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비디오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92.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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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에이즈’에 감염

 

내용 70%‘폭력ㆍ애정’ … 유통은 대기업이 장악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올해초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가구에 대한 VCR 보급률은 지난해보다 10% 이상 늘어난 54.2%로 나타났다. 79년 우리나라에 그 모습을 드러낸 지 10여년 만에 일반 가정의 필수적인 생활품으로 자리잡은 비디오는 그러나, 시장규모면에서는 겉모습만 괴이하게 부푼 기형아가 되었으며, 내용면에서는 문화의 ‘에이즈’라는 혹평을 받게 되었다.

 비디오대여점은 유통질서를 확립하지 못한 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요즘은 ‘꽃피는 봄날이 갔다’는 분위기이다.

 92년 4월 현재 4만여개소로 추산되는 비디오대여점 가운데 비디오 보유량 1천여편 미만인 영세업체는 89년 15%, 90년 21%에서 지난해에는 50%를 넘어섰다. 한국영상음반 판매자협회 沈龍泰 부장은 “유통시장의 대형화가 불가피하다. 영세 대리점은 3년 이내에 현재 수준의 30%로 정리될 것이다”라면서 더 큰 문제는 대기업의 참여로 국내 비디오영화제작사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 라고 말한다. 현재 비디오시장은 5대 재벌기업과 1개 미국회사, 즉 대우(우일영상) SKC 삼성(드림박스ㆍ스타맥스) 금성(미디아트) 두산(골든베어)과 3년 전 국내에 진출한 CIC를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부장은 “80년대 초반에는 삼부 세경 서진 등 10여개 비디오 제작 업체들이 시장의 80%를 점유했으나 88년부터 대기업들이 대거 참여한 이후 판도가 바뀌어 지난해를 고비로 3대 7로 대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게 됐다”고 한탄한다.

 공테이프 및 VCR 생산능력까지 갖춘 대기업들은 비디오산업에 뛰어들면서 외국의 메이저 영화사들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 흥행성이 높은 비디오만 시중에 배급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 반면, 국내 중소업자들은 설 땅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잘 팔릴 만한 영화를 찾아 해외시장에서 한국인끼리 과열경쟁까지 벌인다.

 지난 3월초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열린 세계적 영화시장 AFM(American Film Market)에 참석했던 영성프로덕션 李浩誠 기획실장은 “한국 영화업자들은 시사영화가 아니라 정보탐색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전한다. 즉 메이저와 계약을 맺지 않은 국내 비디오제작업체들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외국 독립영화사의 비디오 판권을 서로 미리 흥정하려 하더라는 것이다. 이씨는 “이러한 국내 사정을 눈치챈 외국 영화업자들이 한국인끼리 경쟁을 시켜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거나 인기없는 코미디 한편을 끼워 파는 상술을 발휘했다”고 씁쓸해 했다.

 

대기업은 범죄 폭력물에만 관심

 대기업의 비디오시장 참여는 기존 비디오 제작사의 몰락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 범죄 폭력물에 쏠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지난해 4월 기준으로 보면 액션물이 전체의 41%, 공포물이 13.5%이고 애정물도 범죄 소재가 주류를 이뤄 비디오의 약 70%가 건전한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상혼을 더욱 발휘하여 좀 긴 영화는 중간에서 동강 내 2개의 테이프로 만들어 빈축을 사기도 한다. <블랙 레인>(CIC 1백26분) <죽은 시인의 사회>(드림박스 1백29분) 007시리즈<뷰투어킬>(SKC 1백30분) <킬링 오브 썸머>(대우 1백30분)는 공테이프 용량이 1백20분이라는 한계를 빌미로 두개로 나누어버렸다. 영화평론가 강한섭씨(서울예전 강사)는 “영화가 완결구조를 가진 하나의 예술작품임을 간과했다”면서 공테이프 생산능력이 있는 대기업에서 이런 일을 자행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직장인들은 왜 비디오를 보는가. 아래의 두 조사결과는 이 물음에 어느 정도 해답을 준다. 서울 YMCA에서 지난해 직장인 1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직장인의 월 평균 비디오 시청편수는 3.8편으로 나타났다. 월 평균 6편 이상은 19.8%, 11편 이상은9.9%였다(전혀 보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10%). 응답자의 44%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비디오를 시청하며 33%가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라고 응답했다.

 제일기획이 지난해 8월 서울시내 6백여개 비디오대여점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비디오 고객이 빌려보는 것은 외화가 절대 다수였다. 나라별로는 홍콩 액션물 59%, 기타 액션물57%(중복응답)였다.

 결국 직장인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편으로 액션물 비디오를 시청하는 지극히 ‘유아적’인 수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홍콩 느와르’라 불리는 홍콩 액션물이 2년 전부터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한 대리점 주인은 매우 명쾌하게 대답한다.

 서울 홍은3동에 위치한 비디오대여점 ‘비디오천지’를 경영하는 朴相晧씨는 “고객들의 비디오문화 수준은 콜라맛 수준”이라고 말한다. 좋은 비디오가 생산된다 하더라도 고객들은 ‘톡’쏘는 액션물이나 ‘찡’하는 에로물을 주로 빌려가지 다큐멘터리와 같은 ‘사고를 요하는’비디오물 앞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오락물로 낙찰을 본다는 것이다. 박씨는 대여점 운영자로서 좋은 내용보다는 고객이 많이 찾는 것을 구입하게 마련인데, 보통 대여점은 외화 50%, 홍콩 및 중국영화 20%, 만화 20%, 방화 10%의 분포로 진열해 놓고 있다고 말한다.

 

YMCA“좋은 내용 선정해도 시민이 외면”

 ‘건전비디오 문화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서울 YMCA 사회개발부의 李承庭 간사는 “애써 건전 비디오를 선정해 놓아도 시민들이 외면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이간사는 또 음란물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폭력물은 공개된 장소에서 함께 보면서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폭력물에 비하면 ‘성인용’비디오는 원색적이긴 해도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게 업계의 분석이다. 한달에 약2백편이 출시되는 비디오 중 ‘성인용’으로 분류된 것이 ‘충분히 벗고’ 있어서 과거 불법 유통되건 음란 비디오를 몰아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호프로덕션의 <금지된 정사5>(송명근 감독)는 이미 5편까지 출시되어 고정 고객을 확보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공륜의 심의가 너무 허술하다는 항간의 여론을 의식한 듯 “영화라면 한두군데 자를 것을 비디오는 10군데 가위질을 한다. 신문에 잡다한 만화를 실으면서 음란비디오 운운하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싣는 것은 도대체 어떤 기준이냐”고 반박한다. 비디오 관계 기사가 나갈 때마다 동네북처럼 두들겨맞아 심기가 불편한 이 관계자는 “심의가 너무 보수적이다”라고 주장한다.

 

관객이 각성해야 ‘노예’에서 해방된다

 20세기말에 태어난 비디오는 문화공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괴이하게 성장했다. 한국외국어대학 金寓龍 교수(신문학)는 “현재 비디오문화는 문화의 에이즈라 할 만하다”면서 이를 벗어나려면 전국민의 의식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교수는 비디오산업의 생산자 및 소비자가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먼저 수동적인 공륜의 검열제도에만 의존해야 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각자의 위치에 충실한 전국민의 성숙된 의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 대여점의 각성도 필요하지만 정부당국이 인간의 양면성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문화의 하수구’로서 ‘적성구역’을 설치하는 것도 고려함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디오문화의 열쇠는 소비자인 관객에게 쥐어져 있다. 어두운 극장이 아닌 밝은 실내에서 영상문화를 누리는 방식에 빠르게 익숙해져가고 있는 소비자들은 채널 선택권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한 영화를 완전히 해부하여 재구성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재미없는 장면은 화면 탐색기능에 의해 빨리 스쳐 지나가게 하고 재미있는 부분은 반복과 느린 동작에 의해 끊임없이 확장시킬 수 있다. 급격히 신장한 최첨단 문화상품 비디오가 올바른 영상문화의 주역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비디오의 노예가 아닌 능동적인 문화상품 소비자로 거듭나려는 관객의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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