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이 한을 품자 식은땀 흘리는 부시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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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핸 여사 반전 시위에 눌려 ‘끔찍한 휴가’ 보내

 
해마다 8월이면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는 텅텅 빈다. 대통령이나 연방 의원들이 한 달간의 달콤한 휴가를 즐기러 워싱턴을 떠나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텍사스 주 크로포드의 드넓은 목장에서 망중한을 즐겨왔다. 그러나 부시에게 올해 휴가만큼은 악몽과도 같다. 8월의 뜨거운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장 입구에 진을 치고, 지난해 이라크 전쟁에서 잃은 아들을 살려내라는 신디 시핸(48)이란 한 주부의 항의 시위 때문이다.

이 여인의 시위는 날이 갈수록 동조자들이 모여들면서 지금은 전국적인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로 번졌다. 동시에 신디 시핸은 반전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크로포트 목장 앞의 반전 시위가 CNN 같은 주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백악관도 잔뜩 긴장하는 모습이다. 미국 언론은 그런 그녀를 두고 ‘허리케인 신디’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반전 시위가 불러올 정치적 파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부시의 진땀을 뻘뻘 흘리게 만들고 있는  시핸 여사는 부시 대통령에게 전사한 아들 문제와 관련해 면담을 요구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항의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언론은 그녀가 동조자들과 함께 진을 치고 있는 곳을 두고 ‘케이시 천막’으로 부른다. 케이시는 다름 아닌, 지난해 4월 이라크에 파견된 지 불과 닷새 만에 이라크 반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한 시핸의 아들 이름이다. 그녀는 당초 부시가 자신에게 한 시간 가량의 면담을 허용한다면 시위를 그만두고 철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지금은 엄청난 ‘추가 조건’이 붙었다. 이라크로부터의 즉각적인 미군 철수까지 요구한 상태다.
 
그녀의 놀라운 파괴력은 다름 아닌 평범함 그 자체다. “나는 아들을 잃고 상심한 어머니다. 이라크에 자녀를 보낸 다른 어머니들이 나처럼 상심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녀의 결의에 찬 말 한마디가 반전 시위자들뿐 아니라, 자식을 둔 수많은 평균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사실 아들이 전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핸 여사는 지극히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다. 그녀는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에 만난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4남매를 두었다. 남편은 세일즈맨으로 일했고, 그녀는 포도주 산지로 유명한 나파 군의 보건부에 취직해 가정을 꾸려나갔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미국 가정의 모습이었다.
이들 부부의 운명은 지난해 4월4일 이라크에 파견된 장남 케이시(당시 24세)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면서 180° 바뀌었다. 큰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시핸 여사는 다니던 보건부 일도 그만두었다. 그녀는 지난해 다른 전사자들 가족과 함께 백악관에 초대되어 부시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 속에는 반부시, 반 이라크 전쟁의 강렬한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각종 반전 운동에 가담하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가족들의 모임인 ‘평화를 위한 금성 가족’을 만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짓말한 부시 탄핵해야 한다”

급기야 시핸 여사는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미국은 물론,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부시 대통령의 크로포드 목장을 시위 장소로 선택하고, 지난 8월6일부터 시위에 들어갔다. 그녀는 부시에게 면담을 요구하는 한편 부시가 국민들에게 이라크 전쟁에 관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탄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특히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전쟁을 벌이는 정부를 지지할 수 없기 때문에 납세 거부를 벌이겠으며, 국세청이 자기를 고발해 재판정에 서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녀의 시위는 외롭지 않았다. 자신처럼 이라크에서 자식을 잃는 가족들을 포함해 시위자가 금새 100명 이상으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지난 8월17일에는 약 5백명의 시위대가 백악관 바깥에 모여 “부시는 시핸 여사를 만나라!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라! 이라크 전쟁은 석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전쟁을 즉각 끝내라!” 같은 구호를 밤새 외치기도 했다.

특히 이번 행사를 조직한 캐런 브래들리는 마이크에 대고 “신디 시핸, 그대는 우리 모두의 힘을 북돋는 영감이다”라고 외쳐 큰 박수를 받았다. 이처럼 시핸의 시위로 촉발된 반전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인터넷을 통한 진보운동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무브온(Moveon.org)은 지난 8월17일 미국 전역에서 시핸을 위한 촛불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 단체의 워싱턴 지부장인 톰 매치는 “시핸 여사는 반전 운동의 카타르시스요, 모든 사람을 일깨우는 전령과도 같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시핸 여사로 상징되는 반전 운동이 날이 갈수록 진가를 발휘하자 부시의 맹목적 지지자들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대표적 우파 단체인 ‘미국의 전진’(Move American Forward)의 회원들이 전국을 순회하며 이라크 전쟁의 당위성을 홍보하기 시작한 데 이어, 부시의 일부 극성 지지자들은 지난 8월22일 크로포드 목장으로 진출해 시핸이 이끄는 반전 시위대와 충돌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보수적 칼럼니스트와 웹사이트는 그녀가 반전 시위 활동을 주도하고 있는 좌파의 ‘주구’에 지나지 않는다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특히 선정적인 정치 폭로 웹사이트로 악명 높은 드러지 리포트는 시핸의 남편이 최근 부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는데, 주된 이유는 부인의 극단적인 행동 때문이라는 투의 기사까지 내보냈다. 우파 TV인 폭스 뉴스의 저명한 시사 토크쇼 진행자인 밥 오라일리는 “신디 시핸은 이제 대통령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데 주된 관심을 가진 정치적 활동가이지 단순 시위자가 아니다”라고 꼬집기도 했다.

보수파, 시핸 여사 흠집내기 혈안

문제는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시핸의 반전 시위에 대한 부시의 태도. 그는 최초 그녀의 시위 소식을 접하고는 “여긴 미국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권리를 갖고 있다”라면서도 면담은 한사코 거부했다. 백악관측은 부시가 9월3일 백악관으로 복귀할 예정이지만 그 전에 시핸을 만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아들을 잃고 비통해 하는 시핸의 저항적인 몸짓이 이라크 전쟁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는 미국인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한걸음 더 나가 부시의 전후 이라크 재건 노력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군이 지난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해 전쟁이 종식된 이후 최근까지 사망한 미군 병사는 이미 1천8백여명을 넘어선 상태다. 아프가니스탄 미군 사망자까지 합치면 2천명이 훨씬 넘는다. 게다가 이라크에 배치되어 있는 13만8천여 명의 미군은 언제 철수할지 윤곽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다. 미국 여론도 10명 중 약 6명이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테러 공격에 더 노출되었다며 불안해 하고 있다. 게다가 부시의 이라크 정책에 대한 지지도 역시 30%대로 추락한 상태다. 이래저래 꼬일 대로 꼬인 이라크 전후 처리에다 크로포드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시핸의 반전 시위로 부시의 올 여름 휴가는 끔찍한 악몽으로 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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