자 / 그 논쟁의 인물이 이렇게 나를 떠났다 / 발터 벤야민… / 앞날은 그렇게 어둠에 놓이고…>

 

‘아우라’ 통해 현대문명 선구적 비판

 폴트(Werner Fuld)에 따르면 벤야민의 언어는 어떤 체계에도 속하지 않는 철학적 언어이다. 그러므로 그의 언어는 난해하고 때론 시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언어로 조직된 그의 이론 역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벤야민은 다양하게 해석되어왔고, 벤야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놓고 60년대 이후 독일 지식인사회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 혹은 ‘비판이론’ 이론가, 혹은 우파 마르크시스트로 불리는 일련의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벤야민은 과연 누구인가. 그의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하여 세계 지식인 사회는 새삼 그 정체성에 흥미를 나타내고 있다.

 벤야민의 올바른 모습은 우선 유대교적 접근을 배제하고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아우라’(Aura)라는 그의 독특한 개념이 말해주듯이, 신성 분위기가 사라져가는 현대문명에 대한 깊은 우려와 비판을 담고 있는 그의 시선은 궁극적으로 유대교 신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시각이 이러한 주장의 바탕을 이룬다. “좋은 작가는 생각하는 것 이상 쓰지 않는다.…나쁜 작가는 생각을 많이 한다”는 그의 놀라운 직관적 통찰이 신비한 종교적 체험의 전통과 관계된다는 해석은 물리치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강하게 부인되지 않으면서도 그는 곧잘 마르크시즘적 해석의 중심부에 놓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생산자로서의 작가> 등과 같은 그의 글을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으로 보고, 이러한 시대의 문학 예술의 운명을 유물론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진단이 그것이다. 확실히 벤야민은 부르주아지 예술개념에 대립되는 새로운 예술개념, 테크너크랫이 지배하는 시대에 예술의 올바를 사회적 기능, 대중의 급격한 부상에 따른 예술가의 위치 변화 등과 같은 문제에 선구적인 관심을 보여오면서, 자본주의 문명을 회의하고 경원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그에 대한 마르크시즘적 해석이 전혀 잘못된 시각은 아니다.

 그러나 앞의 해석들과 달리 전통주의적 입장에서 벤야민을 바라보는 견해들도 만만치 않다. 흔히 그의 유일한 제자로 평가되는 아렌트(Hanna Arendt)는 이러한 견해의 완강한 지지자다. 아렌트는 벤야민의 신학적 세계관을 독일 낭만주의와 연관시키면서 칼 슈미트·하이데거·비트겐슈타인 등 보수적 지식인과 그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말하자면 벤야민은 전통의 세기말적 붕괴 위기, 문화와 정신에 대해 경멸적으로 도전하는 20세기 지적풍토에 맞서서 전통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행한 자유로운 지식인이라는 것이. 때론 종교적인, 때론 정치적인 분위기와 연결되는 느낌을 주는 그의 이론들도 결국 이러한 노력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정치화’ 현실에 대한 본능적·이성적 투신

 이러한 해석들과 더불어 간과되어서는 안될 부분은 아도르노가 벤야민을 수용한 것이다. 후학의 위치에 있지만 때론 벤야민을 능가하는 철학자·예술이론가로 평가되는 아도르노는 일찍 죽은 벤야민을 지식인 사회에 제대로 알려준 최고 인물이다. 1955년 이미 벤야민 선집 두 권을 펴낸 아도르노는 열정적으로 그를 소개했는데, 아도르노에 의해 파악된 그는 앞서 언급된 여러 해석이 종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학적 입장과 마르크시즘적인 입장이 모두 받아들여지면서 변증법으로 수용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벤야민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이유가 된다. 아도르노식의 해석에 대해서도 물론 이의는 있다. 그러나 이 종합 속에서 벤야민의 신비한 얼굴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벤야민은 1892년 6월1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에밀 벤야민이라는 부호 상인이었다. 그는 1912년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해 인문고교를 졸업하면서 베를린을 떠났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뮌헨, 그리고 스위스 베른 둥지로 다니면서 철학 심리학 독문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 뒤로 그는 또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정착해 살지 못했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베를린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을 못잊어했으며, 단순히 동경했다는 표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착잡한 감정을 그의 고향에 대해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몇편의 글을 통해 잘 드러난다. 가령 그는 <1900년경 베를린의 어린 시절>이라든지 <베를린 연대기>와 같은 글을 썼는데, 여기서 이미 秘敎的·교훈적인 분위기가 풍겨나온다. 자신의 아들을 염두에 두고 쓴 이글들에서 묘사된 그의 어린 시절은 이미 사실을 훨씬 넘어서는 秘義로 충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독일낭만주의 예술비평의 개념>이라는 것도 이같은 유·소년기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벤야민은 그의 관심이 예술이론과 언어철학을 통해 가장 깊이있게 촉발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문제가 정치화되어가는 시대적 현실에 대한 그의 본능적인, 그러면서도 가장 이성적인 투신이었던 것 같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그를 가리켜 천재라고 부른다. 벤야민의 출현은 예술과 정치 등 부질없는 이원론에 대한 폭발적인 거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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