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붉은 武后 江靑의 ‘타도’역정
  • 안병찬 편집인 ()
  • 승인 1991.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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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감정 ‘양날’가진 모순의 삶 5월14일 목매 자살···극좌 혁명노선 잔영 사라져

 목을 매어 자살한 77세의 江靑. 고 毛擇東 당주석 미망인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이 여성의 죽음은 한 정치권력의 종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중국공산당의 노선투쟁으로 본다면 반수정주의·반실용주의 극좌파의 종말일 수도 있다. 모택동 혁명노선 잔영의 사라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있다. 모택동이 2만5천리 대장정끝에 연안에 근거지를 만들고 동굴생활을 하던 시절. 모택동이 매료되어 만난 여자, 여자다운 여자의 죽음.

 20년 전에 미국의 여류 역사학자 록산 위트케는 59세의 강청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그의 키는 165.1cm, 날씬한 데다 뼈가 가는 강청은 처진 어깨, 가는 허리로 부드럽고 우아하게 걸었다. 섬세한 두손은 옛시인들이 말한 섬섬옥수, 손끝은 가늘고 유려하게 움직였다.”

 젊은 시절의 강청은 한층 매력적이었다. 강청과 모택동의 나이 차이는 20년. 모택동이 50세. 강청이 30세 때인 1944년에 미국 기자 헤리슨 포먼은 ‘연안의 신비로운 혁명적 분위기’속에서 두사람을 함께 만난 후 다음과 같은 인상기를 썼다.

 “모택동은 가족과 측근보좌관들이 사는 여섯개 정도의 평범한 동굴이 죽 연이어진 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동굴정면, 울타리를 한 마당 입구에서 나를 맞았다. 그의 아름답고 젊은 아내가 함께 서 있었다. 그는 옛날의 ‘남빈’, 유명한 상해 여배우이며 아주 지성적인 여성이었다···.” 마침내 그러한 두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혁명도 아니고 노선투쟁도 아니다. 죽음이다.

 모택동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기는 75년 12월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대면하여 “나는 곧 상제를 만나러간다”고 말한 것을 들 수 있다. 모택동이 사망한 것은 76년 9월9일. 화국봉·등소평을 주축으로 한 당시의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위대한 영수 및 導師(안내자)’라는 공식칭호를 그에게 붙였다.

 모택동이 당으로부터 무산계급 혁명의 예언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파자, 그리고 10억 중국인의 상제로 묘사된 ‘위대한 안내자’로 불렸다면 강청은 현대의 武后, 20세기의 呂后라는 별명을 얻었다. 강청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통해 ‘상해파’를 기반으로 끝없이 추구한 극좌이데올로기와 정치권력이 일으킨 혼동과 타도의 공포 탓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강청도 죽음을 인정하는 말을 록산 위트케를 만나 얘기한 일이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는 탄생·늙음·질병·죽음의 법칙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정치적인 젊음은 오래 유지할 수 있으나 영원히 건강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난 지금 내가 늙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나서 강청은 曹操의 싯귀를 읊었다 한다.

 “거룩한 거북이가 아무리 장수한다 해도 언젠가는 죽어야 할 때가 오네. 안개를 타고 창공을 오르는 飛蛇도 마침내 먼지가 되고 말리라.”

 강청의 인생은 생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생존 싸움의 연속이었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먼저 강청 노선의 몰락, 정치적 죽음은 모택동의 몸이 식기 전에 찾아왔다. 모택동이 숨을 거둔 날로부터 27일 후인 76년 10월6일 밤, 강청은 중앙경위단 8341부대 병력에 의해 북경시내 자택에서 검거된다. 강청은 매일밤 침소를 옮기는 버릇이 있었는데 운명의 날 밤에는 白塔寺 근처 자택 소파 위에 잠옷 바람으로 누워 독서를 하고 있었다.

 8341부대 파견대가 방문을 두드리자 강청은 대수롭지 않게 “누구냐”고 묻고 책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았다. 파견대장이 “당 부주석겸 총리 화국봉의 명령으로 당신을 체포한다”고 말하자 강청은 소파에서 뛰어내려 큰 소리로 구원 청했다. 강청은 기절할 듯 마룻바닥에 뒹굴면서 울부짖었다. “주석(모택동)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너희들이 감히 나를 박해하기 시작하느냐.”

 4년4개월 뒤(81년 1월26일), 중국인민최고법원 특별재판부는 이른바 ‘임표·강청 반당 10악집단’의 반혁명죄를 단죄하고 강청에게 총살형보다 한 등급 낮은 2년간의 형집행유예 조건부 사형선고를 내렸다. 실용주의노선을 택한 등소평체제는 그 재판장면을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통한 텔레비전중계로 외부세계에 공개했다.

 암청색 모택동복에 안경을 쓰고 이어폰을 낀 강청은 공판도중에는 침착한 자세를 보였으나 35인 재판부가 판결을 내리자 분노에 입술을 떨며 피고석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혁명수행은 범죄가 아니다.”

 강청은 수갑이 채워져 법정 밖으로 끌려 나갈 때는 “혁명만세”를 절규했다.
 강청은 1914년 중국 산동성 제성현에서 굶기를 밥먹듯이 하는 빈한한 노동자(아버지는 목수였다)의 딸로 태어났다. 그 때문에 강청의 어린시절 회상은 무산계급 출신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열다섯살 때 산동성립 실험극원에 들어가 무대 수업을 한 것이 상해의 영화배우, 중공 최고의 영화심판관, 문화대혁명의 기수가 되는 데 주춧돌이 되었다.

 그뒤 강청은 청도대학 청강생이 되어 지적 지평을 점차 넓히고 좌익희극작가연맹에 가입한다. 그가 30년대에 중국 지식인들을 자석처럼 끌고 있던 문화의 중심지 상해로 간 것은 1931년. 그는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역을 맡으면서 일약 유명해졌고 그 때문에 국민당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그는 고골리의 <검찰관>, 찰스 디킨즈의 <二都夜話>에도 출연하며 스타덤에 오른다.

 여배우 강청이 1천5백㎞를 이동하여 연안에 들어간 것은 일본군에 의한 ‘노구교사건’이 일어난 1937년이다. 강청은 모택동이 ‘급진적 자산계급 민주주의자’로 인정한 작가 魯迅에 심취해 있었는데 연안에서도 ‘노신문학예술학원’의 서기로 일했다.

연안시절 모택동과 연애결혼
 연안에 들어가 젊은 조선인 공산혁명가 김산 일대기 《아리랑의 노래》를 쓴 님 웨일즈(에드거 스노의 첫 부인)는 연안의 모택동을 ‘중국의 아더와, 원탁의 주석’이라고 지칭했다. 그 중국의 아더왕은 상해의 여배우 ‘남빈’이 연안에 도착한 사실을 알고 스스로 찾아가 자기 강연회 입장권을 주었다 한다. 주석의 위엄에 놀란 강청은 한번 거절했으나 부끄러움을 이기고 표를 받아 강연을 들으러갔다.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당 간부들도 모르게 진행되었다. ‘모택동의 동지’들은 강청이 20년간 공사에 간여하지 못한다는 취지의 중앙위원회 조처를 마련하고서야 결혼에 동의했다고 한다. 1938년 두사람은 조용히 결혼했다.

 강청은 모택동의 네 번째 부인이다. 모택동의 혁명동지이기도 한 두 번째 부인 楊開慧는 호남성립 제1사범의 은사 楊昌濟의 딸로서 모택동이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일할 때 연애결혼(1920년)을 했다. 양개혜는 모택동이 井崗山에서 유격전을 벌일 때 長沙에 남아 공산주의 보급운동에 종사하다 국민당계 군벌에 잡혀 처형됐다. 양개혜와 결혼하기 전 모택동은 14세 때 부모의 강권으로 20세된 고향여자와 결혼한 이이 있었으나 살지는 않았다. 양개혜 다음 부인은 賀子貞인데 2만5천리 장정(1934~35년) 때 ‘모택동과 함께 도망행진’을 하다 정신병을 얻고 치료차 모스크바로 떠난 뒤 인연이 끊어졌다.

 물론 극좌파인 강청은 姓을 낭만적인 상상력이나 문학으로 미화하는 것은 ‘자산계급의 과오’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강청은 강렬한 감성, 비상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러한 그의 특질은 1966년 천하대란의 회오리를 몰아온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상해를 중심으로 발동되면서 극좌이데올로기와 당정치권력으로 집약되어 끊임없이 분출된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개시이래 강청을 중심으로 한 문혁파는 반혁명수정주의 투쟁을 세차례나 벌여 朱資派 분자들을 끝없이 ‘타도’한다.

 중국공산당은 노선투쟁을 할 때면 모자를 이용한다. 3面弘旗정책(1952~61년)을 거친 후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자 1962년에 모택동은 모자에 대해 거론했다. “확실히 개조한 右派분자들의 모자는 벗겨주라.”

 문화혁명을 일으키던 1966년에도 모택동은 확대중앙공작회의상의 講話에서 모자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남에게 함부로 모자를 씌우지 말라. 동지 중에는 항상 모자를 가지고 壓人하는 사람이 있어 하늘 가득히 모자만 날아다닌다. 남에게 말을 시킨다고 하늘이 무너져내리는가. 남의 입만 봉하다가는 저 스스로 무너지는 꼴을 면키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유소기를 둘러싼 당내 관료주의를 겨냥하고 문혁을 발동하려는 모택동식 신호였던 것이다.

 강청은 문예영역에서 모자를 가지고 싸웠다. 수정주의자에게 모자를 덮어씌우듯 허물을 뒤집어씌웠다. 그리하여 강청은 文化專制를 위해 ‘모자공사’를 운영하여 하늘 가득히 모자를 날렸다고 비판을 받게 된다.

 또 강청의 문혁파는 원앙새를 그리거나 고양이·선녀 따위를 그리는 것을 금했다. 山水의 풍치를 묘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림은 모두 ‘검은 그림’(黑山黑水)에 해당되었다. 오직 장려한 것은 ‘3돌출’의 혁명화.

 “인물들이 나오는 가운데 정면 인물을 돌출시켜라. 정면인물 중에는 영웅인물을, 영웅인물 가운데는 중요한 영웅인물을 돌출시켜야 한다”는 게 강청파의 3돌출 창작원칙이었다. 그리하여 강청의 혁명문화적 공세가 충만하던 1973~1974년을 통해 대량으로 등장한 것이 連環畵 (연속된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형식)라는 것이다. 그 소재는 모두가 사상교육과 혁명고취의 목표밑에 선택되었고 교조주의색채가 농후한 그림책으로 불렸다.

 그 때문에 등소평체제는 강청과 4인방의 流毒을 제거하는 노선투쟁을 당 역사상 열 한번째맞는 중대한 노선투쟁으로 꼽았다. 그 중에는 ‘손오공이 백골정을 세 번 물리친다’(孫悟空 三打 白骨精)는 《서유기》의 줄거리를 각색한 ‘影射攻擊’도 있다. 요괴 백골정은 당승을 잡아먹어 장생불로하려고 당승일행을 공격하나 그때마다 손오공의 영민한 눈에 적발돼 격퇴되어버린다. 이 줄거리에서 요사스러운 백골정은 강청이다.

 甲을 빌려 乙을 치는 노선투쟁의 방법이 ‘영사공격’이다. 손오공은 물론 공자 진시황 조조 무후 등 역사인물이 모두 영사공격의 화살이 된다. 강청의 문화비판조는 仁을 이상의 도덕으로 삼고 후세에 남녀 7세 부동석의 풍습까지 생기게 한 도덕가 공자가 실은 호색한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좋아한 모순덩어리
 강청은 또한 현대의 武后로 불리기도 한다. 20세기의 呂后로 불리기도 한다. 한고조가 죽은 뒤 15년간 정치를 전횡한 呂后, 당고종이 죽은후 스스로 제위에 올라 중국역사상 단 한사람의 女帝가 된 武后. 실제로 강청파는 武后에 대해 法家사상을 이어받아 중앙집권을 지킨 진보적 작용을 한 여류정치가로 평가하였고 武后에 대해서는 그가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土族地主집단에 철퇴를 가한 反儒색채의 여걸이라 칭송했다. 그 저의야말로 모택동의 임종과 때를 같이하여 정권을 차지하려는 정치적 위장술에 불과했다고 뒤에 강청은 비판받았다. 이런 주장은 모택동을 한고조 유방에, 강청을 여후에 비유한 대강청 영사반격이라 하겠다. 강청은 무산계급을 말하면서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한 모순 덩어리의 여성이기도 했다. 그는 스웨덴제 최고급 카메라인 하셀 브라드로 1년에 1만장이 넘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철저한 모택동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급진적 이념을 신봉하려했고 결국은 극좌문혁파가 되었는지 모른다.

 강청과 모택동. 두사람은 서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을까. 그들의 옛사랑에도 자석처럼 상대방을 끄는 ‘마력’이 있었을까. 혁명의 결단력과 로맨틱한 사랑 사이에서 두 사람은 어떤 희열과 갈등을 느끼며 괴로워 했을까. 모택동이 말년에 병상에 눕자 강청은 자꾸만 시달림을 주었다. 모택동은 이렇게 강청을 비판했다고 전해진다.

 “나를 보러오지도 마라. 마르크스·레닌의 저서도 나의 저서도 너는 읽지 않는다. 너는 大事는 토론하지 않고 잔일만 가지고 매일 찾아와 못살게 군다. 너는 단결하지 않고 분열을 일삼는다.”

 강청은 이념과 감정이라는 양날을 가진 칼처럼 모순과 갈등의 삶을 살고 운명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북경교외 秦城감옥에서 무기형을 살던 강청은 84년 5월 후두암으로 감금상태에서 풀려나 자택에 연금되어 있었으며 정신적·신체적 고통으로 지난 5월14일 목을 매어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모택동이 죽었을 때, 당중앙판공청 특별회계실에 보관된 《모택동선집》 저작원고료는 약 1백만元(중국인민幣)이었는데, 모택동은 이미 생전에 강청에게 3만元(약 5백20만원)의 유산을 나누어주었다고 전해진다(<中國新聞> 보도).

 세월은 유장하지만 생은 짧으니 강청의 죽음에 임해 지하의 모택동은 무슨 탄식을 했을까. “혁명은 죽었다. 혁명만세!(革命死了 革命萬歲)”의 여덟자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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