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네프의 연인들'과 근친상간
  • 조두영(서울대 의대교수·정신과 ()
  • 승인 1992.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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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훌륭한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모티브이다.
 작가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만들어 대중이 지닌 비슷한 심정에 호소하는 예술작품은 대개 오래가지 못한다. 정말로 좋은 작품이란 예술가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무의식이 움직여서 나온 것이다. 이런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 또한 무의식을 자극 받아 왠지 모르지만 자기 나름대로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심금을 울린다는 말은 작가와 감상자 사이에 무의식적인 교류가 생김을 일컫는 말일 게다. 그런 연유에서 名作들에는 주요 모티브로 만인이 무의식 상태에서 공유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자주 등장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모두들 잘 알다시피 어린아이가 네살~여섯살쯤에 이르면 자기와 같은 性인 한쪽 부모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異性의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강렬한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몇몇 특수한 환경에 처한 어린이만이 겪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거의가 겪는 '통과의례'이므로 사람은 이런 삼각관계의 심연을 겪어야 성숙해지는 법이다. 요즘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31세의 천재감독이 프랑스 혁명 2백주년을 기념해 만든 것이라 하여 갖가지 제작 일화를 낳은 名?로서 국내외 전문가마다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평하고 있다. 그러니 映晝美學的인 것은 그 분야 전문가에 맡기고 여기서는 심리면만 한번 다루어 보자.

오이디푸스적인 근친상간의 욕망과 갈등 고려
 
우선 필름이 보여주는 표면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예술과 사랑에 실패하고 왼쪽 눈을 실명한 젊은 여자화가가 수리를 위해 폐쇄한 다리 위로 흘러들어 父女뻘 나이의 두 걸인남자를 만나 이들 모두와 육체관계를 맺으며, 끝내는 문자 그대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열적인 젊은 곡예사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세가지 관점에서 심리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첫째가 옛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역시 새로운 사랑이 필요하다는 청춘남녀 兩者관계로 보는 눈으로, 이는 의식면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두번째는 한 여자의 몸을 통해 두 남자의 육체가 간접으로 접촉한다는 의미에서 두 남자거지 간의 무의식적 동성애를 중시하는 것이요, 세번째는 아버지같은 남자와 자기또래의 남자 사이에 끼여 오랜 방황을 하는 여자 이야기로 보는 눈이다.


정신과 의사에게는 이 셋 가운데 세번째 모티브인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가 가장 두드러져 보인다. 자세히 보면 여자는 두 남자를 접하는 모습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청년에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과 글로 두번 전하고, 청년이 있는 교도소를 2년 지나 방문하며, 거의 끝에 가서도 헤어지자고 한다. 청년과의 육체관계는 환하고 넓은 공간에서 장난처럼 진행되며 피임약을 먹는 냉철함도 유지한다. 반면 장면은 적게 나오지만 늙은 거지와의 관계는 자못 심각하다. 겉으로는 그가 늙은 거지를 무시하며 늙은 거지 역시 상대를 싫어해 다리에서 꺼져달라고 외치지만 내면에서는 이들은 서로를 유혹한다.


그는 2개월간 집요하게 늙은이가 있는 다리로 찾아들고, 루브르미술관 그림구경을 하게 만든다. 상대 또한 여자 머리칼을 애무하며, 자기는 잠자리의 명수라면서 과거 여러 곳 경비원으로 있었을 때 모은 열쇠꾸러미를 보여준다. 경비원이란 산전수전 다 겪어 인생 뒷면을 아는 베테랑이라는 의미요, 열쇠란 女體의 옥문을 여는 男根의 상징이다. 이들의 사랑은 밤의 미술관 미로에서 무등을 태우고 타는 접촉에서 시작하며, 은밀한 공간과 암흑 속에서 절정을 맛보는 여자의 손모습은 무척이나 강렬하다. 요컨대 그는 의식에서 청년을, 그리고 무의식에서는 늙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딸을 안놓아 주는 아비에게 죽음" 주제


 이렇게 볼 때 영화의 주인공은 청춘남녀가 아니고 부녀뻘 되는 두 남녀다. 둘의 배경을 보면 이것이 더욱 명확해진다. 즉 늙은 남자거지는 아내를 닮은 죽은 딸의 환영을 찾아 헤매는 남자다. 그여자 역시 육군대령인 유복한 아버지와 가난한 청년 음악도 사이에서 그 누구도 분명히 택하지 못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청년이 "당신에게 맞지 않는 내가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잠적하자 자기 분노에서 온 우울증에 빠져 가출한 처지다. 그는 다리에서 아버지를 상징하는 남자를 만나며, 그래서 그의 곁을 맴돌다가 덤으로 청년 곡예사까지 만난다. 즉 퐁네프 다리는 그가 뛰쳐나온 과거생활의 再版인 것이다.


요컨대 '퐁네프의 연인들'은 인간 성장과정의 오이디푸스적 상황에서 무의식적 근친상간의 욕망과 갈등을 그린 영화다. 한세기전에 나온 틀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역시 비슷한 주제로서 아버지뻘의 백작 남편과 청년장교 사이에 끼인 젊은 여자주인공이 철도에서 자살한다는 이야기이다. "아빠를 배반한 딸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엄포가 주제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반대로 "딸을 안놓아 주는 아비에게는 죽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영화에서 늙은이가 어슬렁거리다가 센강에 투신자살하는 뒷모습이 나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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