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누더기’ 벗는 南阿共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1.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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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거주지법’등 악법 폐지…백인 기득권 재분배 둘러싸고 진통 겪을 듯

 84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육상경기에 영국선수로 출전했던 ‘맨발의 소녀’ 졸라 버드는 89년에 출간된 자서전《졸라》에서 출전자격을 얻기 위해 국적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영국으로 바꿨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조국 남아공화국이 인종차별국으로 낙인찍혀 출전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간 세계의 지탄을 받아온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최근 잇따른 개혁조처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6월5일 남아프리카 의회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와 관련, 남아 있는 마지막 세가지 법률 가운데 ‘집단거주지법’과 ‘토지법’ 폐지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이로써 인종별로 거주지를 분리하고 18%의 백인이 87%의 토지를 차지하도록 해준 법률이 사라졌다. 인종별로 따로 출생등록을 하도록 한 '인구등록법‘이 유일한 차별법으로 남게 됐으나 이 법마저 6월 안으로 폐지될 예정이어서 남아공화국의 각종 인종 차별 조처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원래 아파프트헤이트는 아프리칸스말(네덜란드 이민의 언어)로 ‘분리’ 혹은 ‘격리’를 의미한다.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케이프타운을 건설하면서 쏟아져 들어온 네덜란드 이민은 1910년 남아연방이 수립되면서 영국계 백인과 함께 배타적 백인 지배 사회를 세웠다. 백인의 60%가 네덜란드계 이민(아프리카너)인데, 이들은 ‘신의 참된 종복은 백인 기독교도‘라는 캘빈의 교리를 신봉하고 있고 이것이 바로 아파르트헤이트를 합리화시켜준 근거였다.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3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1단계는 국민당이 집권한 1948년부터 50년대말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 아프리카너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은 각종 법령과 무력으로 흑인 및 유색인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원시적이고 폭력적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를 확립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백인들의 선민의식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본격화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60년 3월 샤퍼빌 흑인구역에서 발생한 흑인 학살사건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유엔은 67년 남아공화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결의했고 1912년 창설된 아프리카민족회의(ANC)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흑인의 정치적 불만은 76년의 ‘소웨토 봉기’로 폭발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백인정부는 보다 세련되고 정치제도화된 차별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1983년 백인정부는 혼혈 유색인과 아시아계 주민의 독자적 의회구성을 골자로한 개헌안을 통과시켜 ‘3원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 체제는 흑인을 철저히 소외시킴으로서 국제적 비난과 흑인들의 반발만 불러일으켰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개헌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8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는 투투 주교는 “너무나 늦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조처라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85년 한 해에만 흑인시위대 8백50명이 희생됐다. 86년 6월 보타 정부는 反아파르트헤이트 흑인 봉기를 막기 위해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해야만 했다.

 89년 6월의 천안문사태와 동유럽 개혁의 물결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도 어김없이 밀려와 제 3기 변혁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89년 9월 총선을 앞두고 흑인들은 대대적인 불복종운동을 벌였다. 선거기간중 수십만의 흑인이 파업시위를 벌였고, 인종차별에 따른 이중적 공공투자, 각국의 경제제재, 과다한 군비 및 치안유지비 등은 경제를 형편없는 지경으로 몰아갔다.

 백인정부는 보다 근본적인 개혁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89년에 취임한 변호사 출신의 클레르크 대통령은 △인종차별 폐지 △흑인 참정권보장 등 획기적인 5개년 개혁구상(소위 ‘프레토리아스트로이카’)을 발표했다. 온건 현실주의자로 알려진 그는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델라를 석방하여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수십가지의 인종차별적 조처들을 하나 둘 없애는 한편 구미 각국을 방문하고 인접 흑인국에 유화적 태도를 보이는 등 클레르크 대통령은 고립에서 탈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난 6월5일의 악법폐지도 이러한 개혁조처의 일부이다.

 그러나 ‘클레르크-만델라 축’을 중심으로 한 개혁협상파의 앞길이 밝지만은 않다. 흑·백 대결과 보수·개혁 갈등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클레르크 고르바초프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보수당을 중심으로 80년대 초반부터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백인 강경보수파는 90년 5월 클레르크가 만델라와 협상을 시작하자 대규모 시위를 벌여 ‘협상중지’와 ‘백인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흥분한 시위대는 “클레르크와 만델라를 교수대로” “즉각적인 무장투쟁”들의 구호를 외쳤다.

부수파는 정계개편으로 반격 시도
 한편 협상이 진행됨에 따라 수십년간 한 솥밥을 먹으며 무장투쟁을 벌여온 아프리카 민족회의 내부의 노선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일부 소장 강경파는 만델라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남아공화국 12부족 가운데 최대 부족인 줄루족의 잉카타자유당(IFP)은 아프리카민족회의측과 흑인운동주도권을 둘러싸고 심각한 유혈 충돌을 일으켰다. 아프리카민족회의는 백인정부내 강경파가 자유당을 부추겨 ‘흑·흑대립’을 조장하고 흑·백협상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협상파가 흑백 강경파의 양면공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최근 보수파가 주도하는 국민당쪽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를 제외한 새로운 정계개편을 추진하고 있어 협상의 진전에 고무되어 있던 전세계인의 우려를 사고 있다. 국민당의 한 간부는 그 형태가 “국민당원과 백인 자유주의자 및 중도보수파, 혼혈유색인 및 아시아계, 잉카타자유당의 줄루족, 아파르트헤이트와 보수적 흑인교회를 존립근거로 삼고 있는 흠랜드(백인정부가 흑인에게 허용한 10곳의 자치구역)의 몇몇 지도자를 포괄하는 ‘기독교민주연합’이 될것”이라고 밝혔다. 현지의 분석가들은 국민당이 △다당제 실시 △시장경제 도입 △소수인종 보호 등의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상 공산당 및 흑인 노동조합과 연대하고 있는 아프리카민족회의에 대항하는 채비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클레르크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기보다는 ‘위장된 아파르트헤이트’와 ‘보수대연합’으로 백인의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프레토리아의 정치학자 윌리엄 클레인한스씨는 “아프리카민족회의를 뺀 정계개편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국민당이 구상하는 反아프리카민족회의전선은 오히려 강력한 무장투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정계개편안이 현실화될 경우 아파르크헤이트는 제4기 ‘반동의 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클레르크 정부의 개혁의지에 대한 의구심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는 클레르크 대통령의 개혁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이다. 미국은 레이건 정권 당시 對蘇 봉쇄기지이자 전략자원의 보고로서 남아공화국을 경제·군사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국내외 여론의 호된 질타에 밀려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85년 9년 경제제재를 단행했다.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던 각국은 최근 경제제재 조처를 재검토할 의사를 보여 클레르크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도 남아공화국이 인종차별을 철폐할 경우 오는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어쩌면 우리는 내년쯤 남아공화국 국기를 가슴에 달고 트랙을 달리는 졸라 버드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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