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관객 <왕의 남자> 신화 창조의 비밀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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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 공략·정치 풍자·동성애·호연 ‘네 박자’ 맞아

 
지난 주말, 영화 <왕의 남자>가 개봉 7주 만에 관객 1천만명을 넘어섰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은 세 번째 기록이다. 반복 관람하는 마니아 관객이 많은 등 뒷심을 발휘할 경우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까지도 넘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배급을 맡은 시네마서비스의 김재민 과장은 “1천만명을 돌파하면서 그동안 숨어 있던 관객이 몰리면서 마지막 장세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1천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 영화의 희망이 되었지만 개봉 당시만 해도 <왕의 남자>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킹콩>과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 <태풍>이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었고 함께 개봉한 <나니아 연대기>와 <청연>도 엄청난 물량 공세로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왕의 남자>는 관심 밖에 있었다.  

개봉 당시 <왕의 남자>는 세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연말 성수기에 개봉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블록버스터급이 아니라는 점, 티켓 파워를 가지고 있는 유명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다는 점, 장르가 젊은 관객들이 그리 선호하지 않는 사극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꼽혔다. 이런 약점 때문에 <왕의 남자>가 선택한 것은 1등도 2등도 아닌, 3등 전략이었다.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정공법으로 승부를 걸었다. 사극 냄새를 물씬 피우는 네 명의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고 영화를 홍보했다. 

연산군은 노무현, 공길은 유시민?

그러나 뚜껑을 열자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배급의 힘에도 스타의 힘에도 의지할 수 없었던 <왕의 남자>가 흥행 수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높은 관객 점유율을 보고 극장주들이 발빠르게 스크린 수를 늘려가면서 영화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그 결과 숨 가쁘게 흥행가도를 달렸고 이제 <왕의 남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기록을 달성했다. ‘웰 메이드 상업 영화’ 성공 사례로 전범을 보여주는 <왕의 남자>에 대해 이 영화 마케팅을 담당했던 ‘아침’의 정승혜 대표는 “<왕의 남자>는 은수저를 물고 개봉한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들과는 다르다. 진정한 천만명 영화다”라고 자평했다. 

<왕의 남자>는 5백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한국 영화 중에서 유일한 사극이며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한국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니다. 영화를 제작한 이글픽쳐스의 정진완 대표는 “1천만명이 참여한 문화 다단계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관객들의 자발적 입소문이 큰 힘을 발휘했다”라고 분석했다. ‘구전 마케팅’의 위력은 실로 컸다. 연장 상영이나 재상영을 이끄는 정도가 아니라 흥행을 좌지우지했다.

장기 흥행으로 이끈 일등 공신은 중장년 관객이었다. 이들이 몰리면서 흥행 능선을 넘을 수 있었다. 사극이라는 장르적 특성도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 되었다. 1월 셋째 주에 개봉한 <투사부일체>에 밀려 잠시 2위로 내려앉기도 했지만 중·장년 관객을 불러들이면서 다시 1위로 치고 올라왔다.

이런 양상은 1천1백만명을 모은 <실미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실미도> 역시 <말죽거리 잔혹사>에 1위 자리를 빼앗겼다가 중·장년 관객이 몰리면서 다시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중장년 관객에게 인기를 끈 비결에 대해 정대표는 “중장년 관객은 늘 준비되어 있다. 그들을 불러들일 영화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판소리를 영화에 녹여낸 <서편제>처럼 <왕의 남자>는 남사당놀이를 영화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잘 활용했다. ‘흥을 돋우고 한을 푸는’ 놀음판을 통해 희로애락애오욕이라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맛볼 수 있게 했다. 특히 남사당놀이의 근본인 ‘풍자 정신’을 영화의 주제로 승화시켰다.

<왕의 남자>는 전통 연희를 영화에 활용했다는 점에서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와도 비교된다. 전통을 영화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패왕별희>가 중국 현대사를 경극을 이용해 대하 서사시로 풀어냈다면 <왕의 남자>는 남사당놀이를 이용해 우리 역사를 서정시로 담아냈다.

개인의 역사를 역사 전체로 확장하는 중국 영화와 달리 역사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한국 영화의 특성은 다른 사극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위선적인 양반 제도를 남녀간의 사랑 문제로 그린 <스캔들>과 신분 제도의 모순을 복수라는 틀을 통해 들여다본 <혈의 누>는 역사적 허구를 인간의 문제로 해석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사의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환원시킨 덕분에 관객은 오늘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서 사회 현상을 수반하기도 했다. 현실 정치와 대비되면서 연산군과 공길의 관계는 노무현 대통령과 유시민의 관계로 비유되었다. 혹은 배우 출신으로 노사모 활동을 이끌었던 문성근·명계남 씨가 공길과 장생 역으로 극장 밖에서 회자되었다. 

<왕의 남자>는 사극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지루한 느낌을 없애기 위해 컷을 빨리 끊었다.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남자>는 10대 문화와 만나는 접점이 있었다. 그 접점에 있는 배우가 바로 공길 역할을 맡은 이준기다. 그의 역할은 <형사, 듀얼리스트>의 강동원과 비견된다. 둘 다 10대 팬을 공략하기 위한 캐스팅이었는데, 강동원이 검증된 스타이면서도 관객 모으기에 실패한 반면 이준기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0대 관객을 불러들였다. 이는 공길 캐릭터가 보여주는 동성애 코드가 10대들의 코드와 부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알찬 성공 거둬

제목이 암시하듯이 <왕의 남자>는 동성애 코드를 적극 활용한 영화이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해 조심스럽게 감성적으로 접근함으로써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커밍아웃을 했을 때, 홍석천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하리수는 받아들여졌던 것은 이성적으로 설득하느냐 감성적으로 소구하느냐 하는 차이였다. 하리수와 마찬가지로 감성적으로 접근한 <왕의 남자>는 관객이  불편함 없이 동성애를 수용하게 만들었다.

이준기 외에 다른 배우들도 캐릭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알 포인트>에서 보여주었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감우성은 반골 기질의 장생 역할을 잘 수행해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 정진영은 복합적인 안타고니스트(적대적 인물), 연산군 역할을 잘 수행해 중·장년 관객층에게 울림이 컸다. 장녹수 역으로 출연해 고전미를 선보인 강성연 역시 왕을 ‘미친놈’이라 부르며 새로운 팜므파탈(요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4명의 주인공 외에 내관 처선 역할을 맡은 장항선과 광대 육갑 역할을 맡은 유해진 등 조연들도 탄탄한 연기로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4명의 주연과 조연들은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관객이 영화를 다양한 시선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다중 구조는 <왕의 남자>가 세대 통합적인 텍스트가 되도록 만들었다.

<왕의 남자>가 돋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저예산 영화라는 점이다. 영화가 44억원의 예산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문화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촬영이 이루어진 곳은 부안영상테마파크였다. 이곳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촬영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문화원형 디지털 콘텐츠화 사업으로 제작된 ‘조선 후기 한양 도성 복원을 통한 디지털 생활사’ 자료를 활용해 시뮬레이션 촬영을 함으로써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다. 44억원으로 책정된 제작비 중에서 3억원을 절약해 41억원으로 제작한 <왕의 남자>는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알찬 성공을 거둔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왕의 남자>의 성공이 영화계에 끼친 가장 큰 기여는 사극 장르를 개척한 것이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 5백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영화는 대부분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영화계에서는 <조폭 마누라> 이후 조폭 영화들이 연이어 제작되어 흥행몰이에 나섰듯이 당분간 사극이 극장가에서 강세를 Elf 것으로 점치고 있다.

<왕의 남자>가 구축한 사극 장세의 최대 수혜자는 2월23일 개봉하는 <음란서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관심을 모은 이 영화는 <스캔들>의 각본을 썼던 김대우 감독이 연출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음란서생> 이후에도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방각본 살인사건>,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불꽃처럼 나비처럼>(가제), 그리고 <황진이> 등이 제작되어 이제 막 불꽃이 일기 시작한 사극 열풍을 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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