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부추기는 아랍 민족주의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1.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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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장악 노린 제국주의의 중동 분할통치에 반대 후세인, 제2의 나세르 표방…정치적 승리 꾀해

 미국 사람들은 어떤 일에 직면하면 다음에 올 것을 생각하고, 아랍인들은 그 전의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중동사태가 새로운 전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는 아랍 사람들이 주장하는 ‘과거’에 대해서 거의 배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결과 그들은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아랍 사람들이 주장하는 ‘과거의 망령’ 때문에 앞으로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모순된 역사감정 ‘자존심과 수치심’
 지금 아랍 사람들 사이에는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이라크를 이길지 모르나 아랍에게 지고 말 것”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전후 중동정세에 대해 반미·반 이스라엘 투쟁의 격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확산,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친미 보수 왕정의 붕괴 가능성 등 미국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약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이 소홀하게 여겨온 아랍의 역사, 아랍인들의 뿌리의식이란 어떤 것인가.

《뉴스위크》의 크리스토퍼 디키 기자는 지난 1월14일자 기사에서 아랍과 서구의 오해의 근원은 단 한 낱말, 곧 ‘역사’라는 말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아랍의 역사를 왜곡한 서구인들이 그 사실을 잊고 있는 동안에도 아랍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은 그들의 역사를 생각할 때 항상 자존심과 수치심이라는 모순되는 감정을 갖는다. 먼저 자존심은 이 지역이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한때 화려한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수치심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이래 오랜 외세의 지배와 민족분열,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이스라엘 터키 이란을 제외한 중동지역의 모든 국가는 아랍 문화권에 속해 있다. 아랍 문화권은 마그레브로 불리는 북아프리카(튀니지 모로코 알제리)로부터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다.

 예로부터 중동지역에서는 찬란한 문명이 꽃피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문명의 토양은 중동이었다. 또 이 지역은 세계 3대종교 중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중동지역에서 아랍권이 처음으로 정치적·종교적으로 통일된 것은 마호멧이 이슬람교를 확립한 7세기 이후이다. 이슬람이란 말은 “신에게 자신을 복종시킨다”는 뜻이다. 이슬람교는 뒷날 정통파를 뜻하는 수니파와 이단파를 뜻하는 시아파로 나뉘었다. 현재 신도의 90%는 수니파에 속하고 시아파는 주로 이란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수니파가 코란과 이지마(공동체의 합의)를 앞세우는 데 비해, 시아파는 마호멧의 후계자중의 한사람인 알리와 그의 자손인 ‘이맘’(지도자)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은 아랍어로 “읽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오른손에 칼, 왼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서구적인 편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민족에 대한 철저한 정복전쟁은 아랍 민족의 옛부터의 생활양식이었다. 그러나 정복된 이교도에 대해서는 정치적 복종을 조건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지금 사용하는 아랍어가 정착한 것은 8세기이다. 아랍 민족의 수는 대략 9천5백만이지만, 전 세계 회교도의 수는 4억에 이른다.

 마호멧이 죽은 이후 아랍 사람들은 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대정복에 나서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인물 중 8세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에 얽힌 일화는 현재의 상황과 관련해 매우 흥미롭다. 유럽의 기독교문명을 정복하기 위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갔던 그는 타고 온 배를 모두 불지르게 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뒤에는 바다가 있고, 앞에는 적이 있다. 용기와 결단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이 말은 “아랍 형제들의 지하드(성전)”를 외치며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후세인을 연상시킨다.

쿠웨이트 침공의 ‘역사적 근거’
 아랍의 역사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래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아랍 민족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왔다. 아랍인들의 머리 속에는 그들이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남아 있다고 한다. 아랍인들에게는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우선한다”라고 한국 외국어대 柳正烈 교수는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유목민족으로서 아라비아반도의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살아온 오랜 관습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이번 걸프전쟁을 촉발한 원인, 즉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단순히 후세인의 영토적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지적이 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역사적 근거가 있고, 그 씨앗을 뿌린 세력이 바로 지금 다국적군으로 결집된 서구세력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이번 전쟁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아랍 세계가 지금과 같이 여러 국가로 나뉘어 패권투쟁을 벌이고, 또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고질적인 숙제를 떠 안게 된 것은 불과 6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랍인들은 이 기간을 ‘수치의 역사’로 생각한다.

 1차세계대전 기간 중 이 지역의 패권을 노리고 있던 영국은 3개의 서로 다른 약속을 했다. 아랍 민족에게는 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해 싸워준다면 전쟁이 끝난 후 독립된 통일 아랍 국가를 수립하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프랑스와 러시아와는 이 지역의 분할 위임통치를 합의했다. 또 시오니즘운동을 전개하던 유대인에게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가나안 지방에 유대국가를 세우는 데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결국 영국은 3개의 약속 중 아랍민족에게 한 약속만 빼놓고 나머지 약속들은 충실히 지킨 셈이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랍의 지도에 제멋대로 금을 그어 각각 독립왕국을 세웠다. ‘윈스턴의 팔꿈치’라는 말은 그들의 금긋기가 얼마나 작위적으로 이루어졌나 하는 것을 풍자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의 국경선은 일직선으로 뻗지 않고 툭 튀어나왔는데 이것은 윈스턴 처칠이 지도 위에 국경선을 긋다가 팔꿈치가 흔들려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이번 걸프전쟁의 일차적인 원인이 된 이라크와 쿠웨이트 관계도 사실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쿠웨이트는 아랍말로 ‘작은 요새’란 뜻이다. 즉 역사적으로 쿠웨이트는 이라크 변방을 지키는 요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풍부한 석유 매장량을 탐낸 영국이 통치하기에 편리하도록 독립시킨 것이 지금의 쿠웨이트다. 따라서 이라크 사람들이 그 이후로도 쿠웨이트를 이라크 영토로 생각하고 일개 지방 토후에 불과했던 알 사바 왕조를 ‘괴뢰정권’으로 인식해온 데에는 그만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점이 이번 걸프전쟁을 둘러싼 아랍과 서구의 역사인식의 차이다.

중동 위기의 뿌리 팔레스타인 문제
 미국인들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했을 때, 아랍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왜 미국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지역을 강점하고 있는 이스라엘군의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가”라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번 전쟁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면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도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것이 아랍인의 생각이다.

 아랍 민족에게 이스라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부정하는 존재”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원은 ‘바빌론의 유수(幽囚)’이래 세계 각지를 떠돌던 유대인이 가나안의 옛 땅에 2천년만에 유대국가를 수립한 데 있지만,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은 67년의 3차 중동전 때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한 골란고원 및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유엔 결의 242조의 ‘철수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들 점령지에서 주둔군을 철수하지 않아 화근이 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배경과도 밀접히 관련돼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해 6월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한 역사상 가장 강경하다는 극우 보수 내각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이로서 87년부터 시작된 ‘인티파데’(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성과에 힘입어 협상으로 문제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믿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망은 좌절됐다.

 또 한가지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인구의 자연증가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소련 거주 유대인의 이민을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당국은 지난해부터 앞으로 5년 동안 약 1백만 명의 유대인을 이주시킬 계획인데 지난해 이주한 사람들 중 10%가량이 점령지구에 배치됐다고 한다. 아랍 사람들은 이를 이스라엘이 점령지구를 영구히 장악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전, 팔레스타인 문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뿐 아니라 아랍 사람 모두에게 절망적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란과의 8년 전쟁 이후 아랍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세인이 이 문제를 떠 안겠다고 나선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지난해 6월28일 후세인은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과의 3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미·소냉전 종식이 앞으로 중동정세에 끼칠 영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그 긍정적인 측면으로 아랍 내에 냉전적인 진영개념이 깨져 아랍의 민족통일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미·소냉전이 미국에 유리하게 끝남에 따라 이 지역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개입이 강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후세인의 쿠웨이트 병합 의도에는 이같이 탈냉전 시대의 유동적인 상황 속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항해 기선을 제압하고자 하는 계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탈냉전 시대에 대한 그의 이 같은 상황판단과 행동방식은 많은 전문가에 의해 ‘판단의 오류’로 지적되기도 한다. 아무튼 세계적인 중동 문제전문가 마이클 허드슨이 말했듯 아랍 지도자들의 불합리해 보이는 행동의 배경에는 중동의 정치환경이 놓여 있는 것이다.

‘중동의 히틀러’인가 ‘아랍의 영웅’인가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바그다드의 도살자’ ‘중동의 히틀러’라고 후세인을 비난해왔지만 지금 그는 아랍 사람들에게 ‘아랍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중동문제 전문가인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는 후세인이 “침략자라는 약점은 있지만 아랍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감정과 좌절을 대변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중동문제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의 파드 아자미 교수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세인은 과거에 모욕을 받았던 사람들의 한을 씻어주기 위해 등장한 복수 자다. 그는 쿠웨이트에서 학대받은 사람과 현재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곤경에서 해방시키려 하고 있다. 후세인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총검과 화학병기와 채찍을 가진 ‘범아랍주의’이다.”(<뉴욕타임스> 90년 8월12일자)

 후세인을 소수민족에 대한 살인자, 또는 침략자로만 인식해온 사람들에게 중동 정치학자들의 이 같은 평가는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에게는 아랍의 정치풍토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측면이 상당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제국주의 식민지 기간 중 외세와 투쟁하며 발전시켜온 ‘아랍 민족주의’의 커다란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식민정책의 유산인 아랍의 분열을 극복하고 ‘대서양에서 아라비아해까지’ 하나의 아랍 국가로 재통일을 이루자는 이념이다. 8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나집 마흐푸즈의 ‘카이로 3부작’중 첫째권인 《궁전가》(Palace Walk)는 아랍 민족주의가 태동되는 시기인 1910년부터 50년대까지의 아랍인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랍 민족주의는 오스만 튀르크 지배하의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다 52년 이집트에서 나세르 혁명이 성공하면서 60년대와 70년대 아랍 세계를 풍미했다.

 나세르는 수에즈운하 국유화 문제를 둘러싸고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을 상대로 벌인 제2차 중동전쟁(1956)에서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 커다란 승리를 거둬 아랍 사람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이후 나세르의 반왕정 공화제 혁명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예멘 등으로 불어닥쳐 중동의 정치지도를 사우디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등 ‘친미 보수 왕정’국가와 ‘혁신공화제’국가의 대립으로 양분시켰다.

중동의 정치지도 또 한번 바뀔 것
 후세인의 ‘범아랍주의’는 이번 전쟁 승패와 관련 없이 중동의 정치지도를 또 한번 뒤바꾸어놓을 것으로 보인다.

 걸프전쟁에서 이라크 지지 전선에 가담한 리비아 요르단 예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알제리 수단 모리타니아 들과 반이라크 전선 외교정책 등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는 나세르와 같이 지냈던 생활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말한 적이 있다. “나세르는 나에게 시행착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 길을 답습하게 될 것이다.”(영국 군사 전문지《제인스 디펜스 위클리》90년 7월25일자)

 아랍 민족의 통일을 이루려다 뜻을 못 이룬 나세르의 운명 속에서 다국적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예견한 듯한 말이다. 만약 다국적군이 공격을 통해 그를 살해할 경우 아랍 사람들은 그들의 ‘영웅’을 죽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죽인 세력에 대해 무한한 복수심을 가슴에 품게 될 것이다. 아랍 사람들은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어제의 일을 돌이켜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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