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공화국 주재 ??鎬 대사
  • 김춘옥 국제부장 ()
  • 승인 199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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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하나돼 예멘 통일"

 고대 로마인들로부터 '아라비아의 펠릭스'(행복한 아라비아)로 불렸던 예먼이 72년간의 분단을 딛고 통일된 지 1년이 되어온다. 외세의 침략과 이념의 차이로 분단됐던 예먼의 통일형태를 놓고 학자들은 '제3의 유형인 평화통일'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제1의 유형인 베트남식 무력통일과 제2의 유형인 독일식 일방흡수통일에 비유한 것이다.

 독일 통일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통일예먼의 이야기를 현지에 나가 있는(57) 대사로부터 들어본다. 기자 출신인 유대사는 72년 인도 주재 공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외무부 대변인, 서베를린 총영사를 거쳐 90년 3월부터 예먼(당신 북예먼) 주재 대사로 재임하고 있다.

언제 서울에 오셨습니까?
 지난 4월13일 귀국했습니다. 연례 해외공관장회의(4월14~22일)가 있어서 1년만에 왔습니다.

1년만에 와서 보신 소감은 어떤가요?
 변화가 많은 것 같군요. 빌딩 같은 물리적 변화도 눈에 띄었지만 역시 자동차가 많이 늘어났더군요. 또 뭐랄까, 분위기가 '활기차다'와 '공격적이다'의 중간 정도라고 할까요.

예멘에는 언제 부임하셨습니까?
 작년 3월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 주재 제2대 한국대사로 부임했는데 두달 후 예멘이 통일됐습니다. 89년 11월30일 이미 남·북예멘이 '통일합의'를 선포한 이후였습니다. 그러나 통일논의는 오래 전부터 반복돼왔기 때문에 마치 '늑대소년 얘기'같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긴장상태는 없었습니다.

이제 통일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혹 독일과 같은 심한 휴유증은 아니더라도 통일의 부작용은 없습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부작용이라고 하기에는 가벼운 문제들입니다. 동·서독의 경우 통일되면서 통화통합이 됐지만 옛 남예멘은 디너를, 옛 북예멘은 리알을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또 자동차 등록넘버제도 그대로입니다. 총선 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 해결될 겁니다. 또한 헌법이 아직 개정되지 않아 남예멘의 사회당과 북예멘의 직능대표로 구성된 국민의회도 아직은 그대로 있습니다. 걸프전쟁 때문에 6개월 이내에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합의했던 것을 이제 1년 이내에 하기로 다시 조정이 됐지요. 30개월 이내 총선을 하기로 돼 있는데, 특히 경제적 사정 때문에 어렵기는 합니다. 예멘의 통일과정은, 어려운 것은 다뒤로 미뤄 나중에 해결하고 우선 통일부터 하자는 식으로 진행 됐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치체제가 다른 곳에서 살던 남·북예멘인들이 그 차이 때문에 겪는 갈등은 없습니까?
 남·북예멘인들에게 이미 오래 전부터 왕래가 허용돼 있었습니다(그들은 통일을 위해 서신교환부터 시작, 전화·팩스교환 등으로 왕래의 폭을 조금씩 넓혀왔다). 또 양국의 국경은 우리나라의 휴전선이나 동·서베를린 장벽처럼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단 도로에만 초소가 있었습니다. 물론 완충지대는 있었지요. 또 예멘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카트(각성초)라는 게 있습니다. 북예멘에서는 회교 금식기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이 카트를 씹을 수 있으나 남예멘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으로 제한했어요. 그러나 통일된 후 남예멘인들도 자유롭게 카트를 씹을 수 있게 됐지요(대부분의 예멘 주택에는 응접실과 같은 카트실이 있어 하오만 되면 동백나뭇잎과 흡사한 카트잎을 3~4시간 동안 씹는다. 카트는 일종의 각성제로 피곤한 몸을 나른하게 풀어준다고 한다).

예멘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근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원래 예멘은 우리나라나 동·서독처럼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이념의 대립으로 분단된 것이 아닙니다. 오스만터키제국의 지배 아래 있다가 1918년 지금의 북예멘 자리에 야히야 왕조가 독립하고,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남예멘 지역에서는 영국이 철수하자 67년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예멘공화국이 설립됐습니다. 북예멘에서는 1962년 왕조가 무너지고 예멘아랍공화국이 탄생,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나라는 국경분쟁으로 야기된 전쟁을 2번이나 치렀으나 전쟁이 끝날 때마다 양국은 번번이 통일 하자는 얘기를 했습니다. 최근 미·소가 화해하고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펴자 관계변화가 시작됐습니다. 한편 소련이 최근 국내 경제여건상 제3세계에 대한 원조를 줄이자 남예멘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시장경제쪽으로 가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예멘에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사회당의 강경주의자들 사이에 노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세계 최빈국 대열에 끼어 있던 남예멘이 결국 경제정책을 수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보니 북예멘과의 통합문제가 다시 적극적으로 토의된 겁니다.

일부 보도가 되긴 했습니다만 통일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십시오(이때 유대사는 미리 준비한 자료를 내밀었다. 유대사가 준비한 남·북예멘의 통일운동연혁을 그대로 소개한다.)

1972.11 ·남·북예멘 정상.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 회동,통합헌법에 합의
 통일실천을 위하여 남·북예멘 합동위원회 설치.

1982.1 ·북예멘 살레 대통령(현 예멘 대통령)과 남예멘 알리 나세르 대통령, 트리폴리안을기초로 통합헌법안에 합의.
·통일예멘 수도 : 사나.
·통일예멘 국교 : 이슬람교
·양국 의회 비준 후 양국 국민투표로 통합헌법 확정하기로 함.

1989.11.30 ·남북예멘 정상. 남예멘의 수도 아덴에서 통합헌법 안에 합의 서명(트리폴리안을 기초로 한 전문 136조).
·통합실천을 위한 기구로 남·북예멘 합동 각료위원회 설치.
·6개월내 양국 의회 인준, 그후 6개월내 양국 국민투표 거쳐 통합 헌법안 확정.
·확정된 헌법에 의거 통일예멘 단일의회 구성 합의
·통일의회에서 통치기관 결정 예정.

1990.4.22 ·남·북예멘 정상, 통합선언 후 30개월간 과도기를 두기로 한 과도기 정부기구에 대한 합의서에 서명.

1990.5.22 ·남·북예멘 통합선언.
·5인의 대통령위원회 구성. 위원은 전 북예멘 대통령(현 대통령), 전 남예멘 총서기(현 부통령), 전 북예멘 국회의장, 전 남예멘 최고간부회의 의장(현 총리), 전 북예멘 총리.
 한마디로 23년 동안 분단됐던 예멘의 통일은 통합협상단계(72.11~89.11.30) 통합교섭단계(89.11.30~90.5.22) 및 통일과도기(90.5.22~92.11.22)로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통합교섭단계에서는 6차례에 걸쳐 남·북예멘간 정상회담과 2차례에 걸친 공동각료회의, 4차례에 걸친 정치조직공동위원회가 열렸습니다. 통일 이후 30개월로 잡은 통일과도기 초기에는 내각(총리 1인, 부총리 4인, 장관 34명)과 통일의회 의장단을 구성했습니다.

90년 5월22일 '통일선포'에 즈음해서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라도 있습니까?
 KBS와 MBC가 통일 직후 세계 언론 가운데 제일 먼저 예멘으로 취재를 와서 공동으로 알리 압둘라살레 대통령을 인터뷰했습니다. 북예멘 대통령으로 사회체제와 인구 및 경제력(인구 : 북예멘9백만명, 남예멘 3백만명. 1인당 국민소득(통일 당시 기준) : 북예멘 6백82달러,남예멘 4백20달러)이 우월한 입장에서 초대 통일예멘 대통령직을 맡게 된 살레 대통령은 "통일협상이 성공한 열쇠는 상대측으로 하여금 패배했다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더군요. 또한 통일예멘의 부통령이 된 남예멘 대통령 알 비드씨는 "예멘의 통일과 국민을 위해 기꺼이 1인자에서 2인자의 자리를 수락했다"고 밝힌 것이 기억납니다.

통일과정에서 나타난 주요 쟁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요컨대 국내 문제만 해결하면 됐습니다. 남·북예멘은 통일을 위해 총선 실시나 헌법을 국민투표에 회부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양 지도자가 정치적으로 합의해서 통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과도기가 30개월이나 됐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남예멘에서는 4년을, 북예멘에서는 6개월의 과도기를 주장했는데 결국 양측이 협상을 해서 30개월이 됐다는 겁니다. 이 기간을 잡는데 진통이 컸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 등 주변국가는 예멘의 통일을 둘러싸고 미묘한 입장을 보였지요?
 양국이 1990년 5월30일 바그다드에서 열린 아랍정상회담 이전에 통일을 이루자는 데 합의하기까지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주변국의 반대가 있기는 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대외적으로 "우리는 남·북예멘의 통합을 지지한다"고 표명하고 나섰지요. 또한 통일을 축하하러 온 외빈 가운데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있었는데, 수도 사나에 호텔을 신축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8천만달러를 내놓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또 귀로에 오만에 들러 오만과 예멘과의 국경분쟁 해결을 위한 중재에도 나섰습니다.

남예멘 지도자들이 그토록 간단히 그들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통합에 대한 반발은 없었는지요?
 말씀드린 대로 남예멘에서는 노선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 같이 오랫동안 절대권력을 행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이념을 통일과 함께 금새 버릴 수 있었다고 봅니다. 아직 남예멘의 사회당은 그대로 있습니다.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된 후인 87년경부터 주로 군부세력으로 대표되는 강경론자들은 영향력을 잃어갔습니다. 이전부터 온건론자로, 국가 경제정책을 주도해온 4명의 주요 인물이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남·북예멘의 통일을 보면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던가요?
·남·북한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하면, 전쟁을 치르면 후유증이 오래 가는 것이 정상인데 남·북예멘은 그때마다 통일논의에 한발짝씩 더 다가갔습니다. 통일의 분위기는 성숙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북예멘 정상들이 정치적으로 화합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한국은 북예멘과 85년 수교해 상주공관을 87년 설치했고, 남예멘과는 통일을 4일 앞둔 90년 5월18일 수교했습니다. 양국 관계의 현주소를 소개해주십시오.
 한국은 90년 추산으로 철강·파이프 등 2천6백만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수입은 암염 등 3백만달러어치였습니다. 이미 유공·현대·삼환건설이 87년부터 20년간 계약으로 2억2천만달러를 투자해서 마리브유전을 개발, 하루 2만배럴을 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철강은 경쟁력을 많이 잃어 터키 등이 예멘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예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멘은 한·소경협관계를 상당히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소련이 남예멘을 많이 지원했는데, 이제는 한국이 소련을 지원하니 한국이 예멘을 많이 지원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예멘은 현재 아덴 항구를 자유무역항으로 개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 자유항 모델을 한국의 마산과 이리의 수출공단에서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예멘의 석유매장량은 북예멘에 10억배럴, 중립지역에50억배럴, 남에멘의 30억배럴 등 총 90억배럴이나 됩니다. 하루 생산량 25만배럴 가운데 21만배럴이 북예멘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투자 덕이지요. 따라서 앞으로는 남예멘의 유전개발에 한국이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또 한국이 통일 될 것으로 보고 베를린 및 서울과 자매결연을 맺고 싶어합니다. 또 한국의 경제발전을 배운다는 차원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분이 한국 주재 대사로 와 있습니다.

예멘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잠재력이 있다고 봅니다. 특히 남예멘에는 영국식 교육을 받은 훈련된 인적 자원이 있으므로 기술과 자본만 있으면 석유매장량과 수산자원을 우리가 잘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걸프전쟁 때 이라크를 지지했기 때문에 현재는 미국과 걸프연안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중단돼 있으나, 한국이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고도의 훈련된 인적 지원으로 저만큼 성장했으니 우리도 그 반은 되지 않겠느냐 하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언론사 견습기자로 출발했다가 관료로 변신하셨습니다. 두 직업에 대한 비교가 젊은 독자에게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상당히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언론은 조직생활보다는 개인의 창의력과 능력이 중심이 되는 곳인데 공직생활은 조직생활입니다. 공직에 들어간 언론인은 참모직은 잘 하는데 조직원으로는 참 힘듭니다. 이제는 다시 언론계로 들어가면 못 해낼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일단 언론계에서 출발했으면 그대로 언론에 있고, 공직에 있으려면 처음부터 공직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저처럼 다른 곳에서 들어온 사람을 레트린(변소)이라고 합니다. 많이 고생했어요.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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