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거짓말 그리고 광고주
  • 윤준호(카피라이터, 서울예대 광고창작과 교수) ()
  • 승인 200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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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광고인으로서 심한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알맹이는 하나도 없이 그저 현란한 표현 기법으로 사람을 홀리거나, 그럴듯한 수사를 동원하여 소비자의 판단력이나 흐려놓는 광고를 볼 때 그렇다. 상품 광고보다는 이른바 기업PR 쪽에 그런 것들이 많다. 연관성도 없는 영상 이미지로 소비자의 넋을 빼고 사실과는 동떨어진 카피로 얼버무리는 광고들. 

이를테면 이런 광고가 있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이라 말하고 싶은 것 같은 어느 건설회사 광고다. 영상은 그림 같고 카피는 한 줄의 시를 닮아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광고의 껍데기만 놓고 본다면 어떤 명작 광고에 비겨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 메시지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그 회사 사람들은 틀림없이 멋진 로맨티스트인 동시에 훌륭한 환경론자들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 광고가 참으로 가련해 보인다. 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지어낸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실제 기업 활동이나 기업의지에 기초를 둔 생각이기보다는 그저 솜씨 좋은 카피라이터의 손끝에서 나온 메시지 같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서시>처럼 고결한 다짐을 하면서 자연을 걱정하는 그 멋진 광고를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저렇게 근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고, 내가 사는 동네의 허파와도 같은 자연 습지 위에 그 회사의 이름으로 아파트를 지으려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궁금증은 또 있다. ‘옳지 않은 일, 눈살 찌푸릴 일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기업들과 광고 속의 기업 이름들은 다른 것일까.’ 자신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들끓는데도 광고는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큰 목소리로 여전히 당당한 이야기만 골라 하고 있다.  

윤리의식조차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자신들은 마치 하늘의 심부름이라도 하는 존재인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개인이라도 얼굴이 뜨뜻해질 형편인데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런 기업들일수록 꿈도 크다. 세계 유수의 경제 저널에서 조사·발표하는 ‘존경받는 기업’ 랭킹에 오르고 싶어한다.   

물론, 광고가 언론기관에 돌려지는 보도 자료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공문서처럼 언제나 사실과 부합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광고가 기업의 꿈을 이야기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서 이루어내는 삶의 판타지를 펼쳐 보여주는 무대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문제는 메시지의 진정성이다. 무릇 광고주들은 소비자를 만화영화에 빠진 어린이처럼 생각해 그들이 궁극적으로 수용할 메시지의 진실성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은 생각의 주인이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생각이 언필칭 기업 철학 아닐까.  

철학이 있는 기업은 광고를 어떻게 꾸밀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소비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낸다. 광고를 통해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갈까를 걱정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어떤 정신을 가진 기업이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기업이라면, 어떤 자리에서 어떤 형식의 이야기를 펼쳐놓아도 허튼 소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진지하게 읽히고 곧이곧대로 들릴 것이다. 아무도 그 기업 광고 메시지의 뼈대를 이루는 사실의 순도(純度)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고에 담긴 기업의 진심은 결혼반지의 그것처럼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광고주의 인격과 양심의 문제다. 광고주의 인격? 그것은 기업의 인격이다. 기업도 인간, ‘법이 만든 사람(法人)’아니던가. 그렇기에 광고 역시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광고가 기업의 치부를 가리거나 거짓 얼굴을 내보이기 위한 분식(粉飾)의 수단이 되는 사회와 경제란 그 구성원들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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