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시대 재조명, 朴正熙의 마지막 도박
  • 金珍培(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89.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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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국면 탈출 위해 극비리에 직선제 개헌 구상

故 朴대통령이 살해된지 10년,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그의 功過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가 종신집권을 기도하지는 않았었다는 주장이 그의 측근들 입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암살되기전 몇 달동안 朴正熙대통령은 지쳐 있었고 핵무기개발과 긴급조치철폐 및 헌법개정을 통한 정국완화의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여보, 특보! 지금 물러나면 나보고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80년대초엔 틀림없이 우리도 핵무기를 갖게 돼. 그때에 맞춰서 정국완화 대비책을 마쳐야지. 헌법도 손질하고 긴급조치도 재검토하고∙∙∙” 朴대통령이 전용기 옆자리에 앉은 특별보좌관에게 넌즈시 자기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79년 여름 大田근교에 있는 연구단지로 향하던 짚차 안에서 5⋅16동지이기도 한 某장관에게도 “당신도 사범학교 나왔지. 이제 곧 핵무기만 개발되면 싹 풀어도 별 걱정 없겠지··· 美國사람은 믿을 수 없어. 우리가 자주국방태세만 갖추면 그때는 訓長을 하든지 시골가서 조용히 쉴 수 있겠지?” 그의 얼굴빛은 초조와 평온으로 엇갈려 있는 듯이 보였다고 한다.
  79년 10월 어느날 저녁, 朴대통령은 또 맏딸 槿惠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도 나이가 있으니까 능력이 한계가 있는 것같아. 밀레의 ‘晩鍾’을 봐라. 그렇게 유명한 화가고 좋은 그림이 많이 있겠지만 후세의 사가로부터 칭찬받는 그림은 ‘이삭줍기’나 ‘晩種’밖에 없지 않나. 나도 이제 晩年의 설계를 세우고 있는데 美國은 우리가 다른 일 꾸미나 해서 핵무기개발을 방해하고 성급한 국민들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니∙∙∙”
  핵무기개발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新任 카터 美國대통령이 직접 핵무기개발 중지를 요구하고 국무장관 국방장관등이 잇따라 來韓, 관계자들에게 저의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駐韓 美대사와 駐韓 美8군사령관이 핵개발연구단지를 한달에도 몇 번씩 공중시찰할 정도였다. 朴東宣사건이나 靑瓦臺도청시비도 실상 인권문제 못지 않게 핵무기개발 중지에 대한 압력으로 당시 靑瓦臺와 정부당국자들은 보고 있다. 朴대통령 각료이자 측근의 한사람은 78년 4월 大韓航空 여객기가 소련 제트기의 총격으로 무르만스크 남쪽 2백마일 지점의 빙판에 강제착륙하게 된 사건도 실상 핵폭탄의 원료를 프랑스로부터 구입 수송하는 계획을 탐지한 美⋅蘇정보기관의 공동작전으로 보고 있다. 영공침범이라는 중대한 침해행위에도 불구하고 기장과 항법사를 제외한 탑승자 전원을 8일뒤에 송환했으며 사망자도 두사람 뿐이었다. 美國의 압력과 회유가 거세면 거셀수록 朴대통령의 집념은 더욱 강했다. 朴대통령은 국가의 자립과 자주를 위해 핵개발이 불가피하다고 공언을 해왔으며 어찌나 초조했던지 밀짚모자나 방한모를 깊숙하게 눌러 쓰고 짚차편으로 핵개발 연구단지를 측근조차 몰래 달려가 연구진들을 격려하며 성공의 D데이를 체크해왔다.
  “그건 언제 될 수 있다고 봅니까?”
  “각하, 몇 달안에 성공할 것으로 봅니다”
  ‘몇달안에’라는 연구책임자의 말에 대통령은 그들을 하나하나 덥썩 끌어안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대통령의 오른손 주먹이 두볼을 닦아 내렸다. 손수건을 꺼낼 여유조차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한 목격자는 전했다.
  78년 9월 핵연구팀이 개발한 중장거리유도탄은 시험기지에서 발사에 성공했다. 이 성공으로 한국은 7번째의 핵보유국이 되었다. 핵원료의 대량확보만이 남은 과제였다. 美國의 압력은 핵원료의 구입방해에서 사정거리의 제한에 이르도록 거의 전면적으로 손이 뻗쳤다.
  “앞으로 몇 달안에” 연구팀의 이말은 이제 귓전을 스치고 지나간 역사의 파편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의 종말과 함께 핵무기개발은 거의 중단되고 만 것이다.
  79년 4월에 나온 美國 부루킹스 연구소의 한 보고서는 “한국은 85년엔 소규모의 방위용 핵군사력을, 2,000년엔 보다 주목되는 핵군사력을 보유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79년의 정국은 朴正熙정권을 안팎에서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朴正熙의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반체제세력의 도전은 더욱 강렬해져갔다. 민심은 벌써 朴正熙편을 멀리 떠나 있었다. 5⋅30 新民黨 전당대회에서 金泳三 총재의 극적인 재등장, 6⋅29 카터 美대통령과 朴대통령과의 靑瓦臺회담에서의 不和, 8⋅11 YH 여공들의 新民黨舍 농성, 10⋅4 국회 본회의에서의 與黨 단독 金泳三 의원 제명, 드디어 維新철폐를 요구하는 학생데모 진압을 위한 10⋅18 釜山 계엄령선포.
  이 가파른 고비에서 朴正熙대통령은 비상탈출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정권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79년 10월 중순의 어느날 金載圭정보부장이 정보보고를 들고 왔다. 상황은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급한 것은 대책이었다.
  - 어떻게 하자는 거요?
  “특별긴급조치를 포고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 어떻게?
  “잡았다 풀었다하니 정부의 위신이 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 범법자는 극형에 처하도록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각하!”
  - 거 무슨 소리를, 긴급조치를 발동해도 안되는데 뭐 특별긴급조치라고 소용있겠오. 다른 대책을 세우시오.
  그 며칠뒤 靑瓦臺 시국대책회의. 정보부의 보고문서는 다른 때의 보고문서보다 조금 두꺼운 공판으로 타자한 20장 안팎의 분량이었다. 결론부문에는 緊急措置나 체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씌어진 말은 퍽 조심스런 것이었지만 긴급조치나 체제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조차 금지되어온 상황에서 이것은 대담한 지적같았습니다.” 시국대책회의에 참석했던 당시의 한 멤버는 최근 필자에게 이렇게 전했다. 대통령은 이러한 정보부장의 보고를 듣고 나서 “다음 국무회의에서 보고하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시국대책회의에서 보고된 내용을 그대로 국무회의에서 보고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문서는 朴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휴지가 되고 말았다.
  朴대통령의 정국완화를 위한 개헌구상은 그가 죽기 전부터 극비리에 몇갈래로 추진되었다. 하나는 대통령 법률담당특보, 다른 둘은 靑瓦臺비서실과 情報部관계자에게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申稙秀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진 것은 그가 이른바 朴東宣사건으로 정보부장을 물러나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은 얼마뒤 법률담당특보라는 새로운 자리를 만들면서까지 정국전반을 완화하는 방향에서 개헌하는 작업을 지시했다. 약 2개월의 작업끝에 만든 1차보고는 헌법개정 기본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靑瓦臺 비서실장 金正濂씨는 이사실을 기자에게 확인하였으며 당사자인 申稙秀씨 또한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핵무기의 개발로 자주국방이 확고해지는 80년초 적당한 시기에 긴급조치 철폐와 함께 직선제개헌을 하자는 방향” 이었다고 정통한 소식통은 전했다. “다른 두갈래의 개헌요강 또한 기본적인 권력구조나 대통령 선출방안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로 안다”고 이 소식통은 덧붙였다.
  이러한 개헌작업지시는 朴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그의 딸 朴槿惠씨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靑瓦臺비서실에 계시던 張씨가 문상 오셨다가 하시는 말씀이 각하께서 개헌건의안을 만들어보라고 해서 만들었는데 각하께 드리지 못하고∙∙∙ 하며 울먹이셨어요”
  維新헌법은 위기극복을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을 뿐 영구집권의 도구는 아니었다는 것이 朴대통령 측근들의 견해다.
  이러한 견해에는 반론도 없지 않다. 과연 朴대통령이 참으로 정국을 완화시키려 했을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핵무기개발을 전제로 하는 한 마치 북쪽으로부터의 위협을 내세워 사실상 維新체제를 연장하거나 더 가혹한 독재의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컸지 않았겠느냐는 반론이다.
  “개헌구상∙∙∙ 그건 믿기 어렵지요. 벌써 維新 1기(72∼78년)만하고 그만 두시겠다던 분이 그대로 維新 2기까지 내디딘 마당에 발걸음에 가속이 붙으면 붙었지 방향을 틀 생각이 있다고 보기 어렵지요” 朴正熙정권 출범때부터 당과 정부의 고위요직을 거친 사람의 견해다.
  그가 무엇에 집념했고 무엇을 구상했던 간에 그의 ‘과욕’은 민주화를 서슴없이 짓밟고 말았다. 군사독재, 정보정치, 지역차별, 인권유린만이 아니다. 위기극복을 구실로 민주주의의 기본적 틀마저 송두리째 파괴해버린 朴正熙정권의 행적은 10년의 세월에 묻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듯하다.
  그에 못지 않은 군사문화의 상속자들이 할퀴고 간 쓰라린 상처가 더 생생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부심을 불러 일으킨 朴正熙에 대한 새로운 시각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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