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마을 없는 지자체 없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6.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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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심·성과주의 겹쳐 ‘우후죽순’…재정난 탓에 ‘부실 교육’ 부를 수도
 
4월7일 현재 영어 마을은 전국에 걸쳐 열두 곳이 운영되고 있다(쪽 표 참조). 여기다 앞으로 열네 곳이 문을 더 연다. 부산 글로벌 빌리지, 대구 영어 마을, 인천 서구 영어 마을, 대전 영어문화 체험마을, 수원 영어 마을, 익산 영어 체험학습 수련원, 무안군의 남악신도시 영어체험 마을, 여수시 외국어교육센터, 목포 영어체험 학습장 등이다.

가히 방방곡곡에 영어 마을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열풍 뒤에는 영어 교육열뿐 아니라, 자치단체 사이 경쟁과 생색내기식 성과주의도 자리 잡고 있다.

영어 마을 원조는 경기도이다. 영어 마을은 손학규 지사의 역작이다. ‘경기도의 청계천’인 셈이다. 그는 2002년 지방선거 때 영어 마을 설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당선하자마자, 태스크포스 팀을 꾸렸다. 이 팀은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를 더 고민했다. 독자적인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만 4억5천만원을 썼다. 탄탄한 소프트웨어를 마련하고,  파주에 하드웨어를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영어 마을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던 손학규 지사는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바로 서울시 이명박 시장이다. 당내 대권 경쟁자인 이시장이 영어 마을을 짓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2003년 강북 발전의 일환으로 강북에 들어설 뉴타운에 영어 마을을 만들겠다고 하자, 경기도는 계획을 수정했다.

영어 마을 1호점을 이명박 시장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그래서 파주에 영어 마을을 조성하는 대신, 부랴부랴 안산 대부도 공무원 연수시설을 리모델링했다. 서울시도 추격에 속도를 냈다. 영어 마을 설립지를 강북에서 강남으로 바꾸었다. 이런 시소 경쟁 끝에 2004년 8월, 경기도 안산에 영어 마을 1호가 들어섰고, 12월 서울 풍납 영어 캠프가 문을 열었다.

최근에도 경기도와 서울시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 지난 3월27일 서울시는 수유 영어 캠프를 열었다. 4월3일 경기도 파주 캠프가 문을 열기 1주일 전이었다. 경기도 영어 마을 관계자는 “우리가 문을 연다니까, 서울시가 서두른 것으로 안다. 서울시는 영어 마을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숙박 시설도 없이  문을 열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숙박은 오는 6월부터 가능하고, 파주 영어 마을과는 무관하게 계획대로 개원했다고  밝혔다.

 
선발 주자인 경기도와 서울시는 다른 자치단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경기도와 서울시 영어 마을은 운영 형태가 다르다. 직영 체제인 경기도는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다른 자치단체에 제공했다. 성남·안산·하남·화성 시와 경상남도 창녕군·남해군, 전라남도 광양시 등이 경기도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반면 서울시는 위탁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 풍납 캠프는 헤럴드 미디어, 수유 캠프는 YBM에듀케이션이 맡고 있다. 앞으로 문을 열 인천 서구 영어 마을을 비롯해 상당수 자치단체들이 민간 위탁 체제를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자치단체들은 영어 마을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모두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다. 바로 재정 문제다. 경기도의 경우 파주 영어 마을 캠프를 만드는 데만 토지 매입비를 포함해 9백97억원이 들었다. 매년 운영비만 1백50억원에 달한다. 당분간 적자 운영이 불가피하다.

경기도는 재정 자립 목표 시기를 2010년으로 잡고 있다. 파주 캠프를 영화 광고 세트장으로 빌려주거나 옥외 광고판을 유치해 푼돈이나마 벌어들일 작정이다. 교육방송(EBS)과 제휴해 영어 교재를 판매하고, 타이완이나 일본에 영어 마을 프로젝트를 수출해 목돈을 마련할 계획도 짜고 있다. 하지만 재정 자립이 계획대로 이루어  질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그래서 영어 마을을 추진하는 지방자치단체 대부분이 서울시 모델인 민간 위탁을 선호하고 있다. 재정 걱정을 덜기 위해서다. 위탁 체제를 꾸린다 해도 문제는 자치단체가 어느 정도 운영비를 보조하지 않으면, 영어 마을이 사교육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위탁을 맡은 기업들은 적자를 메우기 위해 수강료를 올리거나, 수강료를 올리지 않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울 영어 마을도 지난해 수강료가 12만원이었는데, 올해 서울시 지원액이 줄어들자, 수강료를 16만원(5박6일)으로 올렸다. 서울시 영어 마을 풍납 캠프의 강인원 본부장은 “연간 수십억원을 지원할 재정 능력이 안 되는 자치단체라면 영어 마을을 하지 않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1억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영어 마을 조성?

실제로 의욕만 앞선 자치단체들은 안정적인 재정 확보도 하지 않고 강행하는 경우가 많다. 자치단체 사이에 불붙은 경쟁 때문이다. 올 여름에 개원할 예정으로 영어 마을을 준비하는 한 자치단체 담당자는 “바로 이웃 자치단체가 하는데, 우리라고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기존 시설을 리모델링하고, 민간에 맡겼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자치단체는 영어 마을 조성을 위해 편성한 예산이 1억원을 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김진표 교육부 총리의 영어 마을 설립 중단 발언이 생뚱맞지만은 않다. 준비 없이 영어 마을을 만들 바에야, 그 예산으로 학교에 원어민 교사를 배치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 교육부 주장이다.

교육부 자료(2005년 12월 말 기준)에 따르면 실제로 대구·울산·강원·경북 지역 초등학교에 배치된 원어민 교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영어 마을 설립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나머지 지역도 마찬가지다.

충남(1명)·충북(2명)·경남(2명)·인천(4명)·광주(4명)·제주(5명) 지역 초등학교에 배치된 원어민 교사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이런 열악한 현실이기에 교육부는 자치단체가 원어민 교사를 확보하는 데 더 많은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양질의 원어민 교사만 확보한다면 공교육 체계에서도 영어 마을과 비슷한  학습 효과를 올릴 수 있다. 지난 3월2일 문을 연 서울 역삼초등학교의 미니 영어 마을은 좋은 모델이다.

서초구청과 강남구청이 지원해, 기존 교실을 미니 영어 마을로 꾸몄고, 원어민 교사를 배치했다. 재정이 열악한 자치단체라면, 벤치마킹할 만한 ‘학교 안의 영어 마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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