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꿈꾸던 두 거목 지다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5.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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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오늘]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중동 화해’ 산파 이츠하크 라빈 타계
 
39년 만의 입국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영정뿐이었다. 10년 전인 1995년 11월6일,  고(故) 윤이상 선생은 사망한 지 사흘 뒤에 한 장의 영정 사진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였다. 한국의 전통음악적 요소와 서양의 현대 작곡기법을 조화시킨 <심청> <광주여 영원하라>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 등 작품 1백50여 편을 남겼다. 생전에 그가 머물렀던 독일의 언론들은 윤이상 선생의 타계를 대서 특필했다.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는 ‘블협화음이 만연한 시대에 세계를 하나로 잇는 하모니를 이룬 인물. 음악계의 큰 별이 사라졌다’고 애도했고, 디 벨트도 ‘음악을 통해 한국 통일과 세계 평화를 위해 살아온 휴머니스트’라고 고인을 평가했다.

현대 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예술가였지만 정작 고국은 그에게 가혹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윤이상 선생과 부인 이수자 여사는 함께 투옥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2년 뒤에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된 후 독일로 돌아갔다.

불행한 사건으로 고국을 등졌지만 그는 고향을 그리워했다. 생전에 그를 만난 사람들에 따르면, 선생은 고향 통영 앞바다의 섬 이름을 하나씩 외우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고국행은 번번이 금지되었다. 1994년 9월, 윤이상 음악 축제가 열려 귀국이 추진되었으나 막판에 한국 정부와 갈등으로 결국 ‘주인 없는 음악제’로 치러졌다.

올해 윤이상 선생 타계 10주기를 맞아 그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한창이다. 추모 음악회가 잇달아 열리고, 그의 음악과 삶을 살피는 심포지엄 및 강의가 개설된다. 고향 통영에서는 ‘윤이상 선생 명예 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이 결성되었다. 그의 복권 문제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조사하는 동백림 사건 결과 발표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현재 이수자 여사는 선생이 복권될 때까지 한국에 귀국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10년 전 이스라엘에서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극우파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는 1993년 9월13일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수반과 ‘오슬로 협정’을 체결해 중동 평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두 사람은 중동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화의 노래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라빈 총리가 한 유태인 극우파에게 암살되면서 중동 평화 과정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95년 말 AP통신이 40개국 1백57개 언론사를 상대로 1995년 10대 뉴스를 조사했는데, 라빈 암살 사건이 2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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