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낭만주의 수원지
  • 김태권(<십자군 이야기> 저자 ()
  • 승인 2006.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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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왕과 성배에 얽힌 이야기 묶은 <아발론 연대기> 완역

 
장 마르칼의 <아발론 연대기>(전 8권, 김정란 옮김, 북스피어)가 국내에서 완역 출간되었다. 흔히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로 통칭되는, 아더 왕과 성배에 얽힌 켈트 신화를 한데 묶은 책이다.

희랍 문명과 기독교 문명을 아울러 흔히들 서구 문명의 두 가지 원류라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기독교 문명으로 소개되는 문화유산의 상당수가 <성서>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성배(聖杯)’ 모티브는 오늘날의 영화와 판타지 문학 이전에도, 이미 영국과 프랑스의 숱한 문학에 직접 영감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독일 바그너의 가극에도 등장했다. 기독교 문명을 ‘노예의 도덕’이라 비난하던 니체가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치팔>에 격노하여 결별을 선언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성배 이야기가 정작 <성서>에는 직접 언급된 바 없다. 오히려 이와 비슷한 모티브는 켈트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본디 성배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잔이라고도 하고, 혹 십자가 위 예수의 피를 받은 잔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어찌어찌하다가 영국으로 옮겨졌으며 그것을 찾으면 온갖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전설이 성배 이야기의 전제이다. 그리하여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은 이승의 모든 쾌락을 버리고 성배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학자들은 성배의 근원을 켈트 신화에 나오는 신통력 있는 솥으로 본다. 이 솥이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고 예수와 관련된 잔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불교 문명처럼, 서양의 기독교 문명은 단지 히브리에서 전래된 외래 사상이 아니다. 켈트족과 같은 유럽 토착민의 정신 역시 사라지지 않고, 기독교 교의와 어우러지며 서구 기독교 문명이라는 큰 지붕 아래 오롯이 살아남았다. 그 중에서도 아더 왕과 그의 기사들 이야기는 과거의 유산이자 마르지 않는 후세의 영감이 되어, 서구 문명을 관통하는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아더 왕 이야기는 요즘 새삼 각광받는 그리스 신화와 나란히 서구 문명으로 접근하는 두 가닥 지름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미술사가 캐너데이는 예술 작품의 특질을 설명하기 위해 낭만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이라는 대립쌍을 설정한다. 지성에 강하게 호소하는 작품이 고전적이라면, 주로 감정이나 상상력에 호소하는 작품을 낭만적이라고 한다. 이 틀에 따라 서구 문명 일반을 돌아볼 수 있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서구의 문명에도, 다른 한편에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정서적인 흐름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이러한 ‘낭만적인 것’의 흐름에서도 우리는 성배 모티브를 만날 수 있다. 사실 ‘낭만’이라는 번역어부터가, 기사 이야기라는 말에서 비롯하지 않았던가. 기독교 문명의 힘이 약해진 근대 이후에도 성배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즉 신비와 숭고의 엠블럼 노릇을 해왔다.

근대의 이성 중심주의에 반발하여 등장한 상징주의 화가들의 회화에서 성배 모티브는 매우 핵심을 차지한다.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 비어즐리가 아더 왕의 죽음에 대한 일러스트로 데뷔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성배 모티브는 칼 융의 사상에서도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사족 한마디. 필자 역시 언젠가는 아더 왕에 관한 유럽 각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일관된 줄거리로 엮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알차고 재미있는 한 편의 지식 만화로 말이다. 그런데 장 마르칼이 쓴 <아발론 연대기>를 보고 그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연구의 성과인 이 작품보다 더 알찰 수는 없고, 소설 형식을 갖춘 이 작품보다 더 재미있기도 어려우리. 게다가 역자의 유려한 번역과 꼼꼼한 주석은 <아발론 연대기>를 더욱 알차게 가꾸어 준다. 이번 겨울, 이 책을 찬찬히 읽으며 서구 문명의 원류를 찾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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