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넓게 책읽어야 좁은 문 뚫는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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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학입시 맞춰 고교 독서교육 진땀

경기도 안양시 안양고등학교 2학년 10반 교실은 점심시간에도 별로 시끄럽지가 않았다. 대부분 참고서를 꺼내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책상 위에는 독서잡지와 소설집들이 놓여 있었다. 소설책이 학생들의 책상에서 교과서나 참고서와 똑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올해부터 학생들은 선생님이나 부모로부터 소설 보지 말고 공부만 하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1년 사이에'폭넓게 책을 읽으라'는 새로운 잔소리가 나오게 된 배경은 올해가 대학수학능력시업(수능시험)과 대학별고사를 치르는 원년이기 때문이다. 교과목 시험이 아니라 통합 . 탈 교과적이고 사고력 중심으로 출제되는 수능시험은 학생들에게는 독서를, 학교에는 독서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더구나 2백점 만점에 배점이 60점인 언어영역시험은 문학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들을 지문으로 사용해 어휘력 . 문장독해력 . 언어추리력을 측정하기 때문에 폭넓은 독서뿐 아니라 효율적인 책읽기까지 요구한다.

 서울 . 지방 할 것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는 독서 습관이 전무하다시피 한 학생들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수능시험 날짜(8월20일)를 한달여밖에 남겨 놓지 않은 고 3학생들은 문제집 풀이에 정신을 쏟고 있지만, 1~2학년에게는 매주 독서 시간을 따로 마련하거나 《우리 소설 50선》《교실 밖 국어여행》같은 책 30여 권을 필독도서로 선정해 읽게 하고 있다.

 독서교육은 학교마다 큰 차이가 없다. 학교 도서관 장서를 늘리고 학급문고를 운영하는 일은 어느 학교에서나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독서 . 신문사설 일지를 만들어 문단을 분석하고 요지를 파악하게 하는 것도 대부분의 학교가 취하는 독서교육 방식이다. 그러나 현장의 교사뿐 아니라 학생들은 교실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오히려 불안해한다. 그간 일곱 차례에 걸쳐 수능시험 실험평가 시험을 치렀지만, 문제 유형에 대한 정확한 지침이 없어 교육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천편일율적인 독서 교육
 서울 경성고 박찬호 교사(국어과)는"언어영역 전공자가 없어 각 학교 선생님들이 지도하는 독서 방법은 뻔하다. 어떤 책을 읽으라고 얘기는 하지만 솔직히 막막하다.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할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라고 말했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교과 과정과 수능시험이 연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신성적은 처지지만 수능시험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나타내는 학생이 적지 않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서울 영동고 이병렬 교사(불어과)는"학과 성적은 우수한데 수능시험에 적응 못하는 학생이 울음을 터뜨려도 열심히 하라는 것말고는 달리 격려할 말이 없다"라고 현장 교사의 고민을 토로했다. 지난해까지 암기를 요구했던 대학입학시험이 폭넓은 사고력을 요하는 수능시험으로 바뀌자 교사든 학생이든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수리 . 탐구영역이나 외국어영역에 대한 충격은 언어영역에 비한다면 그 강도가 미미한 편이다. 외국어의 경우는 과거 출제 방식인 세심한 문법 위주에서 벗어나 생활 영어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오히려 당사자들이 부담을 덜 갖는다. 문제는 언어영역에 집중된다.

"수능시험의 유형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문제를 쉽게 내겠다고 발표했는데 어떤 게 쉬운지 알 수가 없다. 한시간 수업을 위해 다섯시간 가량을 준비하지만 막막한 건 마찬가지이다."경성고 박찬호 교사는 교사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하면서 전국 공통으로 교수되는 유일한 학습 방법인 텔레비전 과외에 학생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수능시험이 매우 바람직한 평가 제도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지금 코앞에 닥친 혼란은 너무 크다. 학교 수업을 정상화한다는 수능시험의 목적이 대학을 여전히 출세의 관문으로 여기는 사회분위기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화여고 오봉희 교사(국어과)는"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빨리 끝내고 수능시험 체제, 즉 문제집 풀이로 들어가려 한다. 고교 교육과정 자체가 대학을 가기 위한 중간단계쯤으로 인식되는 우리 사회에서 수능시험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입시체제가 아닌 정상수업을 하면"다른 학교는 수능시험 풀이를 하는데 너희 학교는 무엇 하느냐"라는 학부모들의 항의전화가 득달같이 걸려온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책을 가까이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닥친 독서 강박관념은 일단 책에 대한 큰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참고서사는 곳쯤으로 여겼던 서점은 자주 들러 신간을 찾는 곳으로 변했고, 국어사전은 어휘력 때문에 반드시 갖춰야 할 영어사전처럼 되어버렸다. 안양고 2년 박희성군은"책 읽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지만 도서관 책을 빌려 보려고 애를 쓴다. 여러 명이 돈을 모아 책을 사서 돌려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점에 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각 출판사에서'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 읽기 자료'라는 식의 제목으로 신간을 쏟아내고 있다.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는 지난 5월'중고생을 위한 교양도서'코너를 따로 마련해 1백20여 종에 이르는 책자를 한 곳에 모아놓고 있다. 이 서가에 꽂힌 책들은 교과서에 제목만 실린 시나 단편을 모아 해설과 함께 수록한 것이거나'논리'관계서들이 대부분이다.

 부모들이 이런 책을 구입해 자녀에게 읽기를 권하는 바람직한 현상이 나타나고는 있지만, 일선 교사들은 어릴 적부터의 좋은 가정교육이 최선의 독서교육 방법이라고 지적한다. 부모가 책을 가까이한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이 수능시험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함을 자주 목격한다는 것이다.

 《이제, 학교도서관을 살리자》는 연구보고서를 펴낸 바 있는(《시사저널》 제178호 참조) 서울 숭문고 허병두 교사는 강요된 책읽기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강제적인 책읽기는 독서마저 입시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시험만 끝나면 학생들이 책을 다시 멀리하게 되기 때문이다."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책을 읽게 하는 동기 유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는 허교사는 새로운 독서교육의 형태를 개발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컴퓨터통신망 같은 것을 이용해'생일날 읽고 싶은 책''잠이 오지 않을 때 읽고 싶은 책'처럼 상황별로 다양한 메뉴를 제시해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고3생은 가장 비극적인 세대이자 입시제도의 희생물이다"라고 어느 교사는 말했다. 독서를 하고 싶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독서교육에 대한 장기적인 프로그램이 정착되어야 한다는 게 모든 교사들의 바람이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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