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샤의 추억’은 씁쓸했네
  • 칭다오 · 정유미 통신원 ()
  • 승인 2005.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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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에서 일본 기생 역 맡은 중국 배우 장쯔이, 반일 정서 탓에 ‘곤욕’

 
지난해 2월 탤런트 이승연이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 화보집을 찍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에서 국민적인 분노가 들끓었다. 혹독한 비난에 직면한 이승연은 필름을 전량 소각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에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했지만,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가까워진 지금까지도 이승연은 용서받지 못한 채 브라운관 복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국민 배우 장쯔이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을 맡고 <시카고>의 롭 마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장쯔이를 두고 '몸과 조국을 함께 팔았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아서 골든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게이샤의 추억>은 193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나 혹독한 시련을 거쳐 전설의 게이샤가 된 ‘사유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게이샤의 추억>은 주인공 사유리 역의 장쯔이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중국 톱 배우인 궁리, 양쯔충이 각각 사유리의 라이벌과 스승 게이샤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는 점에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한국에서는 이미 김희선과 김윤진이 게이샤 역 제의를 받았으나 고사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김희선은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제작을 계획했던 직후인 지난 1998년 일찍부터 캐스팅 물망에 올랐다. 김윤진은 지난해 캐스팅 제의를 받았으나 “일본 게이샤 역할로는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싶지 않다”라며 거부해 국내 팬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명도 면에서는 이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국민 배우 장쯔이가 게이샤 역을 수락한 것은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꼴이 되었다.
  <게이샤의 추억>은 미국과 일본 개봉을 1주일 가량 앞둔 12월 초, 이미 불법 복제판으로 중국 DVD 시장에 등장했다. 중국에 정식 개봉되기 두 달이나 앞서 일반에게 미리 공개된 것이다.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화제작을 구해보려는 중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 산둥성 칭다오 시에서 DVD를 파는 한 상인은 “분위기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게이샤의 추억>이 출시됐다는 안내문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갖다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중국 네티즌, 기모노 입은 포스터 보고 ‘발칵’

그러나 이 영화가 최근의 반일 정서를 도외시한 것은 사실이라고 많은 중국인들은 생각한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아소 다로 외상의 잇단 망언으로 반일 감정이 격화하던 차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상하이자오퉁 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은 “어차피 서양 사람들은 중·일 관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이 장쯔이라는 미모의 중국 여배우 역할과 행동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오락거리로만 눈길을 끌어 결과적으로 중국 역사를 왜곡할 것이라는 얘기다.

 
정작 어려움을 겪는 것은 중국에 사는 일본인들이다. 이들은 반일 감정이 잦아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큰 사건이 터졌다고 울상이다. 지난 12월3일 저녁 칭다오 시의 한 호텔 연회장. 주말마다 열리는 일본인들의 친목 모임에서 영화 <게이샤의 추억>이 화제로 등장했다. 무역 회사에 다니고 있는 야마구치씨는 “길거리에서 일본어를 쓰기만 해도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밤거리를 다닐 때는 일부러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그동안 중국 언론들은 장쯔이가 할리우드 대작에 출연한다는 사실만 주목했을 뿐, 이 영화가 불러일으킬 반일 감정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장쯔이의 출연이 확정되면서부터 중국 언론들은 앞 다투어 ‘중국 여배우의 할리우드 접수’ 사실을 대대적으로 다루는 한편, 장쯔이가 과연 오스카상을 거머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중국 네티즌들은 달랐다. 특히 장쯔이가 기모노를 입고 백옥처럼 흰 피부의 게이샤로 분한 포스터를 보는 순간,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장쯔이가 남자 주인공인 와타나베 켄과 정사 장면을 찍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여론은 비판을 넘어 분노로 바뀌었다. 중국 네티즌들은 “장쯔이가 중국을 대표해 영화를 찍으면서 일본 기생 역할을 맡아 일본 남자와 정사 신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민족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장쯔이로 보이는 여배우가 일본 남자배우와 격정적인 정사 신을 벌이는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되어 떠들썩했으나 조사 결과 일본 영화의 한 장면으로 밝혀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중국 <마이르티엔츠바오>는 논평을 통해 장쯔이에 대한 비난이 ‘여성의 몸’이 지니는 상징성에 집중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중국 여성이 일본 남성의 배 아래 누웠다는 사실이 수많은 중·일 근대 역사 속에 서린 치욕의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할리우드에 불고 있는 일본 문화 열풍은 한국 문화계에도 시사점을 준다. <게이샤의 추억>은 재작년 톰 크루즈가 주연해 화제가 되었던 <라스트 사무라이>에 이어 할리우드가 일본 문화를 정면으로 다룬 두 번째 작품이다. <패왕별희>의 첸 카이거 감독은 “미국인 감독은 일본 전통 문화를 중국인이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라며 동양 문화에 대한 편견을 지적했다. 동양 문화가 일본 문화로 대표되는 것 또한 위험하다는 지적도 무시할 수 없다.
    
장쯔이는 온갖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1월29일 일본 도쿄 시사회에 이어 12월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시사회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완벽한 게이샤가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노력해 왔는지를 인터뷰에서 밝힌 장쯔이는 아시아 배우의 능력을 전세계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자신감을 엿보였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표지를 장식했으며 중국 여배우 중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장쯔이가 과연 현재의 국민적인 인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서였다면, 인기에 대한 기대는 포기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칭다오·정유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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