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과 배신’ 사이의 김지하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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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시국기고 ‘젊은 벗들…’ 파문 확대

 “오적의 김지하는 죽었습니다.” 시인 김지하씨가 지난 5월5일자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의 시국관련 기고를 발표하자 ‘평범한 한 사회인’은 〈한겨레신문〉(5월7일자)을 통해 위와 같이 반박하고 나섰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로 시작되는 ‘젊은 벗들!…’에서 김씨는, 현 시국이 민족이 패망하는 극한 상황은 아니라고 지적하고 “다만 뼈를 깎는 기다림과 겸허한 모색이 있을 뿐”이라고 진단하면서 시위학생들을 일방적으로 질타한 것이다. 강경대군 치사사건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잇따른 분신사태를 ‘젊은 벗들’ (운동권 학생들)의 분명한 잘못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김지하씨의 글이 발표되자 이 글은 문단과 대학가, 지식인 사회에 즉시 여러 겹의 파문을 그려나갔다.

 시인 김형수씨는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제하의〈한겨레신문〉(5월8일자) 기고에서 김지하씨의 글을 강하게 비판했다. 김씨는 “그는 지금 세상을 두 눈이 아닌 한 눈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가 민중의 편에서 권력의 편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고 강경대군의 누나 강선미씨도 같은 신문에서 김지하씨를 비난했다. 대학가에도 “저항시인 김지하, 마침내 민중에게 저항하다”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나붙었고 서울의 일부 서점은 “김지하씨의 책은 판매하지 않는다”고 써붙이기도 했다.

 이처럼 김지하씨의 ‘젊은 벗들!…’을 ‘배신’이나 ‘변절’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권력층과 일부 기성세대들 사이에서는 ‘김지하의 용기있는 소신’이라고 평가하고 나섰다. 노태우 대통령은 5월6일 청와대에서 20여개 신문·방송·통신사 사회부장과 오찬을 갖는 자리에서 김지하씨의 〈조선일보〉 기고가 “매우 돋보였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도됐으며, 윤형섭 교육부장관도 방송사의 한 토론에서 김지하씨의 글을 높이 평가했다. 김지하씨 기고 파문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서강대 박홍 총장의 ‘분신 배후세력 조종설’과 연세대 김동길 교수의 사직서 제출과 맞물리면서 이른바 ‘보수 대 혁신’ ‘민주 대 반민주’등 갈등구조의 첨예한 이슈로 떠올랐다.

 김씨의 기고 파문은 민족문학 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회장 고은)의 ‘김지하 회원 자격정지’결정으로 이어졌다. 작가회의는 5월9일 오후2시 임시 이사회의를 열고 작가회의 이사였던 김지하 회원의 자격정지를 결의했다. 작가회의는 “김지하 회원이 5월5일 〈조선일보〉에 기고 발표한 ‘젊은 벗들!…’이라는 제하의 글에 대한 토의 결과 본 회의 정관 제2조(목적)를 현저하게 위배하는 내용이었다”고 발표했다.

 작가회의측은 “김씨가 비록 개인적 입장에서 발표한 글이지만, 이 글이 발표된 이후 독자들로부터 많은 항의전화가 있었고 회원들 내부에서도 김씨의 글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 이사회의를 소집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자격정지 사실이 보도되자 김지하씨는 “작가회의에 가입한 사실이 없으므로 제명 결정은 나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고은씨는 “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때부터 김지하 구명운동이 있었고 출옥 후 ‘자실’ 주최 강연회에도 참석했으며 작가회의로 바뀐 뒤에도 행사에 참여했었다”면서 입회 사실을 부인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작가회의 회장 고은씨는 “김지하는 상식에 의해 살고 있는 사람이며, 이번 일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간 것 같다”면서 “그동안 그에 대한 일반의 허상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문단 일각에서는 김지하씨의 생명운동이나 최근의 고백운동에 대한 역기능을 비판하는 시각이 있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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