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소금 되어서는 안된다'
  • 고베.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3.09.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 산의 투쟁철학/"50년후 한민족 젊은이에 들려주려 집필 동의"님 웨일스 회고

 9월12일 오후 일본 고베시 학생청년센터, 한 꾸부정한 노인이 청중 백여명 앞에서 열변을 통하고 있었다. 강연 제목은 '나의 항일 운동'. 일본간사이(關西) 지방의 조선근대사 연구 모임인 '무궁화회'가 여비를 모아 연변에서 불러온 이 노인의 이름은 ?東浩다.

 '유등'이란 그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종군할 때부터 사용해 온 가명이다. 장지락이 김 산을 비롯해 열 개 가량의 가명을 사용했던 것처럼 그도 자신과 가족의 보신을 위해 본명이 '유동호'라는 사실을 감춰왔다.

 유동호씨가 무궁화회의 초청을 받아 세시간에 걸쳐 열변을 토하게 된 것은 바로 《아리랑》이 맺어준 인연이었다. 유동호씨는 21년 개성에서 태어나 17세 때 일제의 압박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고베 강연후 기자와 만난 유동호씨는 "내가 만약 북한으로 건너갔으면 장지락 선배와 똑같은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장지락은 두 번 체포되어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았으나 모두 무죄방면되었다. 그는 이 때문에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38년 중국 공산당 보안책임자 康生의 지시로 처형되었다. 처형 방법은 총살형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후 북한 갔어도 비극적 최후"
 역사에 가정이 통할 수는 없지만, 장지락이 만약 그때 처형되지 않고 광복후 북한으로 건너갔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유동호씨는 "일본군 첩자나 연안파로 몰려 비국적인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유동호씨는 44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연안의 조선연안군정학교 제4구대 11분대 생도였다. 바로 장지락이 물리.수학.일본어.조선어를 가르쳤다는 항일 군정학교의 후신이다. 그 시절 교관 중의 한사람이 徐 輝였다.

 서 휘는 장지락과 님 웨일스가 《아리랑》의 구술과 필기 작업을 하던 거처에 몇차례 장지락을 따라갔던 바로 '李'라는 청년이다. 그때는 이 휘 또는 이서휘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21쪽 참조).

 조선의용군 제3지대 2대대장으로 중국 동북 해방전쟁에 참가한 유동호씨는 내전이 끝난 후 귀국을 단념하고 길림성의 한 펄프공장에 근무하다가 82년 연길시 문화국 문예창 작평론실로 직장을 옮겼다.

 그러던 어느날, 유동호씨의 기억에 따르면 84년께 일본어판 《아리랑》을 우연히 손에 넣었다. 미스즈 書房이 65년에 출판한 《アリランの歌》라는 책이었는데, 연변의 역사연구소가 그 책을 복사해두고 있었다. 유동호씨는"복사판이라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문을 읽어내려가면서 천하에 조선 사람 중에 이런 위인이 있었는가 하고 깜짝 놀랐다"라고 그때의 충격을 회상했다.

 유동호시의 추적에 따르면, 이 일본어판이 연변에 들어온 것은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 무렵이다.

 장지락은 《아리랑》에서, 만주로 건너가 자신의 소설 《백의동포의 영상(白衣 同胞的影子)》의 마지막 장을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소설이 어떤 내용인가는 님 웨일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재일교포 작가 李恢成씨는 87년 여름 님 웨일스를 처음으로 찾아가 이 부분을 자세하게 물었다. 님 웨일스의 대답은 "의열단원 吳成崙이나 朴형제에 대해서가 아니었을까"라는 것이었다.

김 산 사진 65년 처음 공개돼
 朴형제는 함경도 출신 독립운동가 5형제로서 장지락이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다. 그 중 3남 박 진(본명 朴根万)이 중국 廣州의 농민폭동에서 전사했는데, 그의 하나 뿐인 혈육 朴英逸은 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했다. 광복후 그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사〉기자로 근무하다 얼마전 사망했다.

 유동호씨에 따르면, 그 박영일씨가 연변에 있는 사촌형제 박기권씨(전 연변 사범학교 미술교사)에게 "이 책에 의하면 부모님의 사적이 그곳에 있으니 잘 찾아보라"는 당부와 함께 일본어판을 보내줬다고 한다. 책을 읽은 박기권씨는 주위 친구들에게 다시 이 책을 빌려주었고, 이 소식이 연변의 역사연구소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란 거센 파동에 밀려 이 민족의 대서사시에 대한 감동은 더 이상 연변의 교포 사회에 확산되지 못했다.

 연변의 교포 사회에 잠시 큰 충격을 던진 일본어판 《아리랑》은 일본에서 출판된 《아리랑》관련 서적 중 최초의 서적은 아니다. 휴전 바로 직후인 53년 10월 아사히 書房에서 나온 《アリランの唄》가 바로 그 효시다.

 이 책의 번역자는 가나자와 대학의 안도 지로(安朦次郞) 교수. 41년 존 데이사가 처음 출판한 《Song Of Ariran》을 차고로 했다. 이 책은 장지락과 20여 회에 걸친 인터부를 끝낸 님 웨일스가 2년 후인 39년 필리핀의 바기오 섬에서 탈고했다.

 남 캐리포니아 대학의 조지 토튼 교수는, 이 책을 44년에 처음 읽고 크게 감명 받아 동남아시아 전선에 출정한 뒤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토튼 교수는 이 책과의 인연으로 동양사를 전공하게 되었고, 72년 님 웨일스가 추가 수정한 개정판(샌프란시스코의 Ramparts Press 간)의 주석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 그후 장지락의아들 高永光씨와 두 번이나 만나 '아리랑의 그후'를 추적해 왔다.

 한편 님 웨일스는 개정판이 나오기 10여년전 《한국과 김 산에 관한 각서(Notes on Korea and the Life of Kim San》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타이프는 인쇄로 된 이 노트는 김 산의 본명이 장지락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히고, 공표하지 않는다는 약속 아래 그의 tkwlsRK지 촬영해 두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오랫동안 님 웨일스의서고에서 자고 있던이 사진이 처음으로 공표된 것은 65년 일본의 미스즈 書房이 《アリランの歌》를 발간한 때였다. 이 책은 53년에 나온 첫판의 개정판에 해당하는데, 번역은 역시 안도 교수가 맡았다. 78년까지 14판을 찍었으나 그후 이 책은 87년에 이와나미(岩波) 서점에서 나온《アリランの歌》로 이어진다.

 한편 이 때를 전후해 홍콩에서는 해적판 《Song Of Ariran》이 출간되었다.《시사저널》안병찬 주간(당시 〈한국일보〉기자로 홍콩 대학에서 연수중)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 어판이 처음 출판된 것은 77년 4월. 南?(난웨)출판사가 발간했는데 영문 원제와 김산.님 웨일스 공저자는 똑같았으나 중국어 부제가 '중국혁명 대오 속에서(在中國革命隊伍?)'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리랑》이 이런 복원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는 정작 장지락의 유자 고영광은 부친이 기록해 온 민족의 노래를 들어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부친이 조선의 위대한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고영광씨가 처음 안 것은 대학생 무렵, 연안에서 처형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된다.

 부친의 명예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어느날 고영광씨는 한 연변 동포의 방문을 받는다. 고영광씨의 기억은 81년인가 82년인가 확실치 않지만 金이라는 요령민족출판사의 여성 편집자였다(앞서의 유동호씨는 이 여성이 金 揚이라는 56세의 동포라고 증언하고, 현재 그 출판사를 퇴직하고 《중국조선족 여걸집》을 집필중이라고 한다).

 이 여성 편집자는 고영광씨에게 앞서의 일본어판과 중국어판 《아리랑》을 보여주면서, 님 웨일스로부터 온 편지도 함께 건네줬다. 님 웨일스로부터 온 편지도 함께 건네줬다. 문화대혁명의 반동으로 그동안 주춤했던 연변의 교포 사회가, 홍콩에서 중국어판 《아리랑》이 발행된 것을 계기로 다시 열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연변의 역사연구소는 중국어판 《아리랑》을 입수해, 이를 동포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글 번역에 착수했다. 그러나 서문을 번역하는 단계에서 김 산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젝됐다. 물론 님 웨일스가 61년에 집필한 각서에서 김 산의 본명이 장지락이라고 밝힌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사연구소는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81년 직접 님 웨일스에게 편지를 띄웠다. 이를 계기로 고영광씨도 직접 님 웨일스와 시선을 교환하게 된다.

김 산과 님 웨일스는 어떤 관계였는가
 한편 요령민족출판사는 연변 교포 사회의 이러한 활발한 움직임에 부응하기 위해 《조선족혁명렬사전 제2집》에 장지락을 소개하기로 결정하고, 40쪽에 걸쳐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기록했다. 고베에서 행한 강연에서 유동호씨는, 저자 權 立(현 연변 역사연구소장)이 河北省의 石家莊市 공산당위원회 '당사 연구소'를 찾아가 장지락이 처형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石家莊은 장지락이 趙亞乎이란 중국 여성과 결혼한 후 2년에 걸쳐 공산당 조직을 재건한 곳이다.

 앞서 말한 대로 유동호씨는 장지락이 잠시교편을 잡았다던 연안 군정학교 출신이다. 물론 44년에 입교했기 때문에 7년 전의 장지락 모습을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아리랑》을 처음 대한 순간 같은 군정학교에 있었던 장지락에 대해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유동호씨는 그의 일대기를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연변의 조선족뿐 아니라 중국 전토에 '위대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유동호씨가 처음 찾아가 srht은 西安의 서 휘였다. 앞서 말한 대로 서 휘는 유동호씨의 군정학교 시절 교관이다. 그는 서 휘를 만나자마자 대뜸 "왜 그때 위대한 선배님 얘기를 해 주지 않았느냐"라고 항의조로 물었다. 西安의 정치범 수용소 같은 곳에 거주하고 있던 서 휘는 처음에는 별 말이 없었다.

 유동호씨는 이때 서 휘로부터 "장지락이 처형되었다"는 증언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처형 장면을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유동호씨는 또 장지락과 함께 님 웨일스를 만난 유일한 인물인 그에게 한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연안 동굴에서 20여 차례에 걸쳐 머리를 맞댄 장지락과 님 웨일스는 과연 어떤 관계였는가라는 물음이다.

 님 웨일스는 저서《Song Of Ariran》서문에서 장지락의 첫 인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강한 얼굴 윤곽은 기며할 정도로 중국인과 달밎 않았다. 오히려 스페인 혼혈로 보였다.'일순간 그는 유럽인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또 '미국과 영국의 지성인 중에 그와 같이 직접 체험한 시련에 대해 철학적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라고 장지락의실천적 지성을 격찬하고 있다.

 서 휘는 이 영원한 수수께끼에 대해 둘이 연인관계였었다고 단정했다고 한다. 물론 서 휘가 어떤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장지락을 따라 님 웨일스의 거처에 들리고, 김 산이 님 웨일스에 대해 말하는 데서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재일교포 작가 이회성씨도 87년 님 웨일스를 만났을 때 당사자에게 그러한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지락과 님 웨일스가 남긴 위업에 비하면 그렇나 우문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유동호씨 취재팀은 석달 가량의 취재를 마치고 26장 분량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집필자는 李哲龍이라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그러나 유동호씨는 작품을 읽어보고 실망했다.

 교포 영화감독 朴俊熙도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작정했다가 대본을 읽어보고 단념 했다고 한다. 유동호씨는 "연변의 교포 사회에도 세대 간의 갈등은 있다. 그러나 민족의 서사시를 흥미 본위로 극화해서는 안된다. 역사와 사실에 입각한 《아리랑》이 제작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유동호씨는 이를 위해 원로급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전 역사연구소 소장 한준광, 박 진의 손자 박기권, 오성륜의 조카 오기송, 전〈연변일보〉사장 오태호 씨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들은 한민족의 민족 정기를 드높일 수 있는 드라마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다으 aen가지 점으 fzmrp 부각할 예정이다.

 첫째, 장지락이 누구 못지 않은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이다. 1905년 평북 용천에서 빅농의 3남으로 태어난 장지락은 3.1운동이 일어난 지후 일본에 유학했다가 '신사상'을 찾기 우해 19년 중국으로 떠난다. 비록 33년이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조국을 잃은 설움에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테러리스트 .코뮤니스트로 전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한시도 '물에 빠진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물에 소금을 넣으면 물을 짜게 할망정 소금 그 자체는 형태도 없이 사라진다. 다시 말해서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의 힘을 빌려 독립투쟁을 하지만 이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투쟁 철학이었다.

 둘째, 당시의 독립운동가 중에서 장지락과 같이 이로노가 실천을 겸비한 사람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대서사시 《아리랑》은 장지락이 구술하고 님 웨일스가 이를 메모하는 형태로 조율됐다. 그러나 악보는 모두가 장지락의기억력과 꼼꼼히 기록해 놓은 '암호 노트'를 근거로 기록되었다. 농민 폭동과 지하 활동을 주도하면서 한시도 지적활동을 게을리하지 안았다는 얘기다. 유동호씨에 따르면, 이 극화 대본은 재집필 단계에 있다고 한다.

북한에도 《아리랑》들어갔다
 한편 연변에서 극화 움직임이 지연되고 있는 중ㅇ;도 유동호씨의 취재일지 일부는 일본에서 활자화했다. 이와나미 서점이 91년 5월에 출간한 《アリランの歌 覺書》라는 책에 교토 대학의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교수가 이를 소개한 것이다.

 미즈노씨는 올해 43세인 조선근대사 연구자다. 그가 조선근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생시절 《アリランの歌》를 읽고 전율같은 충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비를 모아 유동호씨를 일본에 초청한 '무궁화회'회원들도 모두 똑같은 감동을 맛보았던 사람들이다.

 재일교포 작가 이회성씨도 마찬가지다(34쪽 인터뷰 참조). 그는 님 웨일스가 생존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시아 지역'의 코리언(님 웨일스의 표현)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를 직접 만나 앞서의 《アリランの歌 覺書》를 집필했다. 《아리랑》한글판은 미국에서도 80년대 중반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물론 저자 님 웨일스의 허가를 받지 않은 해적판이었는데, 그 중 일부가 캐나다의 교포 사회에 반입되었다.

 그러나 정자 rqnr한의 동정은 알 길이 없다. 유동호씨는 한두 사람을 빼놓고는 이 책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것으로 본다. '한두 사람'을 강조한 것은 연변에서《백의동포의 영상》이 출간된 직후인 87년에 연변을 찾아온 북한의 출판사 관계자 2명에게 그가 이 책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유동호씨는 "《아리랑》의 발자취는 대개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도 수수께끼가 적지 않다"라고 말한다. 첫째, 장지락이 호랑이 소굴 같은 연안 동굴을 왜 제 발로 찾아갔느냐는 점이다. 둘째, 장지락은 과연 병사(님 웨일스의 주장)했는가 총살됐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역사적 사실로 확정짓기 위해서 고영광씨가 들었다는 처형지시서의 실제 여부, 장지락에 대한 중국.일본 경찰의 취재조서등을 추적중이라고 밝혔다.

 님 웨일스는 이회성씨와의 인터뷰에서 "장지락이 50년 후의 한민족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책을 집피하는 데 동의했었다"라고 회고했다. 시대의 조루가 변해도 물에 빠진 소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민족 자성을 촉구하는 유언이었다.■
고베.도쿄.蔡明錫 편집위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