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 소녀’에 헉, 문단은 충격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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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 낸 소설가 김애란

 
“이건 얼짱 각도가 아닌데.” 포즈를 취하며 그녀가 명랑 소녀처럼 말했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앞. 저녁 7시. 퇴근길 샐러리맨들이 지나치며 연신 흘끔거렸다.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그녀, 민망한 듯 얼굴에 미소를 살짝 얹는다. 그러더니 한마디 더 했다. “사진 제목은 순수로 해주세요.”

사진의 주인공 이름은 김애란. 1980년생이니까 올해로 만 스물다섯이다. 소설가. 2002년 가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았고, 당선작이 <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에 실리면서 문단에 나왔다. 지금까지 발표한 소설은 단편 열 편이 전부다(12월 초 <현대문학>에 실릴 예정인 단편을 포함하면 곧 열한 편이 된다).

김애란씨가 문단의 화제다. 백발 성성한 작가 김원일씨로부터 소장 평론가들까지 감탄사 연발이다. 올해 봄·여름에는 여러 계간지에 김애란 소설론이 실렸다. 아직 책 한 권 내지 않은 신인에게 이렇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일보문학상을 탔다. 최연소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녀의 등장은 한국 문단의 사건이다. 인터뷰하던 날, 11월23일, 그녀의 첫 소설집이 서점에 깔렸다. <달려라, 아비>(창비).

전통 소설의 표정으로 전통 허물다

“책 봤어요?” “제 책 보셨어요?” 질문이 동시에 터졌다. 만나러 오기 전 그녀는 교보문고에 들렀나 보다. 하지만 책이 아직 매장에 깔리지 않았단다. “<달려라, 아비> 있어요?” 매장 직원이 창고에 가서 책을 찾아오더니, 물었다. “이 소설 쓰신 분 아니세요?” 그녀는 직원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책에 사인을 하며 생각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어.’ 농담처럼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꼭 ‘공주’다. 그런 그녀의 일과 중 하나. 매일 식후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자기가 쓴 소설을 다시 읽는 것이다. 공주 맞나?

그러기엔 그녀는 소심하다. 재작년 겨울 두 번째 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가 현대문학상 최종심에 올랐을 때다. 시상식장에 초대받은 그녀. 하지만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상에 차려진 떡이 먹음직스러웠지만 끝내 집어먹지 못했다. “아무도 아는 체 안하는데도, 쟤는 떡만 잘 처먹네, 할 것 같아서요.”

그런가 하면 그녀는 도발적이다. 인터뷰 도중 요즘 잘 나가는 한 30대 작가가 화제에 올랐을 때다.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도드라졌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나이 차이는 10년 정도 나지만, 선배인 동시에 동시대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소설은 독특하지 않다. 형식을 비틀지도, 문체를 파괴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친숙함이야말로 김애란 소설의 무기다. 문학 평론가 김동식씨에 따르면, 김애란은 전통적인 소설의 표정을 지은 채로 소설의 전통적인 문법을 그 내부로부터 허물어뜨리는 작가다. 표제작 <달려라, 아비>를 보자.

이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딸의 이야기다. 달동네 남자의 방에 어느 날 고향에서 무작정 상경한 여자가 찾아온다. 며칠 동안의 실랑이 끝에 여자가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다. 단 조건이 당장 피임약을 구해 와야 한다는 것. 남자는 피임약을 구하러 달동네 내리막길을 정신없이 달린다. 그러나 여자가 덜컥 임신을 하자, 남자는 달리듯 사라져버린다. 사생아로 태어난 ‘나’에게 아버지는 늘 달리고 있는 사람이다.

 
김애란 소설의 소재는,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와 달리 대개 진지하고 무겁다. 주인공은 늘 가난하고, 독거녀이거나 불면증에 시달리고, 사생아거나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이력서를 수백 편도 더 쓴 취업 재수생이다. 이럴 때 전통적인 주인공들은 분노하거나, 복수를 꿈꾸거나, 화해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녀의 주인공들이 문제를 대면하는 방식은 다르다. ‘나’(그, 그녀)는 다만 상상할 뿐이고, 그걸 통해 정신적 상처와 삶의 고통조차 긍정으로 바꾸어버린다.

가령 <달려라, 아비>에서, 아버지가 실은 미국에 가서 결혼해 자식까지 낳고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이렇게 상상한다. ‘그러다 나는 문득, 아버지가 그동안 언제나 눈부신 땡볕 아래서 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해법은 아버지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우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가 하면 <사랑의 인사>에서 공원에 버려진 어린 ‘나’는 자신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길을 잃었다고 상상한다. 상상은, 그녀의 소설 주인공들에게 삶의 동력이자 세상 혹은 독자와 만나는 통로다.

“저는 연민이 비난이나 경멸보다 무례한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또 저는 제 소설 주인공들을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 안에 감정을 넣어버리면 독자들은 어떻게 해요.···사실 어떤 전략이나 계획을 세워 글을 쓰지 않아요. 그냥 쓰기 시작하죠. 주인공과 독자가 손잡고 같이 이야기를 발견하는 느낌, 백두산 위에 천지가 있다는데 가보지 않을래가 아니라 같이 막 올라갔는데 천지가 갑자기 나오는 것 같은 느낌, 그런 게 좋아요.”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나’다. 이미 발표한 소설 열 편 중 여덟 편이 1인칭이다. 그런데도 김애란 소설이 1990년대식 ‘사소설’ 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은 작가와 주인공의 거리감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나’들은 그렇게 타자화하고 객관화한다. 나는 없다. 계급적인 문화 취향만 있을 뿐.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김애란 소설 가운데 ‘나’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인 작품이다. 하지만 거기서 ‘나’는 상대방들에게 철저하게 익명의 존재다. 양반김, 제주삼다수, 깨끗한나라 화장지, 좋은느낌 생리대, 도브 비누 따위가 구체적인 상품명을 드러내는 것과 대비된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녀는 산업사회 대도시에서 소외된 자들의 삶을 드라이하게 보여준다.

김애란씨는 인천에서 태어나 충남 서산에서 자랐다. 쌍둥이 언니가 있고, “아버지 어머니 모두 잘 계시다.” 그녀의 소설 속에는 식구들의 일화와 캐릭터가 곳곳에 녹아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백일장에 나가 ‘워크맨’을 탔고, 그걸 팔아 한국예술종합학교(예종) 원서를 샀다. 지난해 예종 극작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학교에서 조교 생활을 하다가 지난 8월 그만두었다. 학생 시절 황지우 시인에게 다섯 과목을 들었고, 조교 시절 소설가 김영하씨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학교 분위기가 일반 대학과 달라, 홀로 습작기를 거쳤다. 집필 장소를 가리지 않는 편이어서, 주로 학교나 동네 도서관에서 시험 공부 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노트북을 토닥거리며 지었다.

그녀는 현재 전업 소설가 상태지만, 장기적으로 직장을 가질 계획이다. 단 글을 쓰지 않는 곳으로. 글 쓰는 직장에 있으면 소설을 제대로 못 쓸 것 같아서다. ‘최연소라는 수사 주위에서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것을 응시하겠다. 신화가 되고 싶지 않다.’ 그녀의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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