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패자뿐인 ‘夢中之亂’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0.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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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 ․ MH ‘대권 쟁탈전’, 1~2차 왕자의 난 거치며 정몽헌 회장 역전승으로 일단락…‘왕회장’ 소유 지분 등 불씨 잠복

정몽헌 회장. 그는 한국 최대 재벌인 현대의 ‘대권’을 마침내 거머쥐는가.

 3월24일 전격 귀국한 정몽헌 회장은 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단 20분 만에 극적으로 뒤집기에 성공했다. 몽헌 회장은 형인 몽구 회장이 3월14일 시도했던 이익치 현대중권 회장 경질 인사를 ‘없던 일’로 만들었고, 더 나아가 몽구 회장을 그룹 회장 직에서 면하게 하는 조처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상황이 종료되는 듯 했다. 그러나 3월26일 몽구 회장의 기습적인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한 것이다. 이 날 오후 2시30분 조선호텔에서 몽구 회장의 대리인인 정순원 현대자동차 ․ 기아자동차 기획조정실장은 “경영자협의회 의장 직에서 정몽구 회장을 면하게 한 것은(그룹 구조조정위원회의)잘못된 발표다. 3월24일자로 발표된 명령을 3월26일잘 취소한다.” 라고, 후계 구도 번복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몽구 회장측이 ‘아버지의 이름’을 빌렸기 때문이다. 이들이 공개한 기안지에는 정명예회장 서명이 있었다(73쪽 상자 기사 참조). 이 날의 몽구 회장측 거사로 현대의 후계 구도는 다시 혼미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하루도 안되어 혼란은 일거에 잠재워졌다. 27일 오전 7시40분 긴급 소집된 것으로 보이는 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명예회장은 다시 다섯째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보도진에게 공개된 정명예회장의 육성은 이랬다. “앞으로 경영자협의회의장을 정몽헌 회장 단독으로 한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 등 여러 가지 일이 바쁘기 때문에 정몽헌 회장이 단독으로 경영자협의회 의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몽구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아시 한번 그룹 경영에는 관여하지 못한다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그 이유는 ‘자동차 등 여러 가지 일이 바쁘기 때문’, 1996년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른 몽구 회장은 이제 현대 ․ 기아 자동차 회장일 뿐 ‘현대 회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할 수 없는 ‘비운의 왕자’로 급전직하했다. 몽구 회장도 27일 경영자협의회에서 ‘항복 선언’에 가까운, “정몽헌 회장과 각사가 협조해 좋은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라는 말을 남기고 급히 자리를 떴다.

“MK측 인사들의 빗나간 충성심이 참사 불렀다”
  몽구 ․ 몽헌 회장은 1998년부터 경영자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아왔다. 경영자협의회는 현대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 이제 몽헌 회장은 유일한 현대회장이 되어 그룹 경영을 총괄하게 되었다. 이른바 왕회장의 후계자로 완전 ‘등극’한 것이다. 24~27일 현대가(家)에서 벌어진 한편의 드라마는 ‘현대의 왕회장이 통치한다’는 말을 재확인시켰다.

 몽헌 회장은 27일 ‘중요한 일은 배후에 있는 저와 위논하며’라고 명예회장이 언급한 대로 아버지의 ‘수렴청정’을 받아가며 그룹을 이끌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룹구조조정위원회 김재수 위원장에 따르면, 몽헌 회장은 4월 초순께 명실상부하게 현대 회장으로서 경영 방침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이 자리에는 이번 경영권 분쟁으로 국민들과 소액주주 ․ 국내외 금융기관 등 현대 관련 이해 관계자에게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내용의 사죄도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정명예회장은 왜 형제간 대권 다툼의 시발점이었던 ‘이익치 인사’를 단순히 되돌리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몽구 회장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회장 직함 박탈 조처’를 내렸을까.여기에는 문책 성격이 깔려 있다는 것이 현대 사람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까지도 그룹 구조조정위원회는 6~7월게 자동차 소그룹이 분리되더라도 공동의장제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설명했다.

 설사 정명예회장이 공동의장제를 허물어뜨릴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동차 소그룹이 분리되는 시점을 택했을 것이다. 잡음을 최소화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영권을 이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단순한 전문 경영인 인사가, 더욱이 현대에서는 별것도 아닌 일이 왜 그룹 경영권 향방을 좌우하는 사안으로까지 비화했을까. 이번 사태는 3월14일 저녁 8시32분<연합뉴스>에 인사 사실이 보도되면서 점화되었다.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 현대자동차가 대주주인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옮기고 현대증권 사장 자리에 MK직할 회사인 현대캐피탈의 노정익 부사장이 옮겨간다는 사실이 갑자기 타전된 것이다. 이 소식이 뜨자마자 그룹PR사업본부에는 이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출입 기자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증권은 현대상선이 대주주여서 상선의 대주주인 몽헌 회장이 관장하는 회사로 알려져 있는데, 몽헌 회장이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 최고위급 인사 내용이 불거진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룹의 공식 발표는 나오지 않았다. 15일 ‘지상 발령’사실을 미국에서 접한 몽헌 회장이 불같이 화를 내며 김재수 위원장에게 ‘인사 보류’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15일부터 MK ․ MH 진영간 갈등은 갈수록 노골화했다. 몽헌 회장의 귀국이 늦어지면서 양축의 갈등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MH측 현대증권에서는 대주주(몽헌 회장)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이런 해괴한 지상 발령 인사가 나올 수 있느냐며 MK측의 ‘야음을 틈탄 쿠테타’라고 몰아붙였다. 이들은 언론 플레이 진원지로 현대자동차측을 지목했다. 반면 자동차측은 정명예회장이 재가한 인사 내용을 몽구 회장이 그룹 국내 부문 회장 자격으로 구조조정위원회에 지시했는데도 MK측이 항명하고 있다며 맞받아쳤다.

 양 진영의 반목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인사 파동은 잠복했던 경영권 다툼을 물위로 끌어올렸다.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는 MK진영이라는 것이 증평이다. MH측의 한 인사는 “MK측 인사들의 빗나간 충성심이 부른 참사로, 실패한 쿠데타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MK측은 왜 스스로 묘혈을 팠을까. 그룹의 한 인사는 MK측이 자동차 소그룹 분리를 앞두고 위기감을 느낀 것 같다고 분석했다. 명예회장과 몽헌 회장의 신임을 등에 업고 사사건건 몽구 회장의 발목을 잡으려는 이익치 회장을 거세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금융업을 차지하려는 구상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외국 자동차 회사들에서 보듯이 자동차 사업이 대규모 자금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도리어 이번 사단으로 몽헌 회장은 금융업도 확실히 자기 영토로 만드는 개가를 올렸다. 현대의 금융 관련 계열사는 현대증권과 투자신탁증권 ․ 투자신탁운용 ․ 생명 ․ 캐피탈이다. 자동차 할부 자금을 빌려주는 캐피탈은 일찌감치 몽구 회장에게 귀속되었지만, 다른 회사는 똑 부러진 주인이 없는 상태였다. 현대그룹에서 금융업을 장악하는 것은 지분 구조로 보아 현대증권의 최대 주주가 되면 끝난다. 현대증권이 현대투자신탁증권과 현대생명보험의 최대 주주이기 때문. 결국MK진영은 작은 것(금융업)에 욕심내다 큰 것(그룹 경영권)을 빼앗기고 만 셈이다.

‘제3차 왕자의 난’ 일어날까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MK진영은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며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제3차 왕자의 난’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주장이 MK측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현대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재계 인사는 “일단 몽헌 회장이 유리하게 된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 현대에서 경영권 분쟁이 종식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일단 정명예회장은 가문과 비즈니스를 분리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최근 42년 동안 살았던 청운동 집을 사실상 장자인 몽구 회장에게 물려주어 가문의 법통을 잇게 하고, 그룹 회장 자리에는 5남인 몽헌 회장이 앉게 했다. 절묘한 교통 정리인 셈. 그런데도 아직 경영권 분쟁이 일어날 여지가 있다는 관축이 사그라들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바로 정명예회장 소유 지분을 누가 갖느냐 하는 문제가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탓이다.

 정명예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자이자 두 회장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두 아들은 물론 모든 현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실질적 힘은, 정명예회장이 명실상부하게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경영권 장악의 핵심은 그가 현대그룹의 지주 회사 격인 현대중공업(11.56%)과 현대건설(4.58%)의 최대 주주라는 데 있다. 그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은 자동차 ․ 전자 ․ 종합상사 ․ 증권 ․ 고려산업개발의 1~2대 주주이다. 중공업을 지배함으로써 간접으로 다른 주력 회사들까지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정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의 모체인 현대건설의 최대 주주라는 사실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대건설이 ․ 상선 ․ 자동차 ․ 중공업의 2~3대 주주라는 점에서 두겹으로 지배 그물망을 쳐놓고 있다. 이뿐인가. 정명예회장은 건설 최대 주주 자격으로 증권 ․ 전자의 최대 주주인 상선을 간접 지배하고 있다.

 아버지에 비하면 두 아들이 갖고 있는 직접 지분은 보잘 것 없다. 몽구 회장은 자동차 소그룹의 주인이지만, 자동차 지분은 4.01%밖에 안된다. 몽헌 회장도 건설과 전자 지분이 각각 3.74%, 1.69%밖에 안된다. 물론 이들도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다른 계열사를 자동차 ․ 전자의 최대 주주로 만들어 외부 사람이 적대적 매수를 할 가능성은 원천 봉쇄해 놓았다.

 그러나 아버지 지분이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따라 후계 구도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적으로 말해 몽헌 회장도 완전히 안심할 처지는 못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업을 갖고 그룹 경영권 어쩌고 하는 것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다. 최대 변수는 현대중공업이다”라고 단언했다. 정명예회장 다음으로 현대중공업위 지분을 많이 가진 사람은 6남인 현대중공업 고문(국회의원)이다. 하지만 그의 경우 재산 분할 차원이지 경영권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정명예회장의 소유 지분 향방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물론 늦어도 2003년까지 진행될 지분 정리 상황에서 현재로서는 몽헌 회장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현대 회장으로서 앞으로 벌어질 계열 분리 작업에 주도적인 권한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1998~1999년 기아자동차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올해부터 2003년까지 그룹을 자동차 ․ 건설 ․ 전자 ․ 중공업 ․ 금융 및 서비스라는 5개 전문 소그룹으로 분리해 사실상 그룹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자동차 소그룹은 현대자동차 ․ 기아자동차 ․ 현대정공 ․ 인천제철 ․ 현대캐피탈 등 5개 관계사로 그룹내 매출 비중이 30%선에 달한다. 정식 분리 시점은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는 올 6~7월께가 되겠지만, 모구 회장이 그룹 회장 자리에서 밀려남에 따라 사실상 이미 분리된 것과 다름없다. 나머지 27~28개 계열사 가운데 어느 회사를 어느 소그룹에 넣을지, 실타래처럼 얽힌 계열사간 지분을 어떻게 정리할지 하는 복잡 다단한 작업을 몽헌 회장이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민감한 사안은 중공업 소그룹 분리 건이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정명예회장 소유 지분 향방이 어떤 식으로든 가닥 잡힐 공산이 크다. 물론 정명예회장의 ‘유언장’에서 뚜껑이 열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룹 이미지 대폭 실추… 후유증도 심각
 형제간 경영권 싸움은 일단 수습 국면에 들었지만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다. 우선 현대의 한 부장이 ‘망신살이 뻗쳤다’고 심란해 하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그룹 이미지가 크게 나빠졌다. 대외 신인도도 악화할 것이 분명하다. 한 경영학 교수는 “현대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즌근대적인 경영 형태를 보였다. 오너의 전횡이라는 재벌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인데, 이런 기업이 디지털 환경과 전지구적 경쟁 시대에 과연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의문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재벌 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지고 이 참에 정부가 압박 조처를 취하지 않을까 하는 점도 걱정했다. 이미 청와대에서 26일 다시 경영권 분쟁이 일자, 현대측에 강력한 경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일각에서도 그룹 이미지를 실추시킨 주동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숙청론’이 제기되는 등 이번 파동의 후유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세기가 바뀐 2000년, ‘현대’에서는 그 이름과 너무나 동떨어지게 봉건 왕조 시대에나 있을법한 ‘전근대적’ 경영 형태가 빚어지고 있다. 이번에 전국민 앞에 생생하게 방영된 ‘현대 왕국’ 대권 다툼 드라마는 바로 그 단적인 증거였다. 왕회장을 비롯한 현대의 오너들은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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