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올해의 인물' 임권택 감독
  • 김훈 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9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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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을 육화하고 저질에 대항했다

 
임권택이 시대를 앞서가는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생애와 작품들은 한국 현대사의 중압과 고통 속에 매몰되어 예술이라기보다는 빈곤과 방황 그 자체이거나, 혹은 좀더 창조적인 경우에는 시대의 바로 뒷전에 카메라를 포진시키고 시대가 자생적으로 변화해 나간 만큼의 내용을 영상으로 수습하거나 전달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그 거북한 진실의 절정에서 <서편제>는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62년, 그는 26세의 나이로 감독에 데뷔했다. 그때 그는 김석훈 문정숙 엄앵란 황 해가 주연한 액션 드라마 <두만강아 잘 있거러>로 엄청난 관객을 끌어모았다. 그는 <두만강아 잘 있거라>러도, 90년의 <장군의 아들> 연작으로도, 또 <서편제>로도 관객 동원 기록을 경신해 왔다.

그리고 그 관객 숫자는 그의 감독으로서의 폭과 행복한 대중성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그가 동원한 관객 숫자 자체가 당대의 문화적 빈곤의 지표일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은 외세에 의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을 뿐 아니라, 그 비극에 대한 소화불량으로 인한 자기 정체성 상실의 비극이기도 했다. 폐허와 빈곤만이 절대적 생존 조건이었을 뿐, 그 폐허 위로 돋아난 문화는 모드 가건물로 지은 판자촌 문화였을 뿐이었는데, 임권택 영화의 본적지는 바로 그 판자촌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판자촌은 그 마을 안에 거주하는 인간들에게 허위와 저질, 결박과 無展望을 끝없이 육화시키고 에질화시키는 감염력 높은 판자촌이었고, 임권택 영화는 그 저질을 체질화하는 과정과 거기에 저항하는 두갈래 과정을 따라 전개되어 왔다.
 지금 <서펀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고, 그가 이루지 못한 많은 것들을 지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임권택이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당대사의 빈곤과 부랑을 모두 체득하고 그것을 뚫고 나와 자신의 문체(style)에 접근하는 점이다.

 
  ‘빨갱이 아들’의 가출

임권택의 두 손에는 지금도 미진과 같은 수전증이 남아 있다. 그 수전증은 그가 청춘을 내던지며 마셔버린 그 하해와도 같은 술의 여진이다. 그는 36년 전남 장선군 장성읍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이 조부는 소지주였고 부친은 제2고보(지금의 경복고)를 졸업한 개화 청년이었다. 조부는 토지개혁으로 농토를 잃어 임권택의 소년 시절에 이미 가세가 기울었는데, 그의 집안을 결정적으로 거덜낸 것은 삼촌과 어버지의 좌익운동이었다.

 큰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였다. 그 삼촌의 영향으로 그의 아버지 세대의 문중 청년들은 공산주의에 침윤되었다. 6 · 25를 전후로 아버지와 두 삼촌은 빨치산이 돼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그때 고모의 가족도 모두 산으로 들어갔고 집에는 조부와 어머니, 임권택과 어린 동생들만 남았다. 형사들이 수시로 들이닥쳐 온 집안을 뒤지며 아버지의 행방을 추궁했다.

어머니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경찰서로 끌고가 고문을 했다. 매를 맞고 돌아온 어머니는 뱃속의 아기를 유산하고 청산가리를 마셨다. 조부는 지옥 같은 고향으로부터 임권택을 빼내 광주 숭일중학에 입학시켰는데 그 해 6 · 25가 터졌다. 국군과 공산군이 밀고 밀리는 전황에 따라 고향 마을에서는 유격대와 토벌대가 번갈아 읍을 점령하며 죽고 죽이는 학살극이 벌여졌고, 그 무렵 산 속에서 병이 깊어진 아버지는 하산하여 자수했다.

임권택은 ‘빨갱이의 아들’이라는 학대와 소외를 견디지 못해 광주에서의 학업을 포기하고 피난 수도인 부산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그의 학력은 광주 숭일중학교 3년 졸업으로 끝난다.

 부산에서 임권택은 지게꾼이 되었다. 부두나 시장에서 등짐을 지는 것이 그이 생업이었다. 그 날 번 돈은 그 날 모두 마셨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지게꾼 청년은 드럼통을 끼고 앉아 소금을 안주로 매일 소주를 마셨다. 그때 이미 그의 두 손은 심하게 떨려, 대접에 따른 소주를 엎지를 정도였다. 황폐와 빈곤, 공포와 주눅은 그이 가장 본질적 운명이었고 그이 영화의 출발이었고 한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그리고 그 황폐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종전 직후 서울에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부산 피난지에서 미군 부대의 헌 군화짝을 불하받아 시장에 내다팔던 월남 피난민들이 서울로 올라가 영화판을 차렸는데, 20세의 임권택은 이들에게 붙어 서울의 영화판으로 올라왔다. 이것이 그이 입문이었다.

‘빨갱이의 아들’에게 막노동이라도 시켜주는 곳은 그래도 영화판뿐이었다. 촬영 현장에서 그가 할 일은 스태프에게 자장면을 날라다 주고 여배우들의 화장품과 옷가지를 챙기고 중장비를 운반하는 일이었다.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이나 목표는 애초부터 있을 리 없었고, 그런 목표에 따라 노력한 일도 없었다. 영화 이론을 배울 수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슨 작가 의식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26세 감독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흥행에 성공하자 그에게는 액션 · 멜로 · 코미디 · 사극 등 오직 흥행만을 목적으로 하는 싸구려 영화 제작 의뢰가 쇄도했다. 그는 ‘가케모치’(두편의 영화를 한 감독이 동시에 제작하는 일)도 마다 않고 1년에 5~6편씩 영화를 쏟아내, 데뷔 10년여 만에 5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젊은 감독이 지휘한 배우들은 최남현 황  해 장동휘 허장강 박노식 독고성 김석훈 등이었고, 여배우들은 주중녀 노경희 엄앵란 김지미 등이었다.

 
<잡초> 이전의 작품 50여 편은 ‘습작’

 그는 데뷔 이후 10년 동안 그렇게 해서 만든 영화를 ‘50여 편의 습작’이라고 단언했다. ‘흥행 감독’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영화판이 적자생존 원칙이 요구하는 싸구려와 날림이 체질화해 갔지만, 흥행은 성공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김치와 소금으로 소주를 마시는 폭음의 세월은 계속되었다.

 영화감독 임권택은 73년 <잡초>에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에 개안하고, 그 개안을 실천함으로써 자기 생애에 중요한 분기점을 마련했다. <잡초>는 기발한 착상이나 실험 기법을 동원한 영화는 아니었다. 이 영화는, 버려야 할 땅, 살 수 없는 땅에서, 그러나 그 땅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삶을 정직하게 그려낸 소박한 리얼리즘 영화였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던 시절 임권택의 내면 풍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젊은 감독의 내면 풍경의 영상적 완성을 위해 돈을 대겠다는 제작자는 없었다. 임권택은 스스로 돈을 끌어들여 자기 영화 <잡초>의 감독과 제작을 겸했다.
 각 지방의 흥행 브로커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그 지방의 흥행권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미리 돈을 받아쓰는 입도선매 방식으로 그는 약간의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자본가의 간섭과 흥행성을 강조하는 잔소리에서 해방된 촬영은 행복했다. 영화가 완성되어 대한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흥행은 참패였다. 관객은 리얼리즘이 요구하는 고통과 긴장을 철저히 외면했다.

 “<잡초>는 흥행에서 완전히 실패했지만,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고통스런 땅과 그 불모의 영화판에서 계속 살기로 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자초>로 참패하고 또 부활하던 73년 무렵부터 한국 영화는 기나긴 침체와 파행의 시대로 접어든다. 긴급조치 시대였다. 영화사는 20개 사로 통 · 폐합되거나 또는 도산했고, 당대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려는 수많은 영화들은 검열 과정에서 폐기처분되었다.

 한국 영화는 관객들에게 외면당한 채 다만 수입 쿼터와 맞바꾸기 위해 이른바 ‘우수 영화’라는 것이 제작되었다. 임권택은 <잡초>이후 80년까지 모두 24편의 영화를 만들었는 데 그 중 14편이 ‘우수 영화’로 선정되었다. 그는 그렇게 외화 수입 쿼터를 얻어다 줌으로써 제작자를 안심시키는 한편, 제작비를 얻어내 자신의 영화를 실험하고 또 연습하면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시절이 그에게는 오리려 매우 우호스런 환경이 되어주었다. 그때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결합하는 폭과 장인 근성을 터득해 나갔고, 81년 <만다라>는 그 빛나는 성공이었다. 이상현과 송길한이 각본을 쓰고 정일성이 카메라를 잡고 안성기 전무송 방 희가 주연을 맡았다.

 <만다라>에서 임권택은 감독의 주제 의식을 대다하게도 화면의 거죽으로 밀어올렸다. 그는 인물과 이야기에 끌려가지 않고 감독의 주제 의식에 따라 미리 설정한 구도 안에 인물을 배치했다. 구도를 미리 설정하자 카메라를 별로 이동할 필요가 없었고, 고정된 카메라가 확보한 공간 안에서 내러티브는 잔잔하게 심화되어 갔다. 다양하게 바뀌는 화면에 의한 속도감에 길들여진 한국 영화 관객들에게, 고정된 카메라의 공간 안으로 심화해 가는 의미와 이미지의 그물망을 호소력 있게 설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는 그 모험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주제 의식에 의한 영상 공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길소뜸>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개벽> 그리고 <서편제>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계승되었고 그 성공은 관객과 함께 누리는 성공이었다. 척박하고 고통받는 조국 산천의 풍광이 얼마나 눈물겹게 아름다운지를 포착하려는 노려도 일관되게 지속됐다.

 <길소뜸>에서 임권택은 비로소 현실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냉혹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길소뜸>은 송길한이 각본을 쓰고 정일성이 카메라를 잡고, 김지미 신성일 한소룡이 주연을 맡았다. <길소뜸>은 치밀하게 조직된 논리적 화면을 보여준다. 이산가족 재회의 원한과 통곡이 하늘을 찌르던 시대에 그는 도대체 인간의 만남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매우 건조한 연출을 통해 아프게 묻고 있다.

자기의 현위치를 방어하려는 내면의 두려움과 욕망의 힘 앞에 허망하게도 무너져버리는 인륜의 모습을 그 영화는 보여준다. <잡초>를 통해 살아난 임권택의 삶에 대한 긍정과 열정은 <길소뜸>에 이르러 매우 논리적인 자기억제 장치를 확보함으로써 안으로 심화하는 것이다.

“지금 그에게 ‘새 들판’이 열리고 있다”

 
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주연 배우인 강수연이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음으로써 임권택 · 강수연 콤비를 세계 정상으로 밀어올렸다. 그 영화에서 강수연은 해탈을 위해 입산했다가 다시 환속하는데, 산속의 강수연과 저자의 강수연은 연기의 일대전환을 보여준다. 환속한 강수연은 이 세상의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여자의 그 넉넉하고도 큰 연기와 표정을 보여준다. “나는 그때 환속한 강수연에게 더 크고 더 넓은 연기, 세상에 온갖 풍상이 다 녹아들어 있는 연기를 요구했다”라고 임권택은 밝혔다.

 <길소뜸>에서 김지미의 억제력과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강수연의 포용력에 도달한 임권택은 그 힘을 몰아 <개벽>과 <서편제>로 나아간다. <개벽>에서는 이념도 농민 전쟁도 작품의 중심부로 진입하지 않는다.

그것이 영화 <개벽>에 대한 비판 중의 하나였지만 임권택은 “나는 농민 전쟁이 아니라 동학이라는 정신의 절정과, 그 정신을 낳고 그 정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라고 말한다.

임권택은 이념에 의한 전망과 그 전망이 요구하는 고통을 따라갈 감독이 아니다. 그이 생애가 그것을 거부한다. 그는 오히려 이념에 의한 전망을 애써 회피하고, 전망이 회피된 자리에서의 머뭇거림으로 인본주의를 건설하려는 감독일 것이다.

 그가 새롭게 시작한 <태백산맥> 속에서도 감독으로서 그이 세계 해석과 연출 방향은 <개벽>에 이어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개벽>에서 이덕화의 연기가 해월의 내면을 심도있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감독의 세계 해석이 그의 한계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부당할 터이다. 그것은 한계라기보다는 한국 현대사의 밑바닥 수렁을 통과해온 그의 삶 자체일 것이다.

 진도아리랑에 의해 인도되는 <서편제>의 롱테이크 5분40초는 한의 응축 · 삭임 · 추스림, 그리고 삶의 새로운 활력과 역동성으로 작용하는 살아 있는 한의 모습을 보여 준다. 멀리서 한개의 점으로 출현하는 인물들이 화면의 왼쪽으로 프레임 아웃된 뒤 카메라는 잠시 동안 빈 들판과 하늘을, 구름과 먼지와 바람을 비치는데 그 들판의 의미는 5분40초 전의 들판과는 전혀 다른,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새 들판이다.

 판자촌 문화에서 <서편제>까지를 헤치고 나온 임권택 감독에게 그 새 들판은 지금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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