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사냥꾼’을 사냥하다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06.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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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키워드] 할리우드 자유주의:<굿 나잇 앤 굿 럭> <브이 포 벤데타>

 
부시 행정부 2기 출범 후 두 번째로 지난 3월5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은 다소 김빠지는 분위기였다. 최고 화제작인 <브로크백 마운틴>이 작품상에서 탈락하고 영화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남녀 주연상이 예상대로 모두 전기 영화(<카포트> <앙코르 워크 더 라인>)에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만개한 할리우드 자유주의의 잔치가 되리라는 전망을 크게 엇나가진 않았다.  숀 펜이나 마이클 무어 같은 열혈 참여파들의 독설은 없었지만, 후보작들의 전반적인 배치 자체가 미국의 호전적인 반테러주의와 패권주의, 부시 행정부 집권 5년에 대한 할리우드의 거대한 논평이자 발언이라고 해도 좋을 법했다.

작품상을 받은 <크래시>만 해도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백인·흑인·히스패닉뿐 아니라 아시아계 중에서도 한국인 중년 부부까지 끌어들여 미국의 인종 갈등을 묘파(描破)한 영화다. 그만큼 최근 할리우드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애국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보수주의에 반하고 개인과 언론의 자유, 인종적·성적 다양성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 (반미)자유주의적 성향이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리안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긴 <브로크백 마운틴>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동의 석유 이권을 둘러싼 정치·기업 스릴러인 <시리아나>나 아프리카 민중들을 착취하는 다국적 제약 회사와 영국 정부의 커넥션을 그린 <컨스턴트 가드너>(두 작품에 출연한 조지 클루니와 레이첼 와이즈가 각각 남녀 조연상을 수상했다) 등도 이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오스카 트로피는 가져가지 못했지만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무려 여섯 부문 후보에 올랐던 <굿 나잇 앤 굿 럭>(16일 개봉)은 할리우드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로 남아 있는 1950년대 매카시즘 시대를 비판적 시선으로 그린 영화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온 할리우드 소신파 배우 조지 클루니가 연출하고 조연까지 겸한 이 작품은 1950년대 반공산주 마녀사냥의 진원이었던 조셉 R. 매카시 상원의원을 정치적으로 고꾸라뜨림으로써 언론 자유를 수호한 CBS 앵커 에드워드 R. 머로의 실화를 담았다.

‘할리우드의 악몽’이 된 매카시즘 고발

광고주와 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머로가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인 <시 잇 나우>(See it now)를 통해 매카시와의 정치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미국 민주주의 언론의 상징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단순하지만 섬세한 연출력으로 묘사된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결성해 의회는 물론 공직과 연예계·언론계 등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무차별적으로 ‘빨갱이 사냥’을 벌이던 매카시에 대항해 머로는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의 날조된 근거와 주장을 폭로한다. 조지 클루니 감독은 머로의 주변에서 때로는 절망하지만 결국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언론의 사명감을 바탕으로 연대하는 다양한 언론인들의 모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다.

“국무성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2백여 명 침투해 있다”라는 말로부터 시작된 매카시즘은 사실 할리우드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많은 감독·제작자·영화배우가 청문회에 불려가 ‘사상 검증’을 강요받았다. 게다가 동료들을 ‘반미 공산주의자’로 고발하지 않으면 자신도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였다. 사상 검증을 거부한 에드리언 스콧, 새뮤얼 와츠, 에드워드 드미트리, 허버트 비버먼 등 유력 영화인들이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고, 찰리 채플린, 오손 웰스, 프랭크 카프라 등이 외국으로 추방되거나 영화계를 떠나야 했다.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 수상자인 엘리아 카잔 감독이 무대 위로 걸어나오자 객석은 기립 박수를 치는 쪽과 팔짱을 끼고 야유하는 영화인들로 양분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엘리아 카잔이 반미활동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동료들의 이름을 공산주의자로 고발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세기 넘어까지 그 후유증이 계속될 정도로 골이 깊고 상처를 남긴 매카시즘은 할리우드로서는 악몽의 시간'이었다.

이 악몽에 대한 공포를 미래형으로 표현한 것이 공상 과학 영화 <브이 포 벤데타>(3월17일 개봉)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가 각본과 제작을 맡은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자유주의를 훨씬 더 전투적이고 과격하게 반영한다.

미국이 일으킨 제3차 세계 대전이 미국의 패망으로 끝나고 영국이 절대 패권을 가지게 된 2040년. 영국 사회는 정치적·성적·인종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지배된다. 파시스트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은 비밀에 싸인 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진다. 주인공 ‘브이’는 이 수용소에서 모종의 실험 중 괴력을 얻게 된 무정부주의자. 그는 17세기에 실존했던 영국인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자신을 파멸시킨 파시스트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한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의회와 왕이 속한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끝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의사당에 거대한 화약을 설치했지만 실패했던 혁명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정치적 발언은 훨씬 더 직접적이다. 사적인 복수심과 민중 혁명에 대한 열망이 섞여 있는 ‘브이’라는 캐릭터는 미국 영화에서 흔히 그려냈던 개인주의적이거나 애국주의적인 슈퍼 히어로와는 다른, 독창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할리우드의 흐름은 9·11 테러 후 유력 영화인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정부 정책에 협조할 것을 당부했던 부시의 정치 보좌관 칼 로브를 상당히 무색하게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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