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갈 길을 묻다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06.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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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아버지 되기에 대한 성찰:<브로큰 플라워> <돈 컴 노킹>

 
‘소년은 자라서 아버지가 된다’. 자연 법칙을 따르는 공리(公理)같은 단순한 문장이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다소 피곤한 정신적, 사회적 시스템의 가동이 필요하다. 종종 시스템은 장애를 일으키고 예술은 소년의 삶에 잠복한 실패의 징후를 포착해왔다. 무릇 많은 예술 작품에서 소년은 아버지를 모르거나 부정한 연후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법을 배우게 되고 아버지가 되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이름 붙여진 이 과정을 아버지의 입장에서 읽어보자. 아들을 버린 아버지는 자신의 씨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부인당한 연후에야 비로소 아버지로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미국 독립영화의 아이콘 짐 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와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은 공히 아버지 되기가 무척 어려워 보이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공교로운 것은 두 영화 모두 화려한 젊은 날을 보내고 쓸쓸하고 황량한 말년을 맞은 중년 남자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아들이 세상 어디엔가 있다는 소식을 불쑥 전해 듣고 아들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두 영화는 하나의 동일한 모티브를 두 명의 감독이 각기 다른 스타일과 내러티브(언어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든 종류의 서사성을 포함하는 이야기 개념)로 구성해 찍은 영화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극의 흐름을 보여준다. 두 감독은 삶에 대한 성찰을 길에 대한 사유와 메타포(은유)로 표현해왔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두 작품은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도 만났다.

둘 중 <브로큰 플라워>가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멍청한 표정으로 거실에서 <돈 주앙의 사생활>이라는 1930년대 흑백 영화를 보고 있는 돈 존스턴이라는 한 중년 독신남(빌 머레이)에게 분홍색 봉투의 편지가 도착하고 동거하던 젊은 애인(줄리 델피)이 때맞춰 이별을 고한 뒤 집을 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에 담긴 내용은 열아홉 살 된 그의 아들이 존재한다는 것. 탐정을 자처하는 이웃의 유일한 친구 윈스턴의 부추김으로 존스턴은 옛 여인 다섯 명을 차례로 찾아간다. 과연 누가 아들의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실마리는 분홍색 봉투라는 것과 타자기로 씌어진 편지의 글씨체뿐. 결혼을 거부하고 관계를 회피하던 이 중년 남자는 아들이라고 추정될 만한 청년을 두엇 만나지만 영화는 누가 그의 진짜 아들인가에 대해 답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감독은 빌 머레이의 실제 아들을 카메오로 출연시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아버지 되기의 끊임없는 어려움

돈 존스턴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다. 발신인 불명의 편지(라캉의 ‘도둑맞은 편지’ 분석을 연상시킨다), 돈 주앙과 돈 존스턴, 그의 친구 윈스턴, 옛 연인이 기르는 고양이 윈스턴, 가짜 아들과 실제 아들, 징후(실마리)를 통한 분석(해몽). 이 영화는 중년 남자의 가족 찾기라는 추리극의 표면에 기표와 기의의 놀이를 숨겨놓고, 시스템 교란에 의해 한 남자가 아버지 되기에 실패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에 비해 <돈 컴 노킹>은 남자의 어리석음, 그리하여 삶의 어리석음까지 긍정하는 능청스럽지만 빛나는 여유와 통찰을 담고 있는 영화다. <브로큰 플라워>가 무표정으로 대응하는 ‘중년의 위기’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라면 <돈 컴 노킹>은 어리석은 낙관에 대한 유머러스한 긍정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하워드 스펜스(샘 쉐퍼드)는 소년에서 성장이 멈춘 노인(그는 여전히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이다. 한때 서부극 영화를 주름잡는 스타였지만 술과 마약, 여자에 파묻혀 젊은 날을 보내고 퇴락한 지 오래다. 어느 날 자신이 주연인 영화 촬영을 뒤로하고 아무런 말도 없이 고향을 찾은 하워드는 어머니로부터 이제껏 자신이 몰랐던 아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억을 더듬어 옛 애인을 찾아 떠난다.

그는 옛 애인도, 아들도 찾게 되지만 청년은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아주 인상적인 장면은 그와 아들이 토닥거리며 싸우는 장면이다. 이는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소년이자 아버지인 한 남자와, 유년기에서 성장이 멈춘 또 한 남자이자 아들인 청년, 그러니까 두 소년의 치기어린 싸움이다. 이 영화는 세심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을, 깔끔한 응대보다는 차라리 허술한 배려를, 근심보다는 웃어넘기는 넉살을 갖춘 작품이다.

때로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으로 때로 깨달음의 과정으로 ‘길’을 그려온 60대 전후의 두 거장이 황혼이 짙은 그 길의 끝에서, 아들을 찾아 떠나는 중년 남자의 여행을 다뤘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그렇다면 이 두 편의 영화는 ‘우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보다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이 더 가까운 이들을 위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로드무비’의 끝에서 무엇을 어떤 표정으로 맞이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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