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명계남을 위한 헌사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06.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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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오마주:<손님은 왕이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출소 후 일하는 빵집의 이름은 ‘나루세 빵집’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손꼽히는 일본의 대표적인 1세대 영화 감독이다. 그는 도쿄 빈민가를 무대로 한 염세적인 서민극을 주로 만들었으며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많아 ‘여성 영화 감독’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작 ‘올드보이’에서 미도(강혜정)가 유독 진실로부터 소외되어 남성 중심적인 텍스트가 아니냐는 비판이 내내 마음에 걸렸을 박찬욱 감독이 복수3부작 중 처음으로 여성이 주인공이 된 이 작품에서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오마주를 표한 것은 정말 그럴 듯해 보인다. 극중 빵집 주인 오달수는 빼먹지 않고 친절하게 “일본에서 제빵 기술을 배웠다”라고 말한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의 한글 제목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1978년작 영화 제목과 같다(復讐するは我にあり, 영문 제목은 Vengeance Is Mine).

이처럼 선배 감독이나 그의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대사 등을 작품에 인용하거나 삽입해 존경과 헌사를 바치는 오마주(homage)는 영화적 재미를 배가시킨다. 평균 정도의 관람 횟수를 가진 일반 관객들은 흔히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고 해도, 오마주를 통해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과 취향, 뿌리를 확인한다. 또 영화광들은 ‘숨은 그림 찾기’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오마주가 흥미로운 이유는 흔히 전 세대 영화에 대한 후 세대 작가들의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 오마주 통해 자신의 정체성 확인

팀 버튼 감독의 걸작 중 하나인 <에드우드>는 단순한 전기 영화가 아니라 1950년대의 대표적인 B급 영화 감독 에드우드에 대한 오마주다. 내러티브의 개연성과 작품 완성도를 철저히 무시한 에드우드 감독의 ‘빨리 많이 찍기 우선주의’를 통해 팀 버튼 감독은 기존의 영화적 개념을 해체한 B급 영화에 자신이 영화적 뿌리를 대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니 뎁이 분한 에드우드 감독은 극중 ‘드라큘라’의 단골 주연 벨라 루고시에 대한 오마주를 바친다.

이 외에도 선배 영화들에 대한 존경과 헌사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작품에 삽입되는데, 쿠엔틴 타란티노는 TV시리즈 ‘쿵푸’의 주인공 데이비드 캐러딘을 <킬빌vol.2> 마지막에 와서야 베일이 벗겨진 ‘빌’로 캐스팅함으로써 그와 쿵푸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바친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한 벨기에 다르덴 감독의 걸작 <더 차일드>의 마지막 장면은, 많은 감독들이 존경을 표한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소매치기>의 엔딩 신과 겹친다.

이와 같은 오마주가 영화적 농담이나 수사로 쓰이기 위한 필요 조건은 영화광 출신의 감독과 영화광인 관객들의 존재, 그리고 영화사적 맥락의 형성이다. 이런 점에서 한 영화 전체를 배우 명계남과 이창동 감독에 대한 오마주로 바친 <손님은 왕이다>는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흥미로운 텍스트다. 이는 한국 영화가 비단 산업적 규모뿐만 아니라 영화사적으로도 고유의 맥락(context)을 형성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손님은 왕이다>는 느와르와 스릴러에 충실하다. 어울리지 않게 예쁜 아내(성현아 분)를 두고 있는 이발사(성지루 분)에게 어느 날 ‘네가 한 추악한 일을 알고 있다’는 협박 편지가 전달된다. 이어 협박자(명계남 분)가 이발소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영화는 음모와 추리의 게임을 고조시켜간다. 이발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협박자가 가진 각각의 비밀들이 조금씩 밝혀지고 또 얽혀든다.

‘영화광 출신 감독 시대’ 알리는 텍스트

이발사가 협박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뒷조사를 의뢰한 해결사(이선균 분)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협박자가 조연급 연극·영화배우였음이 드러나고 그 순간 실제의 명계남 인생 스토리와 필모그래피(오래된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대를 반복시켜 화질이 떨어지는 효과를 낸 영화·<오아시스> <초록물고기> <생과부위자료청구소송> 등)가 영화에 직접적으로 삽입된다. 곧 음모와 사건의 열쇠는 협박자가 배우 명계남이라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명계남에 대한 오마주를 제외하고도 <앙달루시아의 개> <아마데우스> <터미네이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한국 영화 <오발탄>에 이르기까지 영화적 인용문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대중 영화일 뿐 아니라 ‘영화광을 위한, 영화광에 의한, 영화광의 영화’이기도 하다. 과장 섞어 말하자면 영화학도이기 이전에 이미 시네마테크를 들락거리던 마니아였던 시네필(영화애호가), 즉 본격적인 ‘영화광 출신 감독 시대’에 출현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손님은 왕이다>는 한 배우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스릴러라는 점에서 카우프만의 <존 말코비치 되기>와 곧잘 비교되곤 하지만 텍스트의 혼성 모방 혹은 인용을 꿰뚫는 독창성이 부족하다. 어차피 명계남을 소재로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뒤흔들 작정이었다면 차라리 정치적 활동과 관련된 명계남의 이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현재 기획되고 있는 영화 중에는 ‘이대근, 이댁은’도 있다. 이대근이 실명 그대로 출연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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