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청강생 선애씨
  • 김영민 (한일신학대 교수 ․ 철학) ()
  • 승인 2000.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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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선애씨는 전업 주부다.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와 동거하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다. 나름의 뜻을 매겨 검은색 옷을 즐기고, 또래의 아주머니들에게는 아무래도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자를 줄창 쓰고 다니다는 점을 빼면 겉으로 보아 별스런 글감이 아니다.

 처음 본 그녀는 익산 시립도서관에 터를 둔 어느 독서회의 회장이었는데, 주로 30대 주부 수십명이 모여 마르크스의<자본론>, 헤겔의<정신현상학>, 플라톤의<국가론>등을 읽고 있었다. 구성원이 모두 밥하다 말고 이런 책들을 펴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선애씨의 고집과 몇몇 핵심 동료의 호응으로 동서의 난삽한 고전이 어렵사리 독파되고 있었다.

 이 독서회에서의 강연이 인연이 되어 그녀는 내강의를 청강하게 되었고, 흥미를 들인 끝에 3박4일 독서 여행 -하루 12시간 공부에 3시간 산행으로 짜인-에 동행하는 열성까지 보였다. 게다가 위화감에 대한 내 염려를 불식시키듯, 그녀는 열다섯 살 아래 학생들과 그야말로 화이부동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었고, 급기야 그녀의 행태와 생각이 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선애씨는 때론 토론을 압도하는 기량과 순발력을 보이면서도 늘 학생 분수(?)에 충실해서 두루 인간적인 호감과 신뢰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지적 능력도 웬만한 학자를 무색케 했지만, 정작 내게 인상적이었던 점은 공부를 향한 그 열성의 집요함이었다. 사정을 들으니, 학문과 인문적 성숙의 가치를 이해하는 남편의 배려와 아이들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가사에 결코 부실하지 않은 그녀가, 학점의 잣대도, 취업의 구실도, 생계의 조건도 아닌 인문학 공부를 위해 적은 시간과 에너지를 쪼개고 또 나누는 모습은 ‘인문학의 위기’를 떠들어온 내게는 정겨운 상징으로 다가들었다.

 나는 그간 물질적 ․ 남성 중심적 근대화를 인문학적 감성과 성숙으로 제어하고 보완할 ‘심층 근대화’를 주장하면서, 앎과 삶의 소외와 배리를 치료할 수 있는 정신문화적 자생력 배양에 미력을 바치는 중에, 신사임당이나 유관순 ․ 황진이나 전혜린 등을 아득히/튼튼하게ㅜ 넘어설 새로운 여성상을 아쉬워하곤 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여학생’과 ‘주부’사이, 즉 학교의 안팎을 다시 이어주는 삶의 모델들을 고대하면서 몇몇 여성 시인들을 만나 그 아쉬움의 일단을 채우기도 했는데, 이런 뜻에서 ‘가정 주부’ 선애씨의 출현은 내게 매우 시사하는 바가 컸던 것이다.

기득권 남성들, ‘여성의 역습’에 주목해야
  그러나 정작 내가 이 글의 토양으로 삼았던 것은 선애씨라는 이름으로 호출될 여성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여성들은 ‘관습을 위해 창의를 희생하는 도덕적 사회’(니체)속에서 숨 죽이고 있지만, 차츰 그 숨결은 거칠어지고 그 음성은 단단해져 간다. 나는 근년 여러 경로로 이루어진 독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절절이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다수 남성이 산업전사형 인간으로 딱딱한(미끈한) 근대화(세계화)의 역군이 되어가는 동안, 주변부의 여성들이 물질적 근대화의 벽을 어렵사리 뚫고 인문적 성숙의 경지를 생활 현장에서 구체화하며 심층 근대화의 한 모델을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자 발표되는 각종 통계치는 이른바 ‘여성의 시대’-여성의 잠재적 능력이 충분히 활성화해 필시 기존 제도와 구조를 바꿀 정도의 틀바꿈이 가능해진 단계-가 구호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측케 한다.

 그 부작용으로, 아직은 산발적이지만 ‘여성의 역습’이 눈에 띄는데, 기득권 남성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않는 것이 왠지 불길하다. 우연찮게, 마광수 교수(KBS 2TV<파워인터뷰>와 소설가 이하천(<시사저널>)이 ‘여성의 복수’ 어쩌고 하는 것을 새겨들은 일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애씨가 공분(公憤)속에 개인의 곤혹과 좌절을 에둘러 표현하곤 하는 일이 새삼스럽다. 나는 사방에서 선애씨의 음성을 듣는다. 그 아픈 내력의 음성들은 마치 ‘주판을 뚫고 피어오르는 장미처럼’ 아름답고 기이하다.(jajay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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