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미술품 유입 ‘홍수’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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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가짜로 1만전 이상 추산…북경에 ‘그림 제조 공장’도

지난 6월초 미술품 소장가 ㄱ씨는 그림 4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난해 8월께 많은 돈을 들여 산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위작 시비야 국내에서 간간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가 놀란 이유는 좀 특별나다. 작년에 그에게 그림을 팔고 간 재미교포는 그 그림이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걸려 있던 그림이라면서 자기가 북한에 들어가 직접 사왔다고 말했었다. 雲圃  金基昶이라는 서명이 있는 그 그림은〈사계절〉이라는 네 점의 연작 가운데〈가을〉이다.

‘운포’의 가짜 〈사계절〉그림 첫 공개
 광복 전 雲圃 김기창의 호가 雲圃였음을 알고 있던 ㄱ씨는 그 그림을 의심하지 않고 사들였는데, 올해〈사계절〉모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겼더니 5점 모두 가짜로 드러났다. 옛날 종이를 사용하고 서명은 물론 나뭇잎까지 똑같이 그렸지만, 서울에 온 ‘운포 그림’에는 원작 위에 종이를 놓고 베낄 때 쓴 연필 자취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가을〉의 경우 우선 색깔과 저고리 팔 부분의 선에서 차이가 난다.

 비싼 값을 치르고 가짜 그림을 산 ㄱ씨는 《시사저널》에 가짜 〈사계절〉을 처음으로 공개하면서“음성적으로 거래되는 북한 미술품을 양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북한 미술품은 5~6년 전부터 반입되기 시작해 현재 1만~2만 점 정도가 국내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행객의 휴대품 속에 끼여 세관을 무사 통과한 그림들은 고미술품 조선화(한국화) 유화 수예품 공예품 등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 이것들이 당국에 신고되지 않고 은밀하게 유통된다는 점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일은 가짜가 진짜로 둔갑해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흘 전에도 평양에서 왔다는 추사 글씨를 보았다. 조선시대의 작품이 수천만원에 거래되는 현장도 여러번 목격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서울 인사동 한 회랑의 주인은 고미술품이나 납·월북 작가의 작품이 가장 인기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 미술품의 반입 경로는 주로 중국과 미국이다. 가짜〈사계절〉은 미국을 거쳐 국내에 들어왔다.〈사계절〉중〈가을〉을 ㄱ씨에게 소개한 사람은〈ㅈ일보〉미국 시카고지국 편집 국장 ㅇ씨이다. 지난 88년부터 특파원 신분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는 ㅇ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교포를 상대로 하는 북한의 미술품 판매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예술창작사라는 곳이 교포들의 관광 일정에 들어있었다. 50달러 정도로 값도 싸고 ,사상이 들어 있지 않은 수려한 풍경화가 대부분이어서 선물용으로 교포들은 장삿속에 ‘더 좋은 게 없느냐’고 요구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사계절〉같은 것이 나오게 되었다.”

 〈사계절〉은 장사를 위해 평양에 들어간 시카고의 교포 ㄱ씨가 구해 왔다. 그 교포는 ㅇ씨에게 운보가 30대 때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서, 운보의 동생 김기만이 북한에 생존해 있으며 만수대창작사 소속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조선예술창작사 요원이 여행객들에게 ‘그림 공장’을 견학시키고 고화를 보여주면서 작품 구입을 권유하고, 교포들이 거기에 호응한 것은 89~90년이 한창이었다 어떤 사람은 한꺼번에 2백여 점을 사들고 나와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그림을 한국으로 가져가는 교포도 많았다고 ㅇ씨는 전했다. 선물용으로 가져 왔지만 몇십, 몇백 달러에 산 그림을 한국에 가서 재수가 좋은면 몇천만원에 까지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을 경유한 미술품은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것에 비하면 소규모이다. 중국에서 북한 미술품이 거래되는 방식은 두가지이다. 그 하나는 북경에 있는 북한 식당을 통한 판매이다. 1년에 4개월씩 중국에 머무른다는 어느 연구원의 ㅅ씨는 북한이 직영하는 ‘금강원’ 식당이 미술품을 판매하는 거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식당 복도에 북한의 풍광을 그린 사진 같은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고 판매대장에 오른 그림은 5백점 가량 된다. 어떤 류의 그림을 사고 싶다고 말하면 예약을 받아 그대로 그려다 준다.” 북한 사람은 어디 나와서 무슨 일을 하든‘외화벌이 각개 전투 요원’이라고 보면 된다면서, ㅅ씨는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조선족을 통해 유입되는 미술품이라고 지적했다.

서울 가짜, 북경 다녀오면 진짜로
  ㅅ씨에 따르면, 달러 맛을 본 중국의 일부 조선족 동포들이 그림 중개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한다. “여행객이 북한 그림을 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구해준다. 그림을 직접 판매하는 조선족 여행사도 있다. 한국 사람들을 만만한  고객으로 보는 중국에서는 그림을 구하지 못하면 직접 그려서라도 가져다 준다.” 중국을 방문한 한국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림 구입 요청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ㅅ씨는, 이제는 물정을 알게 된 여행객도 있어 서로 속고 속이는 일마저 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에서 가짜 그림을 만들어 조선족을 통해 팔면 남한 여행객은 위조 달러를 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제3국에서 현지 동포를 가운데 끼고 남북한 동포가 서로 사기를 치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고 ㅅ씨는 말했다.

 북한 미술품 판매는 이런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북경 교외에는 북한 그림을 베끼는 공장이 있으며 직공만도 1백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서울에서 보낸 가짜가 조선족을 통해 진짜로 둔갑한 뒤 여행객을 통해 서울에 다시 오는 일도 있다. 북한에서 내보냈든 중국에서 생산했든 북한 딱지를 단 그림은 대부분 여행객의 가방을 통해 들어오지만 그림을 들고 한국을 찾는 조선족도 상당한 숫자에 이른다. 이들은 한약재처럼 그림을 직접 들고 오기도 하고, 우편을 이용해 서울에서 다시 규합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북한에 있던 것을 며칠 만에 가져 왔다”면서 그림을 둘둘 말아 미술관이나 화랑가를 배회하는 이들의 손에는 도자기도 상당수 들려져 있다. 웬만한 미술관이나 화랑치고 이들의 방문을 받아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작년 이만 때 월북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라는 제의를 받아본 적이 있다”는 호암미술관 학예연구사 이 준씨는, 제작 연도도 없고 서명도 확실치 않지만 무엇보다 작품의 질이 떨어져 거절했다고 말했다.

 〈북한미술전 : 그리운 산하〉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5월 분단 이후 처음 서울에서 열린 북한 미술전은 질적인 면에서 북한 미술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는 아쉬움을 남긴 전시회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중국을 통해 국내에 한꺼번에 유입된 북한 만수대창작사의 작품 1백여 점은 현재 북한 미술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북한 최고의 ‘창작 기지’로서 김정일의 특별지도를 받고 있다고 알려진 만수대창작사의 이 작품들은 대규모라는 점에서 또 다른 반입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수대창작사 진짜 그림 1백점 와 있다
 이 그림들은 만수대창작사의 작품 거래를 대행하는 북한의 조선고려무역상사와 중국 길림성공예품진출국총공사가 계약을 맺고, 그곳의 아시아부 경리 朴哲洙씨가 국내에 가지고 온 것들이다.

 작품 내용은 금강산 묘향산 동해 등을 그린 사실화 위주의 명승지 풍경화로, 정창모 정영만 등 북한에서 예술가로서 가장 높은 반열에 오른 인민 예술가와, 리 창 등 공훈 예술가의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간 공식·비공식 경로를 통해 반입된 북한 미술품 가운데 만수대창작사 소속 인민·공훈 예술가 작품들이 간간이 섞여 있긴 했지만, 한꺼번에 대규모로, 그것도 작가 소개서와 함께 들어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품들의 반입과 관련해 특히 주목되는 점은, 지난해 북한과 계약을 맺은 길림성 총공사에 컨테이너 2대 분량(약 1만점)의 작품이 가 있으며, 그 중 극히 일부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이 중에는 최고의 조선화가로 이름을 떨친 월북 작가 靑谿 鄭鍾汝의 50년대 대표작 〈5월의 농촌〉도 들어 있다. 〈5월의 농촌〉은 북한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이다(상자 기사 참조).

 1백여점 가운데 52점을 ‘맡아두고’ 있는 미술기획자 ㄱ씨는 “북한이 전격적으로 진행하는 외화벌이 사업의 하나로 국내에 들어온 것이다”라면서 작품료를 절반밖에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팔 수 도 돌려줄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작품료를 받아야 할 총공사의 박철수씨가 지난 11월 중국에서 피살되었기 때문이다(84쪽 기사 참조).

 “2만달러만 주면 어디에 있는 어떤 그림이든 떼오겠다는 장사꾼도 있지만 북한이 조직적인 방법으로 미술품을 판매한다는 느낌이 든다.” ㄱ씨는 그 근거로 두가지를 꼽는다. 우선 운보 김기창의 가짜 작품을 내다 팔고 그 작품의 원색 도판을 북한의 대외 홍보 잡지《금수강산》에 실었다는 점이다. 통일원 자료실에 가면 열람할 수 있는 《금수강산》92년 5월호에는 〈고화 미인도〉라는 제목만 있을 뿐 작가나 제목 등 아무런 설명이 붙어 있지 않다. 작가 이름과 작품의 제목·크기에 해설까지 곁들인 다른 호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다분히 외부를 의식한 북한측 의도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징후는 지난해 11월께 북경에서 열린 조선화가 김기만의 전시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제목은 〈남조선 대가 운보 김기창의 동생 김기만 전시회〉였다. ㄱ씨는 “개인이 그림을 가지고 나오다 적발되면 사형당한다고 한다. 북한 당국에서 묵인하지 않으면 유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어떻게 해서든 한국쪽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자꾸 미끼를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진짜든 가짜든 현재 유통되고 있는 북한 미술품들은 모두 불법이다. 그러나 북한 미술품 ‘보따리 장수’들은 법망을 여유있게 피해 다니고 있다. 통일원 교류2과의 한 관계자는 “중국인 혹은 미국인의 소유라며 들여오는 물품은 북한 것이 아니다. 물자교류의 의미는 북에서 남으로 직접 이동하는 것이다. 제3국을 통해 들어오는 여행자나 교포의 휴대품은 통관 과정에서 걸러지는 것으로, 통일원에는 승인 받으러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세관에서도 미술품을 쉽게 적발해낼 수 없다는 데 있다. 중국을 갈 때마다 북한 작품을 선물 받거나 사온다는 어느 연구원 원장 ㄱ씨는 “일부러 숨기려 하지 않아도 세관 직원들이 북한 그림인 줄 모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포세관 旅 具課의 한 직원도 “북한 물품은 소정의 절차를 밟지 않으면 통관이 불가능하다. 알고는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은 엑스레이 투시에도 나타나지 않고, 더군다나 우편물로 보내면 적발이 더 안된다. 그림이 문제가 된 적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북한, 외화 벌려고 가짜 수출
 불법으로 들어온 북한 미술품이 미술시장에서 유통되는 것과는 정반대로 적법한 통관절차를 거쳐 국내에 들어온 작품은 일반 판매가 금지되고 있다. 기업을 통해 수입된 합법적인 작품 수도 1만점이 넘는다. 지난해부터 작품을 수입해온 기업은 (주)두성통산과 (주)한중문화무역 외에 2~3개 업체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중문화무역의 경우 엑스포 북한물산관 전시를 위해 중국을 통해 회회 1백67점과 도자기 35점을 급히 들여와 그 중 일부를 전시중이지만, 지난해 분단 이후 처음 북한미술전시회를 가능케 한 두성통산은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조선화 도자기 공예품 조각 등 12개 분야의 1만1천2백43점을 구상무역 형식으로 들여온 두성통산측은 “통일원에서 2백여 곳의 특수자료 취급 기관 외에는 판매 허가를 내주지 않아 10점도 팔지 못했다. 65만달러어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창고에 쌓여있다. 불법 휴대품으로 들여오는 건 다 팔고 있는데 1억원에 가까운 세금을 낸 합법적인 수입품을 팔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밝혔다.

 고미술품, 납·월북 작가 작품, 인민·공훈 예술가 혹은 일반 화가의 작품 등 북한 미술품은 진짜 가짜를 가리지 않고 한국 땅에서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음성적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나서서 진위를 가려줄 전문가도 있을 리 없다. 북한 미술품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장사꾼들 손에 가짜로 둔갑해 팔려도, 한국 여행객들이 북한 외화벌이의 대상이 되어도 재개할 만한 어떠한 조처도 나오지 않고 있다. ㄱ씨가 운보의 가짜 〈사계절〉을 《시사저널》에 공개하기로 결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국내에 들여오는 것이 일본 등 외국으로 빠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남북 문화 교류에 큰 혼란이 생길 것 같다. 정식 교류가 무색할 정도로 많이 들어와 있으니 그 대책을 일반인의 판단에만 맡길 수 는 없다. 북한 미술품에 대한 바른 평가가 내려지지 않고 비전문인의 돈벌이 수단으로만 계속 이용된다면 통일이 된 후 북한 미술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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