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촌 쇼 13년 마감한 줄광대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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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김대균씨 “서커스는 이제 그만”…정통 판줄 복원 나서

지난 13년간 용인 민속촌의 벽공에다 외줄을 매고 ‘거미같이’ 왕래하던 줄광대 金大均씨(28)는 최근 민속촌의 양쪽 작수목을 거두고 이곳을 떠났다.

 77년 국민학교 3학년 때 이곳에서 스승을 만나 처음 줄타기를 배우고 15세에 정식 전수자가 되어 첫 공연을 한 이래 13년간 거의 매일 두 차례씩 줄을 타던 김씨는 민속촌 공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의 유일한 전수자인 김씨가 민속촌의 줄을 거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문화재 관련 학자들은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김대균씨를 유일한 제자로 삼아 가르치던 줄타기 예능보유자 김영철씨가 88년 타계한 이후 줄타기의 명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점은 자주 지적되어 왔다. 중요무형문화재 아흔네 종목 가운데 줄타기는 기예를 익히기가 가장 어렵고 고되며 몹시 위험해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얼음 지치듯이 미끌어져 나간다 해서 줄얼음타기라고도 부르는 줄타기 기술은 현재 모두 마흔다섯 가지가 전해진다. 살판이나 공중제비와 같은 고난도 기예술은 줄광대에게 부상을 속출시킬 뿐 아니라 때로 생명까지 넘본다. 김대균씨의 엉덩이와 동아줄이 언제나 피범벅이 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스승 김영철씨가 78년 장흥 공연에서 줄을 타다 낙상해 반신불수가 되는 모습을 지켜본 김씨가 공포감을 극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줄의 감각을 생생히 느끼기 위해 남들처럼 바지 속에 들보를 차지 않는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김씨가 거칠기 짝이 없은 삼줄을 적신 피는 한동안 민속촌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균씨가 민속촌의 줄을 거두기로 결심한 것은 그런 두려움이나 소외감 때문만은 아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생계비 명목으로 매월 지급하는 10만원과 민속촌 1년 계약금 9백만원도 맥빠지게 만들 만한 액수이지만 그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자괴감이다.

 관광지 손님을 대상으로 하는 민속촌 공연은 그에게 묘기 중심의 볼거리를 요구하게 되고, 그에 맞추다 보니 자신이 어느덧 서커스 단원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김씨는 “줄타기의 깊은 맛을 알리는 것을 포기한 내게도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지만, 서양식 아크로바틱이나 텔레비전용 묘기에 익숙한 뜨내기 관람객이 줄광대의 재담이나 판소리를 마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원래 줄타기란 줄광대가 줄 위에서 재담 · 소리 · 춤을 섞어가며 갖가지 곡예를 벌이는 놀음이다. 줄 아래에는 삼현육각의 잽이 6명이 반주와 추임새를 넣어주고 따로 어릿광대가 나와 줄광대와 함께 판을 엮어가도록 되어 있다. 민속촌에서 줄을 타기 시작한 이래 한번도 제대로 판줄을 놀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젊은 줄광대를 조금씩 위축시켜온 것이다.

 김영철씨와 함께 판줄 복원에 애쓴 것으로 알려진 李輔亨씨(문화재전문위원)는 “김영철씨로부터 기예를 완전히 익힌 김대균으로 하여금 판줄의 소리 · 재담 · 춤을 충분히 공연하게 하고, 어릿광대와 삼현육각을 양성해 판줄을 완전히 복원하는 일이야말로 절실하고도 시급한 일이다”라고 강조한다.

 이씨에 다르면, 조선조 말 판소리 명창으로 유명한 이날치는 원래 줄광대 출신이었다. 그러나 판소리 명창보다 더 높이 섬겨졌던 줄광대는 판놀음이 쇠하고 극장식 놀이로 대체되면서 급격히 사라져갔다. 판줄의 소리나 재담은 물론이고 줄타기의 절정이라 할 살판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 실정이다. 살판은 부채를 작수목에 끼워놓고 허튼타령 장단에 맞추어 몸을 솟구친 뒤 허공에서 재주를 넘어 줄 위에 엉덩방아를 찧는 기술로, 김대균은 이 살판까지 원형 그대로 전수받았다. 반신불수가 된 김영철씨가 죽기 직전까지 10년간 제자의 집에 살면서 정성껏 가르친 덕분이다.

12년 연상 부인 ‘예술가의 삶’ 이끌어내
 “어릿광대는 물론 소리나 재담도 없이 장고반주 하나에 얹혀 잔놀음이나 보여주는 내모습을 스승이 보시면 뭐라실까. 이런 자문을 하다 보면 식은 땀이 난다” 고 그는 말한다.

 김영철씨와 줄타기를 동문수학했던 이동안씨(중요무형문화재 79호 발탈 예능보유자)와 판소리 명창 성우향씨를 꾸준히 사사하는 것은 그러한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이다. 가는 손님들의 발길을 돌려 세우기 위해 공중에서 솟구치는 묘기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젖어버린 타성은 그런 과외 공부로 얼마간 회복되기도 했다.

 그러다 “당신은 서커스 단원이 아니라 예술가”라고 일깨워주는 사람을 만나면서 김씨는 ‘새로운 시작’을 단행했다. 줄타기의 긴장감을 화재로 삼아 개인전을 열기도 한 화가 심일란씨(40)가 그에게 관광지 공연과 타성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할 용기를 준 것이다.

 두 사람은 2월26일 심씨의 줄타기 그림 27점을 전시한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수원의 작은 지하실 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4월말 민속촌을 그만둔 김씨는 매일 새벽 근처 연습장으로 향한다.

  “나는 열일곱 걸음 길이밖에 안되는 동아줄에 평생을 건 광대”라고 말하는 김씨의 어조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가 삼현육각과 어릿광대를 거느리고 마흔 다섯 가지 기술을 모두 펼쳐보일 정통 판줄을 공연할 날이 언제쯤 찾아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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